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스템 미비에 유료화 꼼수… ‘파나마 페이퍼스’후 자정 노력 효과 못 봐
권력기관의 부정ㆍ부패를 까발린 ‘폭로 스캔들’하면 2010년 이라크ㆍ아프가니스탄 전쟁과 관련해 미국 국무부의 기밀 보고서를 공개한 위키리크스를 떠올리기 쉽다. 하지만 연루 규모나 액수 면에서 위키리크스와는 비교도 안되는 스캔들이 있다. 2016년 4월 90여개국, 수백명이 연루된 세계 지도자들의 해외 탈세 비리를 폭로한 ‘파나마 페이퍼스’가 그것이다. 유럽연합(EU)은 보고서가 공개되자 가장 먼저, 그리고 적극적으로 자정 노력을 약속했다. 4년이 흐른 지금 EU의 약속은 지켜졌을까.
22일(현지시간) 영국 일간 가디언 보도를 보면 EU의 다짐은 ‘공염불’에 그친 것 같다. 신문은 “EU 집행위원회가 파나마 페이퍼스에 응답하는 차원에서 올해 1월 10일까지 각국 모든 기업의 실소유주를 공개하는 공공 등록시스템을 마련토록 했으나 참여한 나라는 6개 회원국(영국 포함)에 불과했다”고 전했다. 이 사실은 반(反)부패 감시 비정부기구(NGO) ‘글로벌 위트니스’가 EU 27개 회원국을 전수 조사한 결과 드러났다.
파나마 페이퍼스는 국제탐사보도언론인협회(ICIJ)가 파나마 최대 로펌 모색 폰세카가 보유한 1,150만건의 내부문서를 분석한 결과물이다. 파나마를 비롯, 홍콩 버진아일랜드 등 조세 회피처 21곳 및 역외회사 21만4,000여개와 세계 각국 부유층들이 합심해 어떻게 세무조사를 피해 돈을 숨겼는지, 어둠의 연결고리를 낱낱이 파헤쳤다. 당시 데이비드 캐머런 영국 총리,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 마우리시오 마크리 아르헨티나 대통령 등이 탈세를 저지르거나 유령회사를 설립한 명단에 등장했고, 뇌물수수 혐의로 수감 중이던 나와즈 샤리프 전 파키스탄 총리는 2018년 7년형을 추가로 선고 받기도 했다.
부패의 민낯이 드러나자 EU는 2018년 5월 올 1월까지 회원국들의 관할구역에 등록된 기업의 실소유주를 공개하도록 의무화했다. 하지만 영국 불가리아 덴마크 라트비아 룩셈부르크 슬로베니아 등 6개 국가만 EU의 명령을 따랐다. 영국을 빼면 부정 행위가 많은 서구권 국가들은 한 곳도 참여하지 않았다. 심지어 17개국(63%)은 소유주 공개는커녕 아예 등록시스템조차 마련하지 않은 것으로 나타났다.
공공 등록체계를 구비한 나라들도 꼼수를 부리긴 마찬가지다. 네덜란드와 폴란드에서 관련 자료를 보려면 세금등록번호 등을 제공해야 하고, 벨기에 독일 아일랜드는 시스템을 유료화시켜 대중의 접근 장벽을 높여 놨다. 가디언은 “이들 나라는 공개 대상도 자국 시민권자로 한정해 외부 노출을 극도로 꺼리고 있다”고 비판했다.
정부가 ‘나몰라라’하는 사이 탈세 연루 혐의를 받는 고위 공직자들은 무대 뒤에 숨어 책임을 계속 회피하고 있다. 호세 마누엘 소리아 전 스페인 산업장관은 파나마 등에 유령회사를 설립한 의혹이 공개되자마자 사임한 뒤 지금껏 침묵으로 일관하는 중이다. 가장 최근엔 몰타에서 파나마 페이퍼스 관련자들을 추적해 온 다프네 카루아나 갈리치아 기자가 2017년 10월 암살이 의심되는 차량 폭발로 숨진 적도 있다. 갈라치아는 그간 조지프 무스카트 전 몰타 총리의 부인이 한 유령회사의 소유주라고 주장해 왔다. 그러자 무스카트 역시 올 1월 도의적 책임을 지고 자리에서 물러났을 뿐, 진실은 여전히 미궁에 빠져 있다.
유럽에서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이 급격히 확산하면서 부패 구조를 개선하기 위한 관련국들의 정책적 노력은 훨씬 후순위로 밀릴 가능성이 높다. 글로벌 위트니스에서 일하는 활동가 티나 맥리나릭은 “코로나19와의 전쟁이 EU의 최우선 과제지만 2년의 유예기간이 있었음에도 많은 나라들이 발을 뺐다”면서 “반부패 운동의 핵심은 투명성”이라고 강조했다.
손성원 기자 sohnsw@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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