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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5℃] 번호화된 죽음, ‘희생’으로 기억되길

입력
2020.03.26 04:30
2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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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6.5℃는 한국일보 중견 기자들이 너무 뜨겁지도 너무 차갑지도 않게, 사람의 온기로 써 내려가는 세상 이야기입니다.

코로나19 지역거점병원인 대구 중구 계명대학교 대구동산병원에서 의료진이 근무 교대를 위해 병동에서 나오고 있다. 대구=뉴시스
코로나19 지역거점병원인 대구 중구 계명대학교 대구동산병원에서 의료진이 근무 교대를 위해 병동에서 나오고 있다. 대구=뉴시스

처음엔 그러려니 했다. 감염병이 발생하면 으레 그렇듯 사망자는 필연적으로 생기기 마련이라고. 초기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진 환자 증가폭이 그리 크지 않았으니 사망자와 관련한 전망도 비교적 낙관적이었다. 지난달 19일을 기점으로 확진자가 폭증하고 첫 사망자가 나왔을 때도, 부끄럽지만 나는 무신경했다. 먼저 발생한 중국에서는 수만명이 확진되고 수천명이 사망했는데 그보다는 나을 것이라고 말이다. 매일 아침 ‘오늘은 확진자가 몇 명이나 늘었을까, 몇 분이나 돌아가셨을까’를 기계적으로 떠올리는 게 자연스러운 일과였다. 병실 부족에 입원을 기다리시다 돌아가신 분들에 대한 안타까움이 적지 않았으나, 비교적 담담하게 숫자로 그들의 사망을 전달했다. ‘첫번째 사망자, 청도대남병원, 62세 남성’, ‘두번째 사망자, 청도대남병원, 54세 여성’ 등의 방식으로. 번호화된 사망자의 인적 사항은 감정중립적이었다.

“선생님, 어제 남편이 죽었어요.”

국내 코로나19 사망자가 50명이 넘은 지난 9일, 대구 계명대 동산병원에서 의료봉사 중인 안철수 국민의당 대표가 전한 말이다. 남편을 코로나19로 떠나 보낸 이 여성 역시 확진자였고 격리 치료 중이었다. 병원이 달라 남편의 임종을 지켜보지 못했다. 남편의 사체는 아내의 부재 속에서 밀봉돼 입관되고 곧바로 화장됐을 터였다. 완치가 되지 않은 여성은 남편 장례식장에도 참석할 수 없었다. 장례식이 열렸는지는 확인하지 못했지만 열렸더라도 조문객 역시 많지 않았을 것이다.

이 소식에 사실 울컥했다. 코로나19라는 지독한 바이러스는 인간에게 생의 마지막까지도 ‘존엄’을 허락하지 않았다. 누군가의 죽음은 유족에게 허망할 수밖에 없다. 그 허망함을 누르고 마지막 가는 길을 배웅한다. 함께한 추억을 곱씹고 연을 맺을 수 있었다는 데에 감사하며 유족과 지인들은 그를 보낸다. 그러나 감염병에 따른 생의 마감은 이와는 거리가 멀다. 코로나19 사망자들은 죽음마저도 격리되기에.

질병관리본부는 지난 2월 코로나19 확진자들이 나오자 고시를 통해 사망자들의 시신에 대해 ‘화장’을, 그리고 유가족 동의 하에 ‘선(先) 화장, 후(後) 장례’를 권고했다. 권고에는 ‘사망자의 존엄과 예우를 유지하며 유족의 뜻을 존중하는 신속하고 체계적인 장례지원’라는 전제가 붙었지만, 나에겐 ‘미안하지만 이럴 수밖에 없다’고 읽혔다. 물론 이해한다. 사망까지 격리할 수 밖에 없는 데는 살아 있는 사람들을, 앞으로도 살아갈 사람들을 위해서라는 걸.

우리를 포함해 전 세계가 전대미문의 바이러스와 전쟁을 치르고 있다. ‘드라이브 스루’ 방식을 포함한 빠른 진단속도와 뛰어난 진단기술, 그로 인해 낮은 치명률은 이 초유의 전쟁에서 거둔 우리의 성과다. 살아남기 위한 싸움에서 주적 바이러스를 진압하고 있는 것만은 분명하다. 하지만 이럴수록 100명을 훌쩍 넘은 사망자(25일 0시 기준 126명)를 잊어서는 안 된다. 대부분 고령자거나 정신질환, 심장질환 등 기저질환을 가진 우리 사회의 약자들이다. 방치되거나 고립돼 있다 바이러스의 엄습에 버티지 못한 분들이 적지 않다. 이들은 죽음으로 우리 사회의 허점을 드러내줬다. 이를 메우려는 노력이 방역 성과로 연결되고 있다고 본다.

이제는 ‘몇번째 확진자(몇 년생 남성 혹은 여성, 3월 X일 확진)로 XX병원 입원치료 중 3월X일 사망하심’이라는 문자에 마음이 무겁다. 문자를 보면서 “국가의 역할이 무엇인지 다시 한번 생각”(안철수 대표)할 만큼의 깜냥은 나에겐 없다. 다만 번호로만 남는 그들의 죽음이 우리 사회를 개선하는 ‘희생’으로 기억되기를 바라본다. 그건 살아남은 사람들의 몫이다. 삼가 고인들의 명복을 빕니다.

이대혁 정책사회부 차장 selected@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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