※3월 24일 일본 문부과학성이 중학교 교과서 검정결과를 발표하면서 또다시 역사 왜곡 논란이 불거지고 있습니다. 왜 이런 현상이 이어지고 있으며 구체적 내용은 무엇인지, 동북아역사재단 전문가들이 상, 중, 하 세 차례에 걸쳐 짚어봅니다.
일본교과서왜곡 집중분석 <중> ‘위안부’ㆍ강제동원 기술 변화
지난해 12월 헌법재판소 선고를 들으며 눈물을 흘리고 있는 이옥선 할머니. 위안부 할머니들의 유일한 소원은 살아 생전에 제대로 된 사과를 받아보는 것이다. 광주=연합뉴스

지난 3월 24일 일본 중학교 검정결과 발표 직후 산케이신문은 ‘종군위안부’ 명칭이 부활하는 등 중학교 교과서 검정에서 자학색깔이 강해졌다고 보도했다. 3월 25일 사설에서도 ‘검정마저 자학사관에 빠진 것이 아니냐’고 문제를 제기했다.

◇ ‘자학사관’, 오래된 주장

일본 역사교과서가 자학적이라는 공격은 1950년대부터 있었다. 1957년도 교과서 검정에서 이에나가 사부로(家永三郞) 교수가 집필한 고등학교 역사교과서 ‘신일본사’가 검정에서 탈락했다. 이유는 “과거의 사실을 반성하려는 열의가 지나쳐, 학습을 통해서 선조의 노력을 인식하고 일본인으로서의 자각을 높이고 민족에 대한 풍부한 애정을 키운다는 일본사의 목표와는 거리가 멀다”는 것이었다. 1969년 검정에서는 난징대학살 기술이 “일본에게 부끄러운 일이 될 수 있는 것을 들추어낼 필요는 없는 것 아니냐”는 이유로 삭제 당했다.

이에 맞서 이에나가 교수는 1965년 검정제도는 위헌이라는 소송을 제기했다. 소송은 2차, 3차로 이어졌고 1997년까지 32년간 진행되었다. 비록 검정제도가 위헌이라는 판결을 얻어내지는 못했으나 검정제도의 부당성을 알리고 일본의 가해사실을 교과서에 기술할 수 있도록 하는 데 기여했다.

◇1982년 교과서 파동 … “이웃국가 배려”

1970년대까지만 해도 일본 교과서 문제는 일본 국내의 문제였다. 일본 교과서 기술이 국제적인 문제가 된 것은 1982년부터였다. 1982년 6월 일본 정부가 개입하여 식민지배와 침략전쟁 관련 기술을 왜곡한 사실이 일본 언론을 통해 밝혀졌다.

한국과 중국이 거세게 비판하자 일본 정부는 근린 아시아 여러 나라와 관련된 근현대의 역사적 사실을 기술할 때는 국제이해와 국제협력 차원에서 필요한 배려를 하겠다고 약속했다. 이른바 ‘근린제국조항’으로 지금도 교과서 검정 기준이 되고 있다. 교과서 문제는 일본과 일본의 침략을 받은 국가들이 함께 풀어가야 한다는 것을 일본 정부 스스로 인정한 것이다. 일본 보수 세력이 근린제국조항의 폐기를 줄기차게 요구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미국 태평양ㆍ전쟁포로 실종국(DPAA) 산하 비영리민간단체의 발굴 관계자가 지난해 12월 DPAA 키리바시 공화국 수도 타라와의 감식소에서 최병연씨 유해를 정리하고 있다.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 제공

일본 내의 자성의 목소리와 피해 국가의 일본 교과서 기술에 대한 관심이 맞물리면서 일본 교과서의 식민지배와 침략전쟁 관련 기술은 점차 개선되었다. 교과서에 따라 기술의 차이는 있으나 ‘한국병합과 한국인 저항-식민정책과 피해-3‧1운동-관동대지진 당시 조선인 학살-난징대학살-황민화 정책 강요-강제동원’ 등이 기술된다. 1996년 검정을 통과한 모든 중학교 역사교과서에 일본군 ‘위안부’가 기술됐다.

◇아베 신조, 1997년부터 교과서 공격

그러자 일본 보수 세력은 역사교과서가 자학적이라며 공격을 재개했다. 이 공격을 주도한 것은 1997년 1월에 만들어진 ‘새로운 역사교과서를 만드는 모임’과 2월에 만들어진 ‘일본의 앞날과 역사교육을 생각하는 젊은 의원모임’이었다. 이들은 ‘일본의 역사를 침략국가로 죄악시하는 자학적 역사인식과 비굴한 사죄외교에 결코 동조할 수 없다’면서 일본군 ‘위안부’ 기술 삭제를 요구했다. 의원모임의 초대 사무국장은 현재 일본 총리인 아베 신조(安倍晋三) 의원이었다. 이들의 공격으로 식민지배와 침략전쟁 기술은 급격히 위축된다.

◇위안부 서술 1996년 7개→2011년 0개→이후 축소

식민지배 관련 기술이 어떻게 위축되고 있는지를 일본군 ‘위안부’와 조선인 강제동원을 사례로 살펴보겠다.

중학교 역사교과서의 일본군 ‘위안부’ 기술을 보면, 1996년에는 검정을 통과한 교과서 전부(7개)에 기술되었던 것이 2001년 3개, 2005년 2개, 2011년 0개가 됐다. 교과서를 공격했던 세력은 자신들의 운동이 가져온 성과라고 자평했다.

하지만 2015년 검정결과가 발표된 교과서에 다시 일본군 ‘위안부’ 기술이 등장했다. 마나비샤(学び舎)가 검정과정에서 내용이 대폭 축소되기는 했지만 ‘위안부’를 기술했다. 고노 요헤이(河野洋平) 관방장관 담화를 활용하여 군의 관여와 본인의 의사에 반하는 동원이었음을 명기한 것이다.

2015년 마나비샤 교과서에 일본군 ‘위안부’ 서술이 다시 등장했다. 하지만 검정 전 ‘위안부’ 김순덕의 그림, 공문서상 위안소 위치(왼쪽 사진) 등이 검정 통과(오른쪽) 뒤 사라졌다. '위안부' 김학순의 증언 또한 대폭 축소됐다.

이번에 검정을 통과한 교과서에는 마나비샤 외에도 산천출판(山川出版)이 ‘위안부’를 기술했다. 일본 정부와 군이 위안소 설치와 ‘위안부’ 동원을 주도했다고 명확하게 기술하지는 않았으나, ‘위안부’ 기술이 다시 늘어나는 계기가 될 수 있다는 점에서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 있다.

◇조선인 강제동원 서술, 2006년 이후 줄어

강제동원 관련 기술이 중학교 역사교과서에 처음 등장한 것은 1966년판 일본서적(日本書籍) 교과서로 “조선인도 징용되어 노동력 부족을 보충했다”고 기술됐다. 1975년판 교육출판(敎育出版) 교과서에는 “조선인과 중국인을 끌고 와서 탄광과 광산 등에서 강제로 노역시켰다”고 강제성이 기술됐다. 그리고 1981년판부터 모든 교과서에 조선인 강제동원 관련 내용이 기술됐다.

동경서적은 조선인 강제동원과는 무관한 '일본의 에너지 역사' 부분에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군함도(왼쪽 윗부분) 사진을 넣었다.

교육출판(敎育出版) 교과서는 1981년부터 1986년까지는 ‘지역에서 보는 역사의 흐름: 히타치 광산(이바라키현)-일본에 끌려온 윤씨’라는 칼럼을, 1987년부터 2005년까지는 ‘지역에서 역사를 생각하자: 조선ㆍ중국에서 강제 연행된 사람들-치쿠호 탄광(후쿠오카현)의 김씨’라는 칼럼을 게재하여 강제동원과 피해실태를 상세하게 다루었다. 현재 채택률이 가장 높은 동경서적(東京書籍) 교과서도 1997년부터 2001년까지는 ‘조선인 강제연행’ 칼럼을 게재했다.

그러나 이러한 상세한 기술은 2006년 이후 전부 사라졌다. 이번에 검정을 통과한 동경서적 교과서에는 “다수의 조선인과 중국인들이 의사에 반하여 일본에 끌려갔으며, 광산과 공장 등의 열악한 조건 하에서 노동을 강요당했습니다”라고만 기술되었다. 더 큰 문제는 이러한 사실마저 일본 정부가 부정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2개 교과서가 세계유산에 등재된 군함도(하시마 탄광) 사진을 게재했는데, 조선인 등 강제동원 문제는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일본 산천출판도 세계유산을 소개하면서 군함도(왼쪽 페이지 위에서 두 번째 사진)를 “19세기 개발이 시작된 이후 1974년까지 많은 석탄이 생산되어 일본의 산업발전을 지탱했다”고만 언급했다.

역사 교과서에 모든 역사적 사실을 담을 수는 없다. 교과서라는 제한된 틀 안에서 사실을 선택적으로 사용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과거의 사실에 대한 선택은 바로 미래에 대한 선택이라는 것이다. 우리가 일본 교과서 기술에 관심을 가져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남상구(동북아역사재단 연구위원)

공감은 비로그인 상태에서도 가능합니다

web_cdn 저작권자 © 한국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문화 최신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