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정 로마의 율리우스 시저가 새 달력을 짓기 전 고대 로마의 일년 첫 축제인 ‘리베랄리아(Liberalia)’가 3월 17일(율리우스력 기준 3월 15일) 시작됐다. 시민들은 다산과 포도의 신 리베르(Liber)의 복을 기원하며 포도주로 흥겨운 축제를 벌였다. 성년식(Toga Virillis)도 함께 치러져, 소년들은 토가를 입고 비로소 어른이 됐다. 성인이 된다는 건 의무를 져야 한다는 것, 즉 전쟁에 대비해 자신의 칼과 방패를 마련해야 한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소년들은 핏빛 포도주에 취해 미래의 무운을 빌었다.
로마가 3차에 걸친 포에니전쟁으로 카르타고를 꺾고 지중해를 제패하기 전까지, 연이은 정복 전쟁으로 로마 제국을 이루고 풍부한 노예 노동력으로 거대 지주의 대농장 라티푼디움 체제로 전환하기 전까지, 공화정 로마는 자유민(평민)의 소규모 농업에 의존해 식량과 술과 기름(올리브)을 얻고, 그들의 군사력으로 밀집방진을 구축했다. 리베랄리아는, 자유(Liberty)에서 파생했지만 동시에 공화정 로마의 영속, 즉 정치ㆍ군사 및 경제 재생산을 위한 성대하고도 엄숙한 축제였다.
그 축제가 훗날 공화정 말기~제정 초기의 역사학자 티투스 리비우스(BC 59~AD 17)가 ‘로마사’에서 ‘광기와 타락의 난동장’이라 성토하도록 ‘변질’된 계기와 시기는 불확실하다. 분명한 것은 로마 원로원이 BC 186년 축제 개혁법안을 선포하며 그 무렵 ‘바쿠스 축제(바카날리아ᆞBacchanalia)’라 불리던 그 행사의 규모와 성비를 규제하고, 앞서 그 축제를 이끌거나 가담한 시민 7,000여명을 체포해 대부분 처형했다는 사실이다. 리비우스는 합당한 조치였다고 평가했다.
바쿠스 축제의 타락, 즉 남녀노소, 귀족 평민이 뒤섞여 포도주에 취해 밤낮 없이 춤추며 난교하고, 신비주의와 결합해 산 짐승을 잡아 날고기를 먹는 제의를 펼쳤다는 주장은 과장이라는 평이 있다. 다만 리비우스가 로마사를 쓰던 무렵의 로마는 정복전쟁으로 귀족이 더 부유해지고, 평민은 목숨을 잃거나 대농장에 밀려 계급 자체가 위협받던, 경제ㆍ군사 시스템의 격변기였다. 시민의식과 가치관의 혼란기였다. 리베랄리아는 그 변화의 상징이었고, 새 시대를 여는 역사적 제단의 희생양이었지 모른다. 최윤필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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