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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 아닌 가족, 서로를 돌보는 ‘사람’이 복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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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 아닌 가족, 서로를 돌보는 ‘사람’이 복지다

입력
2020.03.20 04:30
1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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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드라마 ‘이웃집 가족은 푸르게 보인다’는 난임으로 고생하는 부부, 연인을 조카라 속이고 사는 동성 커플 등 네 가족의 이야기를 통해 다양한 형태의 가족을 제시한다. 후지TV홈페이지 캡처
일본 드라마 ‘이웃집 가족은 푸르게 보인다’는 난임으로 고생하는 부부, 연인을 조카라 속이고 사는 동성 커플 등 네 가족의 이야기를 통해 다양한 형태의 가족을 제시한다. 후지TV홈페이지 캡처

지난해 김하나, 황선우 작가가 쓴 책 ‘여자 둘이 살고 있습니다’는 제목 그대로, 두 여자가 한집에서 함께 사는 이야기를 담았다. 두 사람은 자매나 모녀도 아니고 먼 친척 사이도 아니다.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았고, 법적으로 공인된 관계도 아니지만, 이들은 서로를 ‘가족’이라 부른다. 아파트를 공동명의로 마련했다. 대출금도 함께 갚아나간다. 아플 때는 살뜰히 돌봐준다. 일상의 기쁨과 슬픔도 함께 나눈다. 이름하여 ‘동반자 관계’. 결혼, 비혼, 독거가 아니어도 얼마든지 가족으로 살 수 있음을 보여줬다.

그러나 대한민국 법과 제도 안에서 두 사람의 관계는 그저 동거인일 뿐이다. 이런 ‘법 밖의 가족’은 못하는 게 많다. 출산하거나 아팠을 때 쓸 수 있는 출산 휴가, 돌봄 휴가는 두 사람에게 주어지지 않는다. 입원, 수술 등 병원에서 급한 결정을 할 때도 보호자 동의서에 사인을 할 자격이 없다. 정부가 지원하는 주택 대출, 청약, 건강보험, 세금 혜택에서도 가족 관계가 아니니 이 두 사람은 배제된다. 하다 못해 가족끼리 가능한 휴대폰 할인, 항공사 마일리지 공유도 언감생심이다.

게티이미지뱅크
게티이미지뱅크

‘외롭지 않을 권리’의 저자인 황두영 작가는 이처럼 법 밖의 가족들을 지켜줄 보루로 ‘생활동반자법’을 만들자고 제안한다. 저자는 여성가족부 장관을 지낸 진선미 의원의 보좌관으로 국내 최초로 ‘생활동반자법’이란 명칭을 만들고, 입법 내용을 준비해온 전문가다. 책은 생활동반자법이 왜 지금 한국 사회에 필요한지 구체적으로 어떻게 작동할 수 있는지 차근차근 풀어낸다.

생활동반자법은 2014년 처음 정치권에서 논의 됐으나, 동성혼을 허용하는 전초단계라 주장하는 보수정당과 기독교계의 반발에 부딪혀 발의조차 하지 못했다. 그러니 이 책은 세상에 처음 내놓는 ‘생활동반자법안 발의서’인 셈이다.

생활동반자법 개념은 간단하다. 반드시 혈연 또는 혼인으로 묶이지 않아도 나와 함께 사는 사람을 생활동반자 관계로 국가에 등록하면, 함께 살아가는 데 필요한 세제 및 사회복지혜택 등을 보장해주는 것이다. 둘 사이의 분쟁 발생 시 합리적으로 해결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내용도 담고 있다. 결혼 관계가 아닌 파트너와의 법적 관계를 보장해주는 프랑스의 ‘공동생활약정(팍스ㆍPACS)’을 참고했다.

한국 사회에서 정상가족은 이미 무너지고 있다. 혈연과 혼인으로 맺어진 ‘가족’은 백화점 1층에 자리한 명품관 같다는 게 저자의 진단이다. 가장 잘 보이고, 발 닿기 쉬운 곳에 있고, 가장 좋은 것이라 하지만 좀처럼 들어갈 수 없는 곳. 사랑, 양육, 노동력 재생산, 교육, 부양, 돌봄을 다 떠맡아야 하는 가족을 만들기 위한 비용은 너무 비싸다. 그 부담을 감내하느니 가족이 없는 사랑을 택하는 게 현실이다. 우리나라 전체 인구 중 1인 가구 수는 이미 부부와 자녀로 구성된 가구를 넘어섰다. 한편에선 초고령화 사회로 홀로 사는 노인들이 가난과 외로움에 죽어가고 있다.

게티이미지뱅크
게티이미지뱅크

책에는 ‘법 밖의 가족’으로 살아가는 다양한 사람들이 등장한다. 결혼이 부담스러워 동거를 택한 이성 커플, 법적 결혼이 불가능한 동성 커플은 물론, 아이들이 다 자란 뒤에 만나 십 수년을 함께 살았지만 상속 등의 문제로 혼인신고를 미루는 80대 노인 커플, 장애인 거주시설에서 나온 뒤 연락이 끊긴 가족 대신 시설에서 만난 동료 장애인과 의지해 사는 장애인 커플, 아픈 친구 돌봐주러 왔다가 수년째 같이 사는 동성 노인들까지. 가족의 요건을 혈연, 혼인, 이성애적 사랑에만 가둬두는 게 얼마나 편협한 발상인지 그들의 삶 자체가 보여준다.

저자는 생활동반자법이 궁극적으론 우리 사회의 고독을 줄이고 돌봄 공백을 메우는 사회안전망일 수 있다고 역설한다. 국가가 제공하는 복지에는 ‘사람’이 없다. 현금과 각종 서비스를 줘도 일상을 들여다볼 순 없다. 취약계층을 위한 임대주택 역시 사회복지 대상자들을 한 데 모아둔, 행정편의적 발상 아니냐고 저자는 꼬집는다. 신뢰할만한 생활동반자가 있다면 가족과 국가의 빈자리를 대신하는 자발적이고 상시적인 양질의 돌봄을 제공할 수 있다는 주장이다. 도시로 떠난 자식을 대신해 서로 의지하며 사는 시골 할머니들에게 누가 더 가까운 가족이겠는가.

외롭지 않을 권리

황두영 지음

시사IN북 발행ㆍ296쪽ㆍ1만6,000원

생활동반자법이 제정되면 가족 해체를 촉진해 사회의 근간이 흔들릴 거라 우려한다. 저자는 생활동반자법이야 말로 사회를 안정시키는 법이라 반박한다. 불안정한 가족 형태를 제도권 안으로 끌어들이고, 사회구성원들이 서로에게 더 책임을 지도록 독려하는 법이기에 생활동반자법은 보수적인 법안이라는 주장이다.

혈연이나 혼인으로 맺어지지 않더라도 우리는 모두 누군가의 특별한 한 사람이 될 수 있는 권리를 갖고 있다. 새로운 가족을 꿈꾸는 변화는 이미 시작됐다. 늘 그렇듯 법과 제도가 달라진 현실을 따라잡지 못하는 게 문제다.

강윤주 기자 kkang@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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