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 ‘충무로 품질보증 마크’ 심재명 대표
※ 한국영화가 지난해 탄생 100년을 맞았습니다. 새로운 100년을 시작하며 영화보다 재미있는 한국영화 100년의 이야기를 영화전문가를 통해 매주 토요일 <한국일보>에서 들려드립니다.
심재명(57) 명필름 대표가 영화인의 꿈을 품게 된 건 한 편의 프랑스 영화와 만나게 되면서였다고 한다. TV ‘주말의 명화’에서 방영된 자크 베케르ㆍ막스 오퓔스 감독의 ‘모딜리아니의 등불’(1958)이었다.
화가 모딜리아니의 위태로운 삶과 사랑을 그린 이 영화는 화가를 동경하고 미대 진학을 희망하던 중학생 심재명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일찍 싹튼 영화에 대한 관심은 동덕여대 국문과 1학년이던 1984년 3월, 막 창간한 월간 영화전문지 스크린의 모니터 대학생 기자로 일하는 걸로 이어진다.
스크린은 창간 기념행사를 서울 허리우드 극장에서 했었는데, 이때 심 대표는 임권택 감독의 ‘안개마을’(1983)을 비롯해, 하길종 감독과 이두용 감독의 영화 등 당시까지 한국 영화를 대표하는 감독들의 여러 작품들을 접하게 된다. 학교를 다니는 동안 심 대표는 등록금 마련을 위해 아르바이트를 하는 틈틈이, 전공 외에 미술 이론 수업도 챙겨 들었고 영화동아리인 영화마당 우리 활동에다 프랑스 문화원을 드나들며 영화에 대한 안목을 키워나간다.
◇홍보마케팅의 귀재
대학을 졸업한 후 회사 30여 군데에 입사지원서를 냈지만 줄줄이 떨어진 끝에 심 대표는 작은 규모 출판사에 들어가 일하게 된다. 그곳에서 4개월을 보내던 중 우연히 신문 구인란의 ‘영화 광고 카피라이터 모집’이란 문구를 보게 된다. 평소 글쓰기를 즐겨 했고 국문학을 전공한 그로서는 카피라이터가 영화계 안에서 자리잡기에 안성맞춤인 자리로 보였고, 용기 내어 몰래 응시한 결과, 합동영화사의 기획실로 전직하는데 성공한다.
배우 아니면 미술, 의상, 분장 스태프 정도 말고는 여성이 설 자리가 적었던 영화계에서 심 대표는 여성 최초 영화 카피라이터였다. 남자들 중심의 영화판이었지만 심 대표는 기죽지 않고 2년간 부지런히 일하며 영화계 인맥과 경험을 쌓는다. 존 바담 감독의 ‘잠복근무’(1987)를 시작으로 서울극장(곽정환 합동영화사 대표 소유)에서 들여온 외화를 홍보하는 일이 초창기의 주된 업무였다.
이후 심 대표는 영화사 극동스크린으로 옮겨가 장미희 주연, 김호선 감독의 ‘사의찬미’(1991)를 통해 처음으로 ‘기획’에 이름을 올리게 된다. 영화운동단체 장산곶매의 멤버로 ‘오! 꿈의 나라’(1989)의 공동감독이자 ‘파업전야’(1990)의 프로듀서였던 이은 감독과 만나게 된 것 또한 이 즈음의 일이었다.
심 대표는 이현승 감독의 ‘그대안의 블루’(1992)로 프로듀서 데뷔를 하자마자 프리랜서로 독립해 피카디리 극장 한 귀퉁이에 자리잡고 홍보마케팅 전문회사 명기획을 설립한다. ‘잘까, 말까, 끌까... 할까?’와 ‘남주기 아까우니 우리 결혼하자’라는 홍보문구를 직접 지어 센세이션을 일으킨 ‘결혼 이야기’(1992), ‘세상 밖으로’와 ‘게임의 법칙’(1994), 한석규의 영화배우 데뷔작인 ‘닥터봉‘(1995) 등이 이 시기 명기획의 손길을 거쳐서 세상에 나온 영화들이었다.
심 대표가 인생의 반려이자 영화적 동료 이은 감독과 결혼한 이듬해인 1995년 8월, 명기획은 간판을 바꿔 달고 운니동의 오피스텔로 옮겨 영화제작사로 탈바꿈한다. 부부와 훗날 보경사를 차려 독립하는 여동생 심보경 세 사람이 의기투합해 세운 이 소박한 가족 기업이 바로 한국 영화 웰메이드의 산실로 큰 족적을 남기게 되는 명필름이다.
여성영화인으로서의 의식과 감성, 그리고 상업성과 예술성의 조화를 중시한 심 대표와, 사회적 문제의식을 담은 작품 세계를 추구한 이 감독의 방향성은 이후에 만들어질, 명필름 영화 41편의 성격을 예고하는 것이었다.
“‘공감’이다. 장르에 상관없이 관객의 공감을 얻는 게 가장 중요하다. 상투적인 말이지만 어려운 일이다. 자칫 잘못하면 공허하거나, 시대착오적인 이야기가 나올 수 있기 때문이다. 지금 사람들에게 가장 필요한, ‘발이 땅에 닿아있는’ 영화를 만들기 위해 항상 노력한다.”(문화웹진 채널예스 2013년 8월 8일)
닻을 올린 명필름의 첫 항해가 순탄치만은 않았다. 시나리오 개발 단계에서 기획이 엎어지는 일은 부지기수였고 신생 영화사의 작품이라면 출연을 꺼리는 풍조 때문에 배우를 섭외하는 데에도 난항을 겪곤 했다. 뒷날 심 대표는 “영화사를 운영하던 초반엔 담보 능력이 부족해 사채를 쓴 적도 있다”며 “당시엔 물리적으로 힘들어 스트레스가 컸다”고 이때를 술회한다. ‘씩씩한 미시맘이라는 개념을 담은, 기혼 여성 이야기’에 대한 영화 준비가 잘 풀리지 않던 도중, 대종상 시나리오 공모전을 통해 눈에 들어온 시나리오가 바로 ‘코르셋’(1996)이었다. 외모지상주의가 만연한 사회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한 여성의 이야기를 로맨틱 코미디의 틀 안에서 풀어낸 이 영화가 명필름의 창립작이다. 흥행에 큰 재미를 본 건 아니었지만, 제33회 대종상 각본상, 제17회 청룡영화상 각본상과 신인여우상을 받으며 작품성과 기획의 참신성을 인정받았다.
◇멜로의 새 감수성 ‘접속’
명필름의 두 번째 작품이자 첫 멜로 영화인 ‘접속’(1997)으로 심 대표의 선구안이 빛을 발하기 시작한다. ‘번개(즉석만남)’가 성행하던 PC통신 초창기의 현실에 세련된 멜로드라마의 감성을 접목한 이 영화는 추석 연휴 개봉해 서울 관객만 67만4,000명을 불러 모으며 큰 호응을 얻었고, 장래에 ‘칸의 여왕’으로까지 성장할 대형 신인 전도연을 발굴해낸 의의를 지닌 작품이 되었다.
‘접속’은 ‘웰메이드’라는 신조어를 탄생시키는 계기이기도 했다. 촬영과 조명, 음향과 미장센 등 영화의 기술적 완성도를 끌어 올려 외화에 밀리지 않는 작품 ‘접속’을 내놓고자 한 명필름의 노력은 ‘조용한 가족’(1998)의 세트 공간, ‘공동경비구역 JSA’(2000)의 35㎜ 시네마스코프 촬영과 CGI 등 기술 부문에 대한 아낌없는 투자로 이어졌다. 이는 한국영화의 질적 수준을 한 층 끌어올리는 전기를 마련하게 됐다.
‘영화의 관점이나 가치, 의미에 더 우선순위를’ 두고, 신인 감독을 발굴하는데 주저하지 않는 심 대표의 감식안은 중장기적으로 한국영화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는 선순환 효과를 불러왔다. 시나리오를 쓴 것을 제외하고 별다른 이력이 없던 김지운 감독을 과감히 데뷔시킨 ‘조용한 가족’, 정지우 감독의 데뷔작 ‘해피엔드’(1999), 주변의 만류를 무릅쓰고 추진한 결과 좌석점유율 평균 90%를 기록하는 폭발적인 성공으로 박찬욱 감독의 경력을 구원한 ‘공동경비구역 JSA’, 베니스국제영화제 경쟁부문에 진출한 김기덕 감독의 ‘섬’(2000), 임순례 감독의 ‘와이키키 브라더스’(2001), 임상수 감독의 ‘바람난 가족’(2003) 등이 대표적인 사례다. 한국영화 르네상스를 수놓고 오늘날까지도 일선에서 활동하는 작가주의 감독들의 등장은 심 대표의 결단과 명필름의 뒷받침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영화를 만들면서 제 자존심까지 버려가면서 하고 싶지는 않아요. (중략) 영화라는 게 어떤 이에겐 2시간 정도의 오락거리일 뿐이지만, 제게 영화는 무한한 존경심이 담긴 예술이거든요. 우리 영화에 리얼리즘이나 휴머니즘의 색깔이 짙은 내용이 많은 것도 그런 배경이 작용한 덕분이죠. 명필름은 인간의 삶과 흔적, 냄새가 배어 있는 작품들을 추구하는 편이에요.”(문화일보 2012년 11월 28일자)
심 대표의 선택이 언제나 성공으로만 돌아온 건 아니었다. 이미연 감독의 ‘버스, 정류장’과 최호 감독의 ‘후아유’, 김현석 감독의 ‘YMCA 야구단’(2002)은 박스오피스에서 부진했고, 10.26 사태를 블랙코미디로 다룬 ‘그때 그 사람들’(2005)은 정치적 논란에 휩싸여 법원으로부터 일부 장면 삭제 판정을 받는 아픔을 겪었다.
그러나 명필름 고유의 색채는 퇴색되지 않았다. 여성주의적 서사가 대중적으로 소통할 수 있음을 입증한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2008), 한국 애니메이션의 가능성을 보여준 ‘마당을 나온 암탉’(2011), 한 교수의 석궁 테러 사건을 극화한 ‘부러진 화살’(2012), 노동현실과 인권의 문제를 다룬 ‘카트’(2014)는 한국영화가 예전의 개성과 활력을 잃어가는 가운데서도 다양성과 사회적 가치를 고수하려는 진정성의 산물이다. 한국영화의 르네상스를 견인해온 심 대표와 명필름의 행보는 한국영화사에 남을 하나의 이정표가 되었다.
조재휘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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