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명의 차이나는 발품 기행] <36> 장시 ④ 메이베이고촌과 루이진
중국 공산당이 국민당 군대에 밀려 대장정에 나선 장시성 루이진에 마오쩌둥이 판 우물이 남아 있다. 시내의 홍색 유적지 모두 ‘공화국요람풍경구’다.

장시성 지안에 위치한 메이베이고촌(渼陂古村)은 2005년에 중국역사문화명촌으로 선정됐다. 2003년부터 국가문물국이 2~3년에 한 번 부정기적으로 발표한다. 사실 너무나 많다. 고촌마다 천년 세월을 담고 있으며 서로 다른 지역문화를 담고 있다. 중원문화ㆍ제노문화ㆍ삼진문화ㆍ 파촉문화ㆍ휘주문화처럼 하나의 문화권으로 묶어서 접근할 수 있다. 언어 건축 상업 종교 공연 제례 명절 전통 복장 등에서 지역마다 개성을 드러내고 있다. 인근의 지역문화와 융합되기도 했다. 장시 대부분 지역과 안후이 서남부, 후난 동부, 후베이 동남부를 묶어 강우문화(江右文化)로 구분한다. 장강 건너 오른쪽에 위치한다는 뜻으로 황제가 앉은 자리에서 본 방향이다. 강좌문화권은 삼국지에서 오나라 땅이던 ‘강동(江東)’을 지칭한다.

역사문화명촌 메이베이고촌

하나의 문화권에서 더 세부적으로 나누기도 한다. 지안은 남북으로 흐르는 감강(贛江) 중류에 위치한다. 예로부터 지안은 여릉(廬陵)이다. 메이베이고촌을 ‘여릉문화제일촌’이라 한다. 전날 늦게 고촌을 들어오느라 입장권을 사지 않았다. 매표소가 문을 열자 입장권을 샀다. 마을 안에서 나와서 갑자기 50위안을 내미니 판매원이 놀란다. 화색이 돌고 친절한 인사가 따라온다. 고촌으로 갈수록 순수하다. 비가 오락가락하지만 기분이 좋아진다.

메이베이고촌의 ‘문헌명종’ 패방

메이베이고촌은 양씨 집성촌이다. 남송이 건국한 1127년에 양사계가 가족과 함께 마을을 개척했다. 농사와 면학에 힘써 날로 번창했다. 과거를 통해 관리도 배출했다. 지안이 배출한 남송 최후의 걸출한 학자 문천상은 의관망군(衣冠望群)이라 칭찬했다. 사대부 명망가라는 뜻이다. 고촌 입구에 설치한 문헌명종(文獻名宗) 패방도 문천상이 찬양한 문구다. 명나라 중엽부터 강우 상방(商幫)이 번성했다. 양대 상방인 진상과 휘상에 버금갔다. 제법 넓은 도랑이 고촌 옆으로 흐르고 크고 작은 연못이 28개나 된다. 물류가 손쉬워 상업이 발달했다. 인문도 고루 성장한 고촌 특징을 잘 갖추고 있다.

메이베이고촌 양씨종사의 ‘한림제’ 패방.

양씨종사(梁氏宗祠)는 이주 초기에 세웠으나 훼손과 중건을 반복했다. 서태후 시대에 보수했다. 대문과 한 발짝 떨어져 한림제(翰林第) 패방이 있다. 돌기둥과 나무가 결합된 형태다. 69세에 이르러 과거에 합격한 인물을 기념했다. 평생 노력한 집념이 대단하다. 당호는 영모당(永慕堂)이다. 대문과 함께 오른쪽 왼쪽에도 문이 있다. 형인(型仁)과 강양(講讓)이다. 고건축에서 만나는 한자는 어렵다. ‘좀 쉬운 글자로 쓰지’라고 늘 생각한다. 고리타분하다고 투덜거리지만 고촌마다 흔한 현상이다. 덕분에 공부하고 나면 보람도 있다.

메이베이고촌 양씨종사의 대문(가운데)과 ‘형인’ ‘강양’ 문.

‘예기’에 나오는 공자님 말씀이다. 예기에는 형(刑)으로 나온다. ‘형인강양(型仁講讓), 시민유상(示民有常)’이다. ‘법을 어질게 집행하고 겸양을 중시해야 백성에게 떳떳하다’는 교훈이다. 소강(小康) 사회를 설명하는 가운데 나온다. 형에 흙 토(土) 받침을 하면 ‘모범’ ‘근본’으로 해석할 수 있다. 청나라 건륭제 때 학자이자 시인 심덕잠이 ‘태학석고부(太學石鼓賦)’에서 ‘진리를 찾는 자는 근본을 어질게 하고 겸양을 중히 여긴다’는 문도자형인이강양(問道者型仁而講讓)을 참고해 새긴 듯하다.

메이베이고촌 양씨종사의 물항아리.
메이베이고촌 양씨종사의 천정 기와.
메이베이고촌 양씨종사의 ‘교수’ 패방.

종사 마당에 깔린 조약돌이 촉촉하게 젖어 반질반질하다. 물항아리에 비친 기와가 마치 톱날처럼 날카롭다. 부드러운 곡선이 원근감이 사라져서 살짝 왜곡된 느낌이다. 천정을 봐도 역광 때문인지 비슷하다. 마당에는 교수(教授) 패방이 자리를 잡고 있다. 기둥마다 대련이 촘촘하게 적힌 모습도 품격이 있다. 패방 지붕이 날렵하게 뻗었다. 날카롭던 반영에 비해 감촉이 부드럽다. 수평과 수직이 서로 혼합된 장면이 강렬해 인증사진 하나 남기지 않을 수 없다.

메이베이고촌 양씨종사의 공침안.

등과(登科)로 들어가서 문원(文元)으로 나온다. 모두 ‘과거 합격’을 뜻한다. 과거에 올라 문헌을 익히라는 충고다. 안에는 제단이 있다. 공침안(孔寢安)은 ‘아주 평온한’ 장소라고 해석하면 된다. 조상의 신령이 잠들어 있으니 당연하다. 여덟 폭의 나무 병풍도 짜임새나 색감이 예사롭지 않다. 산수화 네 폭을 가운데에 덧붙여 걸었는데 원래 나무인 듯 착각이 든다.

양씨종사 측면의 ‘입칙효’와 ‘출칙제’.

종사 측면에 두 개의 문이 있다. 입칙효(入則孝)와 출칙제(出則弟)다. ‘학이시습지면 불역열호라’로 유명한 ‘논어’ 학이 편 6장에 등장한다. 부모에게 효도하고 어른을 공경하라는 말이다. 원문은 제(悌)로 쓴다. 동생 제(弟)도 공경이나 화목의 뜻이 있다. 유학자 집안은 규칙이 많다. 집에 들어와서는 효도를 하고 밖에 나가서는 공경을 받아야 한다. 나쁜 짓은 보지도 하지도 말아야 하는데 인간이 어디 그런가?

메이베이고촌 골목 풍경.
메이베이고촌 거리의 소.
메이베이고촌의 옛 거리 모습.

민가가 다닥다닥 붙었다. 겨우 한사람이 지날 정도로 좁은 골목이 많다. 불쑥 개 두 마리가 나타난다. 한 마리가 벌떡 일어나서 쳐다본다. 나쁜 짓을 하다가 걸린 표정이다. 넓은 길로 나오니 소가 꿈쩍도 하지 않는다. 숙소가 있는 고가(古街)로 돌아온다. 약 1km에 이르는 길이다. 길바닥에 깔린 조약돌이 반짝거린다. 이끼가 듬성듬성, 가끔 수북하다. 흔적만 남은 상호는 ‘굵게’ 쓴 듯 진하다. 흐린 날씨라 낮인데도 홍등이 선명하다. 거리를 두 번 왕복하며 걸었다. 오토바이 타고 지나가는 아저씨, 밖에 나온 할머니까지 오래 기억하고 싶다.

중국 공산당 유적인 홍색고도 루이진 역 광장.

메이베이고촌에서 버스를 타고 지안 시내로 나왔다. 다시 일반 열차를 타고 4시간 걸려 루이진(瑞金)에 도착했다. 1시간30분 걸리는 고속철 기차표를 구하지 못했다. 루이진은 장시 동남부에 위치한 공화국 요람이자 홍색고도(紅色故都)다. 중화소비에트공화국 중앙정부가 있었다. 루이진이 수도였다. 소비에트는 대표자 회의를 뜻하는 러시아어다. 러시아혁명 시기 권력기관이다. 중국어로 쑤웨이아이(蘇維埃)로 쓴다. 코민테른(Communist International 약칭)의 지도를 받고 있던 중국공산당은 소련공산당과 밀접한 관계였다. 1931년 11월 중화소비에트 제1차 전국대표대회를 열어 국가기관을 선포했다. 마오쩌둥 저우언라이 주더 등 63명으로 중앙집행위원회를 꾸렸다. 마오쩌둥이 주석이었다.

루이진의 공화국요람풍경구 안내판.

공산당사는 ‘건당(建黨) 상하이, 건군(建軍) 난창, 건정(建政) 루이진, 건국(建國) 베이징’이라 적고 있다. 시내에 있는 홍색 유적지를 모두 ‘공화국요람풍경구’로 묶었다. 마오쩌둥은 쑤이다(蘇一大, 1차 전국대표대회)가 열린 예핑에 거주했다. 1933년 4월에 안전한 사저우바로 이전했다. 초등학교 교과서에도 등장하는 홍정(紅井)이 있다. 우물이 교과서에 실리게 된 배경이 궁금하다.

루이진 홍정에 있는 초등학교 교과서 석판.

우물 앞에 돌로 만든 초등학교 어문 교과서가 있다. 우물 파는 마오쩌둥 모습도 실렸다. 그해 9월의 어느 아침이다. 바쁜 와중에 비로소 여유가 생긴 마오쩌둥은 식수난에 시달리던 주민을 위해 삽과 호미를 들고 수원을 찾아 나섰다. “주석이 우물을 파다니…”, 마을에 소문이 퍼졌다. 쉽지 않은 일을 한다고 모두 안타깝게 바라봤다. 수없이 수원을 찾아 다녔다. 드디어 지름 85cm, 깊이 5m인 우물이 탄생했다. 지도자가 솔선수범해 난제를 해결했으니 칭찬이 자자했다. 공산당이 선물한 우물, 홍정으로 불리게 됐다.

루이진의 홍정과 비문.

국민당이 훼손했고 건국 후 주민이 보수했다. ‘물 마실 때 우물 판 사람을 잊지 말자. 늘 마오 주석을 그리워한다(吃水不忘挖井人, 時刻想念毛主席)’는 비문도 세웠다. 주석에 대한 존경, ‘샘물’ 같은 미담이 교과서에 실렸다. 세월이 흘러 일부 교과서에서 누락됐다. 2003년 당시 중앙정치국 상무위원 리창춘이 루이진에 와서 ‘홍정 수업을 끝낼 수 없다’고 지적했다. 그러자 교과서가 복원됐다. ‘홍정수여!, 달고도 맑구나!’로 시작해 비문의 문구로 끝나는 ‘홍정수’ 노래도 유행했다. 샘물이 맑다. 두레박으로 길어서 마신다. 대우치수(大禹治水) 이후 물은 곧 복이자 돈이라는 관념을 지닌 중국이다. 어찌 교과서 수업에 빠질 수 있으랴.

루이진의 홍정 마오쩌둥 구거.
마오쩌둥 구거의 허쯔전 침실.

홍정 부근에 마오쩌둥 구거(舊居)가 있다. 대문 안쪽으로 마당도 넓다. 디귿 자 가옥이다. 안으로 들어서면 천정이 있고 마오쩌둥이 연설을 하고 있다. 사무실이자 침실로 사용하는 방마다 거주자 이름이 적혀 있다. 별도로 마오쩌둥 부인 허쯔전의 방도 있다. 국민당이 포위망을 좁혀오자 1934년 7월에 부근 산으로 다시 이주한다.

루이진 홍정의 최고법원 마당에 법원 주석 허수헝 미담을 형상화한 조각이 세워져 있다.

중앙정부 기관도 곳곳에 보인다. 최고법원 대문이 열렸다. 마당에 법원 주석 허수헝이 주민을 화해시키는 조각상이 있다. 마오씨와 양씨 두 집안은 관개 문제로 이전투구였다. 마오씨 촌민이 물을 막자 양씨가 법원에 고소를 제기했다. 허수헝은 현장을 방문해 끈질기게 중재했다. 오랜 갈등을 풀고 화해에 이르렀다. ‘방패와 창을 옥과 비단으로 바꿨다’는 화간과위옥백(化干戈爲玉帛) 고사성어를 인용해 칭찬했다. 한나라 회남왕 유안이 편찬한 ‘회남자’에 나오는 우왕의 고사다. 마오쩌둥과 동향으로 창당 멤버인 허수헝은 1935년 2월 24일 전투 중 사망했다.

홍정 정부기관 벽화와 ‘자기동래’ 편액.
홍정 정부기관 내부 모습.

국민경제부ㆍ재정부ㆍ산림수리국ㆍ감찰부ㆍ심계위ㆍ내무부ㆍ양식부ㆍ교통부ㆍ토지부ㆍ노동부ㆍ중앙세무국ㆍ국가은행ㆍ사법부 등 모두 유적지다. 담장은 황토색이다. 부서를 들락날락하며 흔적을 더듬어 본다. 혁명정부의 활동을 보여주는 벽화는 사실적이다. 지붕 대문은 날렵하다. 자기동래(紫氣東來) 편액이 보인다. 함곡관 관리 윤희가 ‘동쪽으로부터 불어오는 상서로운 기운을 보고 성인이 곧 오리라’고 했던 고사다. 노자가 왔다. 노자, 예수, 부처는 고난의 구세주를 상징한다. 중화소비에트 혁명가 집단에게 마르크스와 레닌은 구세주였을까? 대부분 내부는 비슷하다. 천정으로 햇볕이 들어오고 모퉁이마다 사무실 겸 침실이다. 회의실 공간이 있고 레닌과 마르크스가 붙어 있다.

루이진의 얼쑤다 정문.

홍정에서 시내버스 타고 10분이면 얼쑤다(二蘇大)에 도착한다. 1934년 1월 중화소비에트 제2차 전국대표대회가 열린 장소다. 예핑에 있는 사당에서 열린 1차 대회보다 규모가 늘었다. 700여명이 참가하는 대회였다. 방청객도 1,500명에 이르렀다. 대강당을 건설했다. 전체 설계는 정보 작전에 탁월했던 첸좡페이(錢壯飛)가 맡았다. 입구는 홍군 팔각모 형상으로 만들어졌으며 중국공농홍군의 상징인 붉은 별, 망치와 낫이 그려져 있다.

루이진의 얼쑤다 강당 문.
루이진의 얼쑤다 강당 무대.

강당 문은 모두 17군데다. 많은 인원이 한꺼번에 입구로 들어갈 수 있다. 보름 동안이나 개최된 회의장에 들어가고 나오는 일이 수월했다. 무대에 격앙된 어조로 보고하는 마오쩌둥이 보인다. 1층과 2층 어디서라도 시선은 무대 쪽으로 향하도록 배치됐다. 마이크가 없어도 모두 소리가 잘 들리도록 설계했다. 2월 1일 회의가 폐막됐다. 그리고 8개월 후 장제스 국민당 군대가 포위해오자 부득이 루이진을 떠나게 된다. ‘2만5천리’ 대장정, 100년 같은 1년이 시작된다.

최종명 중국문화여행 작가 pine@youyu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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