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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국에서] 한국형 아카데미상을 만들자

입력
2020.03.16 04:30
2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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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준호 감독이 지난달 9일 미국 로스앤젤레스 돌비극장에서 열린 제92회 미국 아카데미영화상 시상식에서 영화 '기생충'으로 국제영화상을 받고 트로피를 힘껏 들어 보이고 있다. 로스앤젤레스=AP 뉴시스
봉준호 감독이 지난달 9일 미국 로스앤젤레스 돌비극장에서 열린 제92회 미국 아카데미영화상 시상식에서 영화 '기생충'으로 국제영화상을 받고 트로피를 힘껏 들어 보이고 있다. 로스앤젤레스=AP 뉴시스

미국 로스앤젤레스의 성형외과는 10월쯤부터 일이 많아진다고 한다. 겨울 내내 펼쳐질 여러 시상식을 앞두고 얼굴 시술을 받으려는 배우 등 유명인사들로 붐비기 때문이라고 한다. 시상식 시즌의 정점이자 대단원은 미국 아카데미영화상이다. 영화사들은 자신들이 제작하거나 투자배급한 영화가 아카데미상을 받도록 홍보 활동에 열을 올린다. 이미 개봉한 영화인데도 별도 시사회를 열거나, DVD 등을 아카데미상 투표권을 지닌 미국 영화예술과학아카데미(AMPAS) 회원들(8,469명)에게 보낸다. 배우와 감독 등은 각종 파티에 참석해 영화 알리기에 애쓴다. AMPAS가 과열경쟁을 막기 위해 아예 별도 규정을 만들어 엄격히 적용할 정도로 ‘오스카 레이스’는 치열하다.

아카데미상 수상자들은 트로피를 쥔 전후가 확연히 다르다. 실력을 공인 받은 배우와 스태프의 몸값은 치솟는다. 후보에 오른 것만으로도 평생 내세울 이력이 된다. 영화사들은 배우 등이 자신들과 함께 일하면 트로피를 차지할 수 있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 돈을 아끼지 않는다. 아카데미상은 단순한 시상식을 넘어 여러 경제 효과와 문화현상까지 만들어낸다.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 덕분에 올해 할리우드 시상식 시즌을 여느 해보다 자세히 들여다봤다. 공식 기자실에서 아카데미상 시상식을 지켜볼 수도 있었다. 5명 가량의 사서가 기자실에서 아카데미상 역사와 관련한 사실을 확인해주는 모습이 가장 인상적이었다. 92년 전통이 구축한 체계를 확인할 수 있었다. 왜 우리는 이렇게 권위 있는 영화상 하나 없을까라는 오랜 질문을 되새김질하는 시간이었다.

한국에도 배우들이 레드카펫에서 화려한 의상을 입고 미소를 뿌리거나 감동적인 수상 소감을 밝히는 시상식은 있다. 하지만 영화산업 전반의 발전을 견인하는 영화상은 없다. 그나마 한국 영화계를 대표하던 상은 대종상이었다. 권위주의 정권 시절 정부 주도로 만들어진 대종상은 불명예의 역사로 얼룩진 상이다. 1996년 개봉하지 않은 영화 ‘애니깽’이 작품상을 수상하거나, 2015년 시상식에 참석하지 않는 배우에게는 상을 주지 않겠다고 밝히는 등 숱한 논란을 자초했다. 수상자(작)를 대충 선정한다고 해 ‘대충상’이라는 별칭을 얻은 지도 오래 됐다. 주관 단체는 한국영화인총연합회인데, 다수 영화인들이 적극 활동하는 곳은 아니다. 언론사나 지방자치단체가 주도하는 여러 영화상이 있으나 영화인들의 축제로 승화되고 있진 않다. 대표성 약한 단체가 주최하고 소수 심사위원들이 대부분의 수상 내역을 결정하니 영화계 전체로부터 권위를 인정받기 어렵다.

아카데미상은 예심부터 분야별 전문성이 작용한다. 각 부문 후보는 감독과 배우, 촬영 등 AMPAS의 17개 분과 회원들이 선정한다. AMPAS 회원이 되려면 해당 분과의 추천을 받아야 하고, AMPAS 이사회의 심사를 거쳐 입회가 가능하다. 오랜 시간 영화업계에서 일하며 실력을 인정 받은 이들이 대상이다. AMPAS가 아카데미라는 근엄한 호칭을 지닌 이유 중 하나다. 2016년 ‘화이트 오스카’(배우상 후보 20명이 모두 백인인 점에 대한 비판) 논란을 거친 후에는 여성과 유색인종, 해외 회원을 대폭 늘리고 있다. 아카데미상 투표 과정에서 특정 소수집단의 취향이나 선입견 등이 작용하기 더욱 어려워진 구조다. 업계 각 분야에서 명망 있는 사람들이 모여 1인 1표를 행사해 수상 결과를 만들어내니 상의 권위는 높아질 수 밖에 없다.

모든 상은 격려다. 수상자들은 상을 발판으로 보다 높은 목표를 설정하고, 수상에 실패한 이들은 분발의 계기로 삼곤 한다. 업계를 대표하는 공정한 상이 업계 종사자들에게 동기를 부여한다. 제대로 된 영화상이 영화산업 발전의 밑돌이 될 수 있다. 한국 영화 역사는 지난해 100년을 맞았다. 국민 1인당 1년에 영화 4편을 넘게 본다. 세계 1위다. 우리만의 아카데미상을 만들 때다.

라제기 영화전문기자 wenders@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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