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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을 열며] ‘n번방’, 검은 계보를 끊어라

입력
2020.03.26 04:30
2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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텔레그램에서 불법 성착취 영상을 제작, 판매한 n번방 사건의 주범 조주빈이 25일 오전 서울 종로경찰서에서 검찰에 송치되기 위해 호송차량으로 향하고 있다. 뉴시스
텔레그램에서 불법 성착취 영상을 제작, 판매한 n번방 사건의 주범 조주빈이 25일 오전 서울 종로경찰서에서 검찰에 송치되기 위해 호송차량으로 향하고 있다. 뉴시스

‘n번방’에 대한 사회적 분노의 파장이 점점 커지고 있다. 텔레그램상에서 성착취물을 유통하는 채팅방을 총칭하는 n번방은 한마디로 디지털 세계의 성착취 범죄 조직이라 할 수 있다. n번방은 무수한 아류들로 파생되었는데 이번에 유명해진 박사방도 n번방의 파생물이다. 25일 박사방 운영자 조주빈이 종로경찰서를 나서며 포토라인에 서서 “악마의 삶을 멈춰주셔서 감사하다”고 말했다. 스스로를 악마라며 사죄하는 것 같지만 용서를 구하는 태도가 아니었다. 오히려 자신의 강력한 힘을 과시하는 표현 같았다. 무엇이 성착취물 사건 피의자에게 저런 자신감을 주는 걸까?

과거의 성착취물 사건과 다르게 n번방 사건은 관련청원 500만 이상의 청원서명으로 범국민적 관심사가 되었고, 대통령을 비롯해 관련 부처들이 신속히 대책을 발표했다. 청원에 대해 경찰청장ㆍ여가부 장관의 답변과 함께 법무부의 후속 조치가 신속하게 진행됐다. 대통령 지시대로 정부에서는 디지털 성범죄를 중범죄로 규정하고 회원들까지 신상 공개와 함께 처벌하며 특별수사팀을 만들고, 범죄단체조직죄 적용 등으로 형량을 높이고, 국제 수사 공조를 통해 끝까지 범죄자를 검거하겠다는 의지를 보였다. 이미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정부가 진지하고 신속한 대책을 마련하는 건 다행스럽다. 이번을 계기로 성착취물을 거래하는 악성 산업의 고리를 끊어 내야 한다.

그를 위해 먼저 n번방 사건의 표면화 이면에 담겨 있는 역사적인 의미를 생각해야 한다. n번방 사건은 단순히 한 사건의 폭로가 아니라 여성들의 분노가 축적된 역사적 성과라는 점이다. 디지털 문화가 확산됨과 동시에 여성과 아이들은 성착취물의 희생자가 되어야 했다. 가해자는 크게 불편하지 않았고 고통은 언제나 피해자의 몫으로 남았다. 경찰도 사법부도 사회통념도 가해자의 편을 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속적인 여성들의 분노는 연대로 발전해서 사회변화의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열정적인 언론사 기자들과 함께 n번방 사건 취재에 나선 대학생 취재팀, 당사자를 지원하는 모임 ‘리셋’의 역할이 컸다. 정부의 적극적 개입 의지는 여성들의 역사적 집단 의지에 대한 응답이라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

두 번째는 가해자에 대한 철저하고 강력한 처벌만이 이 검은 계보를 끊어낼 수 있다. n번방의 창시자 ‘갓갓’은 그전에 폐쇄된 불법 성착취물 사이트 ‘소라넷’의 계보를 잇겠다면서 등장해 8개의 채팅방을 만들어 운영했다. n번방 입장 티켓 장사를 했던 ‘와치맨’, n번방 중 8번방을 인수한 ‘켈리’, n번방 폐쇄 이후 아류로 나타난 ‘박사’ 조주빈, ‘프로젝트 n’방의 운영자들, 새 플랫폼 디스코드의 성착취 채팅방 등. 디지털 성착취물의 범죄 계보가 아직도 계승ㆍ진화 중이다. 성착취물 범죄자들은 불법인 줄 알면서도 ‘돈이 되니까 한다’ ‘잡히지 않는다’ ‘잡혀도 가볍게 처벌받는다’고 말한다. 처벌이란 이들의 상식을 뒤엎고 ‘반드시 잡혀서 중벌을 받는다’는 걸 알게 하는 일이다. n번방의 26만 가입자들도 처벌에서 예외일 수 없다.

세 번째는 성착취물 범죄에 대한 안이한 인식을 버려야 한다. 국회에서 최초의 국민 청원 입법 안건이었던 ‘n번방 방지법’ 심의는 끝내 ‘딥페이크’ 하나만 추가한 채로 허망하게 끝나버렸다. 국회 속기록을 보면 심의에 참여한 국회의원들의 발언은 정말 한심하기 짝이 없다. 성착취물 범죄를 자기만족을 위한 개인의 자유 내지, 청춘기의 그럴 수 있는 일탈 정도로 가볍게 여기면서 ‘그런 일에 무슨 법까지 만드느냐?’는 시대착오적 인식 수준을 보여 줬다.

코로나19는 바이러스가 원인이지만 n번방 사건은 디지털 문화의 인권 사각지대에서 생긴 사회적 재난이다. 디지털 민생치안으로 성착취물 바이러스를 퇴치하고 그 검은 계보를 끊어야 한다.

김효선 여성신문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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