벨기에 애니메이션 ‘프린스 코기’는 최근 한달 동안 국내 주문형비디오(VOD) 매출이 2억원을 넘겼다.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산으로 실내 활동이 늘어난 덕을 봤다. 지난해 12월 개봉한 이 영화의 극장 관객은 20만3,755명이었다. 극장 관객 20만명 정도인 애니메이션이 VOD로 2억원을 벌려면 예전에는 2년 넘게 걸렸다. 코로나19가 예기치 않은 VOD 호황을 낳은 셈이다.
코로나19로 영화 산업 생태계가 바뀌고 있다. 국내에선 신작 영화가 잇달아 개봉을 연기한 가운데 할리우드는 촬영 현장이 아예 멈춰 섰고, 극장마저 문을 닫았다. 산업 환경이 급격히 변하면서 이전과는 다른 사업 형태가 등장하고 있다. 코로나19가 달갑지 않은 ‘뉴 노멀’을 구축하는 셈이다.
국내 극장가는 일부 공포영화와 예술영화를 제외하면 신작이 사실상 사라져 재개봉작들이 스크린을 채우고 있다. 22일 영화관입장권 통합전산망에 따르면 21일 일일 흥행 순위 20위 안에는 ‘스타 이즈 본’(2018)과 ‘어바웃 타임’(2013), ‘분노의 질주: 더 익스트림’(2017) 등 재개봉작 10편이 들었다. 극장 관객 수는 바닥이다. 영화진흥위원회가 최근 발표한 2월 영화산업 결산 보고서에 따르면 지난달 전체 관객 수는 지난해 같은 기간(2,227만명)보다 66.9% 감소한 737만명을 기록했다. 2005년 이후 2월 관객 수로는 최저치였다. 코로나19 공포심에 관객들이 발길을 끊은 데다 신작 개봉까지 사라지면서 관객을 불러모을 동력마저 없는 상황이다.
국내 주요 투자배급사는 상반기 개봉 예정 영화조차 아직 못 밝히고 있다. 3월 초 개봉하려다 연기된 한국 영화 ‘결백’ ‘사냥꾼의 시간’ ‘침입자’는 4월 개봉 여부도 불투명하다. 1년 중 가장 큰 대목인 여름 시장을 겨냥한 ‘모가디슈’(감독 류승완)와 ‘반도’(감독 연상호), ‘영웅’(감독 윤제균) 등 대작들만 개봉을 예정대로 추진 중이다. 영화계에선 “올해 극장에선 여름 텐트폴(대작) 영화만 볼 수 있는 거냐”는 씁쓸한 우스개가 나온다.
극장가는 냉각된 반면 부가판권시장은 뜨겁다. 지난 2월 열린 베를린국제영화제 기간 중엔 극장보다 VOD시장에서 성공 가능성이 큰 영화들을 사려는 경쟁이 치열했다. 영화 수입배급업체인 이수C&E의 박민정 대표는 “영화 ‘컨테이젼’이 한국 VOD 시장에서 잘 됐다고 하는데 부가판권 판매 가능한 영화가 있으니 검토해보라는 이메일을 요즘 해외로부터 자주 받는다”고 말했다.
미국도 예외는 아니다. 엄격하기로 유명한 홀드백(Hold Backㆍ영화 수익을 극대화하기 위해 극장과 VOD, TV 방영 등의 시기를 정해 놓는 것)이 급격히 무너지고 있다. 빈 디젤 주연의 SF 액션 영화 ‘블러드샷’은 지난 13일 미국에서 개봉했지만 24일에 VOD로 출시될 예정이다. 벤 애플렉의 신작 ‘더 웨이 백’(6일 미국 개봉)도 24일부터 VOD로 볼 수 있다.
그간 미국 주요 영화사들은 극장 상영 후 90일을 VOD 홀드백 기간으로 둬 왔다. 월트 디즈니 컴퍼니는 ‘겨울왕국2’를 예정보다 3개월 앞당겨 동영상스트리밍서비스(OTT)인 디즈니 플러스에 지난 15일부터 내보내고 있다. 밥 체이펙 디즈니 최고경영자(CEO)는 “인내와 가족의 중요성을 주제로 한 ‘겨울왕국2’가 이 시기에 놀랍도록 적절하다”며 ‘겨울왕국2’의 디즈니 플러스 공개 시기를 앞당긴 이유를 밝혔다.
코로나19가 마블만의 독특한 영상 세계인 ‘마블시네마틱유니버스(MCU)’까지 무너뜨릴 수 있다는 전망이 나오기도 한다. 미국 연예 전문 매체 버라이어티는 지난 17일 코로나19가 MCU까지 위협할 수 있다고 보도했다. 4월 예정이던 ‘블랙 위도우’ 개봉 시기가 연기되고, ‘샹치 앤 더 레전드 오브 더 텐 링스’와 디즈니 플러스 드라마 ‘팰콘 앤 윈터 솔저’ ‘완다비전’ ‘로키’ 제작이 중단되면서 작품들끼리 이야기가 서로 밀접하게 연관된 MCU가 흔들릴 수 있다는 것이다. MCU는 ‘어벤져스: 엔드게임’(2019)을 마지막으로 새로운 캐릭터들이 중심이 되는 ‘4단계’로 접어드는 참이었다.
무엇보다 할리우드의 실업 공포가 심각하다. 영국 일간 가디언은 미국 연예산업노조 IATSE(조합원 15만명) 발표를 인용해 할리우드에서 영화와 드라마 등의 제작 중단으로 이미 12만명이 일자리를 잃었다고 19일 보도했다. 미국 LA타임스는 “영화산업 종사자 대부분이 일용직 노동자”라며 “이미 재정적으로 불안정한 사람들을 더욱더 위태롭게 만들 것”이라고 우려했다.
라제기 영화전문기자 wenders@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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