삽화 신동준 기자

저도 사실 여러분과 같은 외국인이에요. 수업에서 만난 외국 학생들에게 나는 보통 이렇게 소개를 하곤 한다. 에이. 믿지 못하겠다는 표정의 학생들에게 나는 쐐기를 박는다. 한국어는 제 두 번째 언어예요. 저는 어느 나라 사람일까요? 어리둥절해하는 학생들을 보면서 나는 살짝 힌트를 흘린다. 바다를 건너왔어요. 1시간밖에 안 걸려요.

이쯤 되면, 이 글을 읽는 분들도 내가 어디서 왔는지 알아차릴 것이다. 나는 환상의 섬이라고 불리는 ‘그곳’에서 왔다. 학생들은 내 말을 실없는 농담으로 받아들이지만, 나는 정말로 내가 일종의 외국인이라고 여긴다. 아니, 더 정확히 표현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나는 식민지 출신이다. 나는 내가 나고 자란 그곳이 한국의 내부 식민지(한국인 여러분 기뻐하세요, 여러분에게도 착취해서 뽑아먹을 식민지라는 것이 있습니다. 더 충실하게 착취당하기 위해 두 번째 공항도 지을 예정이에요.)라고 생각한다.

문학평론가 김동현은 ‘그곳’을 ‘우리’ 안의 식민지라고 에둘러 표현했지만, 사실 그곳은 한 번도 제대로 ‘우리’로 대접받은 적이 없다. 그곳은 먼 과거부터 정주민의 고혈을 뽑아 본토에 없는 자원을 제공하는 식민지였고, 그것은 지금도 마찬가지다. 그곳은 한국을 위해 ‘평화의 섬’도 되어 주고, 동시에 ‘해군기지’도 제공한다. 최근 그곳이 한국인들을 위해 생산하는 특산물은 ‘힐링’과 ‘낭만’이다. 그곳은 뭐 하나 버릴 것 없는 기특한 생선 같은 곳이다.

내가 식민지 출신임을 새삼스럽게 밝히는 이유는 4월이 오고 있기 때문이다. 그곳의 4월에는 4ㆍ3, 이 두 숫자로 불리는 이름 없는 사건이 있다. 식민지에서 나고 자랐지만, 대학에 들어가기 전까지는 나는 이 숫자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전혀 알지 못했다. 할머니께 4ㆍ3에 대해 물었을 때 ‘속솜허라’(조용히 해라)라고 하신 까닭도, 할아버지가 학살당했다는 사실도 알 수 없었다. 섬 전체가 봉쇄당했고, 그 안의 모든 이들이 죽음으로 내몰렸다는 것도 몰랐다. 오늘날 관광지로 각광받는 곳 중 많은 장소가 학살터였다는 것 또한.

나의 가족과 공동체의 집단 기억이 깨끗이 소거되어 있는 것을 발견하는 것은 초현실적이다. 학살자를 선, 희생자를 악으로 여기는 이들이 있다는 것은 더 기이한 일이다. 그렇게 국가는 식민지인들을 입이 없는 존재, 기억할 권리가 없는 존재로 만들었다. 그렇게 만든 이유는 간단하다. 나와 내 공동체의 기억은 한국이라는 국민국가의 서사에 편입되어서는 안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대통령의 사과가 있었지만, 여전히 4·3은 이름을 붙여서는 안 되는 회색의 사건으로 남아 있다.

이름 붙일 수 없다는 것은 그것에 대해 침묵을 강요하는 것이며, 그곳이 여전히 식민지임을 보여 주는 증거이다. 명명이란 현실을 만들고 구성하는 실제적인 ‘행위’이며 반대로 ‘명명하지 않는 것’ 역시 똑같은 ‘행위’라는 점에서 그렇다. 예컨대 5ㆍ18을 ‘80년대 무슨 사태’라고 말하며 그 이름을 부르지 않는 것은 적극적으로 광주의 기억을 은폐하고 억압하는 행위이다. 반면 5ㆍ18을 ‘민주화운동’이라고 명명하는 것은 5ㆍ18의 순간들을 다시 현재로 소환하여 끊임없이 창궐하는 거짓들과 맞서 싸우는 행위가 된다. 요컨대 어떤 명명은 현실을 은폐하고 왜곡하지만, 또 다른 명명은 억압을 드러내어 그 아래 숨겨졌던 이야기를 들려주고, 세상을 변화시킨다.

콜센터에서 택배 노동자, 간병인, 이주민들의 삶에 이르기까지 감염병이 몰고 온 재난은 우리가 어떤 내부 식민지의 희생 위에 서 있는지, 그들의 이름과 이야기를 얼마나 억압했는지 보여 주었다. 너무나 초현실적인데 또 너무 현실적이어서 슬퍼지는 풍경이다. 그리고 또 4월이 온다. 식민지 출신이면서도 그 많은 내부 식민지의 존재를 몰랐던 나는 자꾸만 부끄러워진다.

4ㆍ3은 여전히 이름이 없다.

백승주 전남대 국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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