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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벨트를 가다] 한 잔의 커피, 위험하고 힘겨운 노동의 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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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벨트를 가다] 한 잔의 커피, 위험하고 힘겨운 노동의 대가

입력
2020.03.25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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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5회> 과테말라 국경 산악지역에서 만난 사람들 

과테말라 오지의 커피산지를 찾을 때는 신변을 보호하기 위해 권총을 휴대해야 한다. 허리춤에서 잠시 내려놓은 권총 옆에 커피 체리를 놓고 사진을 찍었다. 때로 커피와 위험은 공존한다. 최상기씨 제공
과테말라 오지의 커피산지를 찾을 때는 신변을 보호하기 위해 권총을 휴대해야 한다. 허리춤에서 잠시 내려놓은 권총 옆에 커피 체리를 놓고 사진을 찍었다. 때로 커피와 위험은 공존한다. 최상기씨 제공

그날 밤은 쉽게 잠을 이룰 수 없었다. 며칠 동안의 무리한 일정으로 매우 피곤한 상태였지만, 숙면을 취하기 어려웠다. 불면의 원인은 흔들림 때문이었다. 처음에는 꿈인가 싶었는데 또렷이 의식을 차린 후에도 여러 차례 진동은 분명하게 느껴졌다. 이후 먼 동이 틀 무렵까지 이 흔들림이 푸에고 화산의 폭발로 인한 것인지, 대지진에 의한 것인지 두려움에 휩싸인 채 비몽사몽 밤새 뒤척였다.

다음날 아침 숙소를 찾아온 과테말라 친구들에게 간밤의 흔들림에 대해 물었다. 현지 친구들은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다는 듯 어깨를 으쓱하며 서로의 얼굴을 쳐다봤다. 침실에 있던 펜던트 조명까지 흔들리는 것을 봤다고 하자, 그제서야 휴대폰으로 뉴스를 검색해본다. 그리고 간 밤 서쪽 해안가에서 진도 5의 지진이 있었음을 확인해주었다. 이들은 과테말라 사람들에게 그 정도의 지진은 놀랄 일도 아니라고 웃음 지었다. 불(火)과 화산의 나라에 온 것이 새삼 느껴졌다.

간밤의 불면으로 더욱 노곤해진 몸을 이끌고 과테말라 남쪽 엘살바도르와의 국경에 인접한 깊은 산악 지역으로 향했다. 과테말라에서 커피가 자라는 곳이 오지 아닌 곳이 별로 없지만, 이 날 찾은 농장은 가파른 산길을 한참이나 구비구비 돌고 돈 다음 도착할 만큼 깊은 산속에 위치해 있었다.

농장에 거의 다다를 즈음, 길거리에서 크고 작은 봇짐을 짊어진 일행과 마주쳤다. 그들은 가던 걸음을 멈추고 손을 들어 우리의 차를 세웠다. 이들이 말로만 듣던 산적들일까 생각했지만, 일행 중에는 여자와 노인도 있어서 잠깐의 두려움은 곧 사라졌다. 뭔가 애걸하는 듯한 표정으로 손을 모으는 그들에게 과테말라 친구들은 차에 있던 생수 몇 병을 내주고는 다시 차를 몰았다.

카라반. 정치, 경제적인 어려움을 피해 미국과 멕시코의 국경을 향해 떠나는 엘살바도르의 난민들이었다. 온두라스, 과테말라, 엘살바도르 등 중미 3국의 가난한 사람들을 난민으로 내몰고 있는 주범은 빈곤이다. 먹고 사는 기본적인 생존의 문제가 지역사회에서는 좀처럼 해결되지 않는 것이다. 마약 조직과 갱단으로 인한 치안의 불안도 이들을 국경 밖으로 내모는 주 원인이다. 특히 오랜 기간 형성되어온 마약 카르텔과 갱단들은 중미 국가들의 치안을 위협하는 가장 심각한 문제다.

과거에는 안데스 산맥에 인접한 남미의 콜롬비아, 페루, 볼리비아에서 주로 코카인이 생산되고 과테말라는 미국으로 들어가는 육상 루트로 활용됐다. 하지만 최근에는 과테말라의 동쪽 산악지역을 중심으로도 많은 양의 코카인이 재배되면서 이 나라의 치안을 불안하게 만들고 있다. 마약 조직이 주로 깊은 산속에 숨어들면서 주변 커피 농장에서 일하는 인부들이 조직에 휩쓸려 들어가기도 한다.

과테말라 친구들은 최근 국제 커피 시세가 떨어지면서 일부 커피 소농들이 마약조직의 유혹과 협박 속에 커피나무 대신 헤로인과 코카인의 원료인 양귀비나 코카 나무를 심기도 한다는 얘기를 전했다. 이에 더해 최근 과테말라 정부의 대대적인 마약 소탕작전으로 집과 농토를 버리고 카라반의 길을 떠나는 이들도 적지 않다고 했다. 대낮임에도 어두컴컴한 깊은 산 속에서 이런 얘기를 듣고 있으니, 문득 카라반이 아닌 무장한 갱단들이 길을 막고 나타나지는 않을까 두려움이 들었다.

조수석에 앉은 과테말라 친구가 허리춤에서 권총 한 자루를 꺼내 보여줬다. 오지의 커피 농장을 찾을 때는 신변을 보호하기 위해 실탄을 장전한 총은 항상 휴대하고 다녀야 한다고 했다. 산에서 강도를 만나 돈과 휴대폰을 빼앗긴 적은 있었지만, 다행히 총을 사용한 적은 없었다고 한다. 과테말라의 산악지역에서 총은 몸에 지녀야 할 물건이기는 하나, 어디까지나 최후의 방어수단일 뿐 여간 해서는 총을 사용하지는 않는다.

커피 산지를 다녀보면 커피와 위험은 불가분의 관계임을 느끼게 된다. 아프리카 우간다의 게릴라 반군들이나, 과테말라의 마약 카르텔, 에티오피아의 극단적인 빈곤과 예멘의 오랜 내전들은 모두 커피 농장 주변에 머물러있는 위험들이다. 우리가 마시는 한 잔의 커피는 커피 농가들의 생명을 담보로 한 위험하고 힘겨운 노동의 대가일 지 모른다. 그래서 여러 나라의 커피 산지들을 다녀본 사람들에게 커피는 단순히 음료 이상의 남다른 의미로 느껴지게 된다.

부엽토와 썩은 과일, 당밀 등을 버무려 지렁이 밥을 만들고 있다. 이를 커다란 나무상자에 넣어주면 지렁이가 분변토를 만들어내고 이는 커피나무에 좋은 유기농 비료가 된다. 최상기씨 제공
부엽토와 썩은 과일, 당밀 등을 버무려 지렁이 밥을 만들고 있다. 이를 커다란 나무상자에 넣어주면 지렁이가 분변토를 만들어내고 이는 커피나무에 좋은 유기농 비료가 된다. 최상기씨 제공

농장에 들어가 젊은 농장주의 안내를 받았다. 경사면이 60도쯤은 돼 보이는 가파른 산등성이를 따라 커피나무가 줄지어 서 있었다. 예전에 직각으로 깎아지른 절벽의 좁은 틈새로 커피나무들이 심겨진 예멘 농장의 사진을 본 적이 있는데, 이 농장의 사면은 지금껏 본 것 중 예맨 다음으로 가팔랐다. 산비탈에는 아슬아슬하게 붙어 선 채 일을 하는 작업자들이 보였다. 커피 나무 아래 비료를 부어 주기 위해 땅을 움푹하게 만드는 작업에 한창이었다. 급경사의 땅에서 액체비료가 다른 곳으로 흘러내리지 않게 하기 위한 선행 작업이다. 경사가 워낙 가팔라 서있기조차 힘든 곳에서 이들은 위태롭게 일을 하고 있었다.

놀라운 것은 일을 하는 부모와 함께 있는 아이들이었다. 어른들도 서 있기 힘든 가파른 경사지에 어린 아이들이 앉아있었다. 이곳뿐만 아니라, 여러 과테말라의 커피 농장에서는 부모를 따라 나온 아이들을 자주 볼 수 있다. 어린 아이들만 집안에 둘 수 없어서 일터까지 데리고 온 듯 했다. 일과 육아를 병행하는 어려움은 커피 농장에서 일하는 노역자들도 마찬가지인가 보다. 다만, 보기에도 아슬아슬한 위험 속에 아이들이 노출되어 있다는 점에 마음이 쓰였다.

아버지로부터 농사일을 배우는 젊은 농장주는 부친의 영농 방식에 대한 불만이 가득했다. 화학 비료를 사용하면 쉽게 재배할 수 있는 일을 굳이 유기농 비료를 만들어 뿌리느라 원가는 비싸고, 작업 효율은 떨어진다는 것이었다. 게이샤나 파카마라 등 비교적 고가의 커피에 유기농 비료를 쓰는 것까지는 이해할 수 있어도 모든 커피나무에 이를 뿌리는 것은 난센스라는 불만이다. 지난해 커피 나무 아래에 액비를 붓다가 산비탈 아래로 굴러 떨어져 다리를 다친 일도 있었다고 했다.

아마도 이 젊은 농부의 부친은 단순히 경제적 이윤의 차원을 떠나, 생산지 주변의 재배 환경이나, 지력의 보존을 감안했을 것이다. 유기농 비료를 사용했다고 해서 좀 더 비싼 가격으로 커피를 내다 팔 수 있는 건 아니다. 하지만, 자식과 먼 후세대까지 농장과 농사일을 물려주기 위해서는 어렵게 개간한 산비탈을 비옥하고 건강한 농토로 만드는 것이 중요한 과제임을 알고, 비록 그런 일들이 비용이 더 들어가고 위험하더라도 꿋꿋이 실천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후들후들 떨리는 다리로 산비탈을 돌아서 나오니, 낡은 창고 앞에서 몇몇 작업자들이 검은 부엽토를 뒤섞고 있었다. 롬브리 콤포스트(Lombri-compost). 과테말라 유기농 커피를 얘기할 때 가장 많이 언급되는 말이다. 우리말로 지렁이 퇴비 정도로 해 두자. 지렁이가 배설한 분변토를 유기농 비료로 사용하는 것이다. 지렁이는 하루 동안 자기 몸무게의 절반에 해당하는 무게의 음식을 먹는다. 특히 지렁이는 달콤한 음식을 좋아해서 과일이나 당밀을 넣어준다. 소화해서 배설하는 데까지 걸리는 시간은 평균 16시간 정도. 먹은 양의 20%만 소화하고 나머지는 몸 밖으로 배출하는데 체내에서 각종 효소, 암모니아 등과 섞이며 분변토를 생성한다.

농장주는 창고 앞에 목관처럼 나란히 놓여있는 길다란 나무 상자들을 열어 보여줬다. 얼핏 보니 검은 흙처럼 보인다. 몸을 구부려 지렁이를 찾고 있는데 농장주가 부삽으로 흙을 뒤적여 보여준다. 흙 반, 지렁이 반이다. 롬브리 콤포스트의 지렁이는 비교적 가늘고, 몸 길이도 짧은 편이었다. 수분 증발을 막고 빛을 차단하기 위해 상자 지붕을 잘 덮어줘야 한다. 하지만 완전히 덮어버리면 지렁이가 숨을 쉬기 힘들고, 발효될 때 발생하는 가스가 배출되지 않아 상자 지붕을 느슨하게 놓고, 그 밑에는 그물망을 덮어뒀다. 소의 분뇨와 당밀, 썩은 열매, 톱밥 등을 부엽토와 함께 섞어 지렁이 상자 안에 넣어준다. 지렁이 밥은 부엽토로 잘 덮어주지 않으면 벌레가 생기거나 악취가 난다. 상자 내부 온도는 13~25도 사이가 적당하다.

수용성 영양소를 함유한 지렁이 퇴비는 영양이 풍부한 유기 비료기 때문에 커피나무가 잘 흡수할 수 있다. 특히 지렁이는 미네랄 성분을 매우 작은 입자로 공급하는데 이는 커피나무가 미네랄 성분을 쉽게 흡수하는데 도움을 준다. 유기 비료를 만드는 작업을 직접 보고 있자니 젊은 농장주가 왜 부친의 지침에 불만을 갖고 있는지 이해가 됐다. 유기농 재배를 고수하기 위해 농장 사람들이 감수해야 하는 일들은 손이 많이 갈 뿐 아니라 위험한 작업들이었기 때문이다. 부자 중에 한쪽 편을 들어 얘기하기가 애매해 그저 묵묵히 듣기만 했다. 다만, 우리가 쉽게 생각하는 친환경 재배가 생산지에서는 얼마나 힘들고 위험한 일인지를 소비자들도 알아야 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숙소로 돌아오는 길, 저녁 어스름 속에서 그날 목격한 장면들이 떠올랐다. 카라반의 절박한 눈빛과 과테말라 친구가 꺼내 보여준 권총, 가파른 산기슭에서 위태롭게 서있던 농민들과 아이들까지. 우리가 비취색의 얕고 투명한 바닷가에서 심해의 깊이와 어둠을 상상하기 어렵듯, 우리가 마시는 커피 한 잔에 녹아 있는 생산지의 숱한 위험과 고된 노동을 오롯이 이해할 수는 없다. 그렇다 하더라도 소비자들이 커피 산지의 위험과 고통의 대가를 모른 채 편하게 즐기고 있음은 알려야겠다는 일종의 사명감이 들었다. 그것이 지구 반대편에 있는 우리의 일상과 동떨어진 대수롭지 않은 관심사라 할지라도 말이다.

* [커피벨트를 가다] 과테말라 편은 이번 회를 마지막으로 막을 내립니다. 다음 회부터 아프리카 케냐의 커피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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