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둥이ㆍ혁명가ㆍ독서광… 마오쩌둥이 사랑한 글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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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둥이ㆍ혁명가ㆍ독서광… 마오쩌둥이 사랑한 글귀는?

입력
2020.03.14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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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명의 차이나는 발품 기행] <35> 장시 ③ 지안 징강산과 메이베이고촌

장시성 징강산의 마오쩌둥이 살았던 옛집(구거)에서 그의 동상을 기념품으로 판매하고 있다. 징강산은 중국 공산당의 첫 혁명근거지다.

장시성 중부에 위치한 지안은 여릉, 길주라 불렸고 원나라 때 지금의 지안(吉安)으로 바뀐다. 1927년 가을 추수봉기에 실패한 마오쩌둥은 지안에 있는 징강산(井岡山)으로 후퇴한다. 중국 공산당의 첫 혁명근거지다. 지안에서 기차로 약 1시간, 다시 시내버스로 40분을 가면 징강산 입구다. 홍군 복장을 입은 단체 여행객이 많다. 비가 오락가락한다.

장시성 징강산의 마오쩌둥이 살았던 집.
홍군 복장을 한 참배객들이 징강산 입구에서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징강산 차량을 타고 츠핑(茨坪)으로 이동한다. 마오쩌둥 구거(舊居)를 찾는다. 유명 인사가 살던 집을 흔히 고거(故居)라 한다. 북송시대의 자전 ‘광운(廣韻)’도 고(故)를 구(舊)라 했다. 고거나 구거나 예전에 살던 집이다. 동의어이건만 구분하는 이유가 있을까? 어렵지 않다. 고인(故人)과 친구(親舊)의 차이다. 1955년 마오쩌둥이 살았던 샤오산의 옛집에 ‘고거’라는 편액이 걸렸다. 얼마 후 류샤오치(전 주석)가 선비다운 문제를 제기했다. ‘고’는 서거했다는 뜻이라고 지적해 1965년 구거로 바꿨다. 지금은 다시 고거가 됐다.

징강산의 마쩌둥 구거.
마오쩌둥 구거에 홍군 복장이 단정하게 놓여 있다.

구거 벽은 황토를 바른 느낌이다. 이곳은 왜 아직 ‘구거’라고 할까? 처음 구거를 만들 때는 ‘살아생전’이었다. 그냥 굳어진 말이다. 구거였던 고거라 생각하면 된다. 안내문을 보니 1927년 10월 27일부터 1929년 1월 14일까지 마오쩌둥과 그의 세 번째 부인 허쯔전이 함께 살았다고 한다. 두 사람의 결혼은 약간 베일에 가려져 있다. 허쯔전은 징강산 인근 ‘융신의 한 떨기 꽃’이란 미모를 지닌 당원이었다. 농민 자위군 대장 위안원차이 소개로 비서이자 부인으로 동거한다. 적어도 1928년 6월 전후 혼례를 올렸다. 침대 위에 홍군 복장 한 벌이 놓였다. 허름한 공간에 그냥 던져 놓은 듯한 옷이다. 자연스레 치열했던 시절을 떠오르게 한다.

1920년에 마오쩌둥과 결혼한 양카이후이는 세 아들을 키우며 지하 활동 중이었다. 징강산으로 합류하고 싶었는데 마오쩌둥은 한사코 반대했다. 1930년 1월부터 양카이후이는 고향에 머물렀다. 당시 친필 원고가 1990년대에 발견돼 언론을 통해 보도된다. ‘마오쩌둥이 기어이 나를 포기했다’는 한탄이 절절했다. 소식을 전해도 답신이 없다는 아쉬움, 세 아들에 대한 그리움까지 설마 버리지는 않았으리라는 안도감이 섞였다. ‘그의 눈 입 뺨 이마 머리에 수백 번이라도 키스하고 싶다’는 구구절절한 사랑도 담겼다. ‘그는 내 사람이고 나의 것’이라는 집착이었나? 아니면 질투였을까? 양카이후이는 마오쩌둥에게 철저히 버림받고 스물아홉으로 생을 마감했다. 그해 11월 체포돼 총탄의 이슬로 사라진다.

마오쩌둥 구거에 있는 홍사군 유적지.
마오쩌둥 구거에 있는 ‘징강산의 투쟁’ 비석.

1927년 4월 12일 장제스는 국공합작을 깨고 공산당원을 도륙하기 시작했다. 백색테러가 극심하자 공산당은 지하로 숨었다. 7월 15일 장제스와 라이벌 관계였던 국민당 지도자 왕징웨이도 공산당을 공격했다. 고난이 시작됐다. 공산당 최고지도자 천두슈, 취추바이, 리리싼이 제시한 투쟁노선은 줄줄이 실패를 거듭했다. 징강산은 근거지로 좋은 선택이었다. 1927년 8월 난창봉기 후 무장한 주력 부대를 이끌고 주더가 징강산으로 들어왔다. 1928년 4월 28일, 공산당사는 이날 일을 주모회사(朱毛會師)라고 부른다. 두 부대는 중국공농홍군(中國工農紅軍) 제4군으로 편재됐다. 홍사군으로 불렸으며 향후 명실상부한 주력군이 된다. 1928년 7월에는 핑장봉기를 일으킨 펑더화이가 군대를 이끌고 합류했다. 홍오군도 생긴 것이다. 마오쩌둥은 혁명근거지에서의 경험을 토대로 1928년 11월 ‘징강산의 투쟁’을 작성해 당 중앙에 보고한다. ‘인민군대 창군, 토지혁명 실행, 홍색 정권 건립’으로 요약할 수 있다.

주더 구거 앞에 노래를 부르는 아이가 있다. 두 손을 높이 들고 군가를 부르는 모습이 신통하다. 아이 이름은 위쯔양(餘梓洋)이다. 마침 열 번째 생일이라고 한다. 홍군처럼 옷차림을 하고 여행객을 향해 징강산 역사와 조국에 대한 애국심을 웅변한다. 벌써 몇 달째다. 엄마는 딸의 일거수일투족을 찍고 있다. 징강산에서 태어난 딸이 혁명의 경험을 배우며 성장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시작했다고 자랑한다.

마오쩌둥 구거에서 웅변 중인 위쯔양.
중국 공산당의 첫 혁명근거지였던 장시성 징강산 혁명열사능원에 마오쩌둥(오른쪽)을 비롯해 함께 활약한 인물들의 사진이 걸려 있다.

위챗으로 사진을 찍어 보낸 엄마에게 ‘총명한 딸의 마음을 지지한다’는 댓글을 남겼다. 똑부러지는 말씨, 발랄한 표정, 전투적인 동작에 박수갈채를 보냈다. 위쯔양은 지금도 징강산에서 ‘귀여운’ 홍군으로 활동하고 있다.

1965년 징강산을 다시 찾은 마오쩌둥은 95자에 이르는 시 한 편을 남겼다. 구거에선 ‘오래전부터 원대한 포부가 있었네, 징강산에 다시 올라(久有凌雲志, 重上井岡山)’로 시작하는 이 시구가 적힌 마오쩌둥 동상을 판매한다. ‘마오쩌둥동지(毛澤東同志)’가 적힌 상품은 꽤 많다. 도금한 동상이 129위안이다.

홍군 복장의 참배객들이 징강산 혁명열사능원으로 오르고 있다.
징강산 혁명열사능원의 단체 참배객.

천천히 걸으면 10분, 혁명열사능원을 찾는다. 입구 사무실에 배낭을 맡겼다. 열사능원에 찾아온 외국인이라고 몇 배는 더 친절하다. 홍군 복장을 입은 단체 관광객이 차례로 계단을 오른다. 번호표는 없지만 일정한 차례가 있는 듯하다. 계단을 오른 후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오와 열을 맞춘다. 서두르지 않고 안으로 들어서고 나서도 침착하다. 화환을 놓고 대장이 신호를 하면 모두 고개를 숙이고 참배한다. 아이들조차 심각하다. 떠드는 아이가 별로 없다. 신기할 정도다.

혁명열사능원에 징강산 투쟁에서 숨진 1만5,774명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징강산 혁명열사능원의 참배객.

징강산 투쟁에서 희생된 1만5,744명의 이름도 금빛으로 새겼다. 명단을 보니 대부분 30대 전후에 숨졌다. 혁명 근거지를 사수하기 위해 너무나도 뜨거운 피를 바쳤다. 마오쩌둥, 주더, 펑더화이 등 지도자는 사진도 큼지막하다. 1987년 준공 후 개방했다. 마오쩌둥이 쓴 ‘사난열사만세(死難烈士萬歳)’ 아래 고개를 숙인 참배객이 끊임없이 이어진다. 사난은 ‘나라를 위해 싸우다 죽다’라는 말이다. 희생 없이 건국은 없다. 희생이 있더라도 건국하지 못한 역사는 많다. 이들의 희생은 헛되지 않았으니 어쩌면 ‘행복한 나라’다.

그러나 징강산 혁명근거지는 성공하지 못했다. 마오쩌둥도 보고 문건을 통해 실패를 자인했다. 군비 증강은 요원하고 토지개혁에 농민은 호응하지 않았다. 오합지졸 군대는 비적과 다름없었다. 강력한 기율을 선포하지 않을 수 없었다. 몇 차례 국민당 토벌에 맞서 승리했지만, 점차 포위망을 뚫고 오자 도저히 감당할 수 없었다. 모스크바에서 열린 공산당 6차 전국대표대회는 향후 투쟁노선을 확정했다. 6대(六大) 문건이 징강산에 도착하자 마오쩌둥과 주더는 약 3,600명을 이끌고 징강산을 떠난다. 산에서 내려온 홍사군은 장시성 남부와 푸젠성 서부 지역을 무대로 활약한다. 1929년 12월 푸젠 구텐(古田)에서 홍사군 제9차 대표대회를 열었다. 다시 1930년 2월에는 베이터우(陂頭)에서 홍사군과 홍오군, 홍육군 연석회의를 소집한다. 투쟁과 회의, 회의 후 전투는 올바른 방향을 설정하기 위한 치열한 과정이었다.

메이베이고촌 입구의 패방.
메이베이고촌 입구 매표소. 한글도 적혀 있다.

베이터우는 지안 남부에 있는 고촌 안에 있다. 지안 역에서 버스를 탔다. 한자 발음으로 물결 미(渼), 비탈 파(陂)라고 생각했다. “메이포(meipo) 가는 버스 맞지요?”라고 물으니 할머니가 못 알아 듣는다. 옆에 앉은 아주머니는 ‘메이피(meipi)’라고 당연하듯 말한다. 1시간 만에 고촌 입구에 도착했다. 오후 6시가 넘었다. 입장권도 팔지 않아 무사통과다. 그런데 한글로 ‘미피마을’이라 써놓고 메이베이(meibei)라고 적었다. 사전에도 발음이 무려 셋이다. 메이베이고촌으로 들어가 객잔을 찾는다.

메이베이고촌에서 하룻밤 묵은 객잔의 거실 의자
홍미주 황주.

객잔은 오로지 한 채다. 위에라이(悦來) 객잔은 고가(古街)에 위치한다. 회의가 열린 베이터우촌이다. 베이터우촌은 이제 메이베이고촌이다. 숙소는 주인 저택과 30m 정도 떨어져 있다. 빈집을 객잔으로 만들었다. 2층 방에 여장을 풀었는데 삐거덕거리는 바닥이 괜히 정겨운 집이다. 침대보다 5배는 넓은 공간과 화장실이 딸린 방이다. 거실에는 고가에서나 볼 의자가 있다. 살짝 앉아보니 튼튼하다. 100위안으로 하룻밤의 호사를 누린다.

객잔 주인이 동영상 플랫폼으로 ‘건군대업’을 시청하고 있다.
메이베이고촌의 옛 거리 야경.

주인집에 가서 요리 두 가지를 안주 삼아 밥과 술로 요기를 한다. 홍군 유적지에서는 홍미주가 궁합이 맞나보다. 쌀로 빚어 도수 낮은 황주다. 주인 아저씨가 텔레비전에 완전 몰입 중이다. 동영상 플랫폼 아치이(aiqiyi)로 ‘건군대업(建軍大業)’을 시청 중이다. ‘건당대업’과 ‘건국대업’에 이은 삼부곡 시리즈 드라마다. 마오쩌둥과 주더의 건군 과정을 다룬 내용이다. 안주가 하나 더 생긴 셈이다. 드라마 ‘징강산’을 메이베이에서 촬영했다는 자랑을 들으니 술과 잔이 자주 쪼르륵 깊어간다. 홍등이 밝힌 거리는 하늘도 담장도 모두 어둡다.

메이베이고촌 안내판.
메이베이고촌의 이칠회의 유적지.
이칠회의 유적지 내부에 레닌과 마르크스 초상이 걸려 있다.

아침이 밝았다. 골목이 촉촉하게 젖었다. 메이베이에서 열린 회의를 이칠회의(二七會議)라 부른다. 1930년 2월 7일에 시작해 3일 동안 열렸다. 홍사군을 이끌던 마오쩌둥과 주더 등 40여명이 참가했다. 회의 유적지 안내판을 따라가니 10분 거리다. 홍군 깃발이 걸렸다. 당시 ‘세계혁명영수(領袖)’ 레닌과 ‘세계혁명도사(導師)’ 마르크스는 혁명을 위한 신념 그 이상이었다. 중국어 발음을 한글 표기로 옮기면 레닝(列寧)과 마커쓰(馬克思)다. 마오쩌둥은 정치형세와 당의 임무에 관해 보고했다. 토지개혁을 위해 ‘토지법’도 통과시켰다. 소비에트 정부에 대한 논의를 했던 흔적도 있다.

이칠회의 유적지 앞 교회당.
메이베이고촌의 쩡산 구거.

고가 부근에는 주더, 회의장 앞 교회당엔 펑더화이, 부근 민가에 쩡산과 마오쩌둥이 거주했다. 쩡산은 지안 출신이다. 회의에서 토지 배분 정책을 주장해 마오쩌둥 등 홍군 지도부의 신임을 얻었다. 당나라 문인 한유는 ‘천리마는 항상 있으나 백락(伯樂)은 늘 있지 않다’고 했다. 백락은 춘추시대 인물이다. 인재를 알아보는 능력에 대한 비유다. 중국 공산당 내 백락으로 유명한 쩡산을 메이베이에서 만날 줄 몰랐다. 전 국가 부주석을 역임한 쩡칭훙의 아버지다.

메이베이고촌의 마오쩌둥 구거.
마오쩌둥 구거에 그의 초상과 당나라 문학가 유우석의 시 ‘루실명’이 걸려 있다.

마오쩌둥이 머문 민가에 새긴 유오덕향(惟吾德馨)이 낯설지 않다. 당나라 문학가 유우석의 ‘루실명(陋室銘)’에 등장한다. ‘여기 누추한 집이지만(斯是陋室)’에 이은 ‘나는 마음의 향기가 있노라’라는 뜻이다. 푸젠 토루인 회원루 안 학당 이름이 사시실(斯是室)이 아니던가? 잃어버린 신발 한 짝을 다시 찾은 느낌이다. 유우석이 펼친 ‘향기’ 감성은 마오쩌둥에게 세상을 향한 총탄이 아니었을까? 방으로 들어서니 마오쩌둥 초상화가 걸렸다. 누군가 마오쩌둥 필체와 비슷하게 ‘루실명’ 전문을 써서 붙여 놓았다.

마오쩌둥 구거 벽에 마오가 집주인에게 써 준 대련이 걸려 있다.

마당 벽에 새긴 메기 한 마리가 물 항아리 속으로 뛰어들 기세다. 대련(對聯ㆍ시문에서 대가 되는 글귀)’도 붙어 있다. 만리풍운삼척검(萬里風雲三尺劍)과 일정화초반상서(一庭花草半床書). 마오쩌둥은 유오덕향에서 4개월을 머물렀다. 헤어지기 섭섭했던 노인 웨이쉰위안이 마오쩌둥 일행을 초청해 푸짐하게 대접했다. 이어 문방사보를 가지고 와서 석별의 정을 남겨 달라고 요청했다. 명나라 말기 좌광두가 쓴 대련인 ‘풍운삼척검, 화조일상서(花鳥一床書)’가 떠올랐다. 웨이쉰위안이 알려 준 문구다. 마오쩌둥은 붓을 들어 약간 첨삭해 일필휘지로 썼다. 웨이 집안이 70년간 보관했다. 지금은 정부가 보유하고 있다.

문무겸비를 상징하는 의미심장한 문구다. 좌광두는 명나라 말기 경세지용(經世致用)을 주창하고 사회비판적 붕당인 동림당(東林黨) 출신이다. 만리ㆍ풍운ㆍ검ㆍ정원ㆍ화초ㆍ절반ㆍ침상을 머릿속에서 살짝 걷어내면 참뜻이 보인다. 무(武)를 쌓으면 온 세상을 향해 당당하게 위세를 떨칠 수 있다. 문(文)을 익히면 화초와 함께 기뻐하고 독서에 열중한다. 이 대련을 마오쩌둥은 아주 좋아했다. 건국 후 거처하던 중남해 서재에도 이 대련을 걸었다. 서재 이름도 ‘반상서’였다. 혹독한 대장정 도중에도 책을 놓지 않았던 독서광 마오쩌둥과 잘 어울린다.

고풍스러운 메이베이고촌 거리.

빗줄기가 조금 거세다. 메이베이고촌은 아직 반도 보지 못했다. 숙소로 잠시 대피한다. 바닥이 미끄럽다. 천천히 걸으며 마오쩌둥에게 독서란 무엇이었는지 궁금해졌다. 대련 문구가 자꾸 뇌리를 떠나지 않는다. 화초조차 눈에 보이지 않아야 진정 책 속에 빠진다는 해석이 맞지 않을까? 문득 스치고 지난다. 마오쩌둥은 왜 화초라고 썼을까? 좌광두의 화조가 잘 어울리는데 말이다. 꽃과 함께 있으면 빛나는 새처럼, 책과 더불어 살아가는 삶을 위한 경구는 아닐까? 독서가 거의 ‘죽은’ 세상인데 꼰대 소리 듣기 전에 그만하자.

최종명 중국문화여행 작가 pine@youyu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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