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 며칠 잔뜩 풀이 죽어 지냈다. 가라앉은 기분을 바꿔 보려고 머리를 짧게 잘랐지만 늙어가는 피부색만 도드라졌다. 밤 산행을 나서고, 일에 파묻히려 원고를 붙들고 앉아 있었으나 그마저 효험을 보지 못했다. 날이 좋은 오늘, 간단하게 점심을 때운 뒤 인근 아파트 단지를 걸으며 햇살을 쐬기로 했다. 잘 조성된 공원 한쪽, 산수유나무와 매화나무가 노랗고 하얀 꽃잎을 피워 올리고 있었다. 그 아래 벤치에 앉아 꽃을 보다가 깜짝 놀랐다.
왼쪽 시야 한쪽이 총천연색으로 일렁이는 것과 동시에 꼬마들의 웃음소리가 들려 왔다. 봄볕보다 쨍하게 소리가 울리는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아파트 어린이집 바로 앞 작은 놀이터였다. 거의 한 달째 문이 닫힌 어린이집을 보며 헐렁한 원복에 배낭까지 둘러멘 아기 세 명이 입으로 비눗방울을 불어 날리고 있었다. 깨끗하고 어색한 옷차림과 배낭으로 미뤄 짐작하건대 이번에 어린이집에 들어갈 유아들인 듯했다. 그 작은 아이들이 한 번씩 힘차게 빨대를 불 때마다 수백 개의 무지갯빛 비눗방울들이 공중으로 날아올랐다. 아이 엄마 하나가 넋 놓고 그 광경을 쳐다보는 내 옆으로 다가와 앉았다. 예상대로 3월 초 이 어린이집에 처음 등원할 예정이던 네 살 아이들이라고 했다. 설레는 마음으로 원복에, 가방에, 신발까지 다 사두었는데 상황이 꼬여 버리고 말았다. 꼼짝없이 집안에 갇힌 아이들이 어른들을 보채다 못해 일종의 우울과 무력감을 호소하는 단계에 이르자 평소 알고 지내던 엄마 세 명이 아쉬운 대로 어린이집 앞에서 번개를 한 것이다. 그러니까 지금 저 아이들이 까르르 웃으며 불어대는 비눗방울 놀이는, 현실화되지 못한 어린이집 프로그램의 유사 체험인 셈이었다.
노랗고 하얀 산수유와 매화 사이로 점점 더 화려하게 공중을 부유하는 비눗방울을 바라보다 정신이 아득해진 나는 저 멀리, 오래된 기억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네 살이던가 아니면 다섯 살이던가, 봄이었다. 또래 아이들이 하나둘 콧물을 흘리고 어지럼증을 호소하더니 온몸에 열꽃을 피웠다. 홍역이 돌기 시작했다고 어른들은 수군거렸다. 함께 놀던 친구들이 픽픽 쓰러져 집 안에 틀어박혔던 어느 날, 나에게도 열병이 찾아왔다. 보리수 나뭇가지 달인 물을 마시고, 할머니가 차가운 수건으로 이마와 등을 닦아냈지만 열병은 쉬 다스려지지 않았다. 혼자 누워 있던 어느 오후였다. 자리에서 일어난 나는 냇가로 가기 위해 집 뒤 야산을 넘었다. 산 아래 냇물로 난 외길 옆 응달진 귀퉁이에 옹달샘이 하나 있었다. 열에 치여 목마르던 나는 옹달샘으로 향했고, 거기 차가운 돌바닥에 이끌리듯 누워 새우처럼 몸을 웅크렸다. 한참을 그렇게 있자니 잘린 나뭇가지처럼 말라가던 몸에 조금씩 물기가 도는 것 같았다. 어디선가 코를 찌르는 냄새가 났다. 바로 위 양달에 핀 보라색 꽃나무에서 나는 향기였다. 그게 라일락이라는 건 한참 뒤에 알았다. 며칠을 더 옹달샘 옆 돌바닥에 눕고 난 후 열병은 잦아들었다. 하지만 다시 모인 아이들 사이에서 한 명이 보이지 않았다. 한 집 건너 이웃한 미경이 언니였다. 하늘에 별들이 총총 빛나던 밤, 할머니는 별이 되어 저 하늘로 날아간 미경이 언니를 찾아보라고 우리에게 속삭였다. 그렇게 해서 나는 고향 마을을 떠나던 나이까지, 옹달샘 가에 라일락이 필 때마다 평상에 누워 꿈결처럼 그리운 얼굴을 떠올리곤 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여자아이 하나가 내 옆에 앉은 제 엄마에게 와락 달려들었다. 까만 눈가에 물기가 가득했다. “엄마, 기분이 너무 좋아서 오늘을 절대 못 잊을 것 같아요.” 순간 머리털이 곤두서고 코끝이 시큰해졌다. 오늘을 못 잊을 거라는 꼬마의 울먹임, 아마도 맞을 것이다. 돌아보니 현실은 짧고, 기억은 무섭게 길었다.
지평님 황소자리 출판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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