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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할 오늘] 보이콧의 역설적 기여(3.12)

입력
2020.03.12 04:30
2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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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콧'의 어원이 된 19세기의 악명 높은 영국인 지주 재산관리인 찰스 보이콧. 1981년 1월 잡지 '배너티 페어' 그림, 위키피디아.
'보이콧'의 어원이 된 19세기의 악명 높은 영국인 지주 재산관리인 찰스 보이콧. 1981년 1월 잡지 '배너티 페어' 그림, 위키피디아.

‘보이콧(boycott)’은 기업의 부당한 행태에 불매나 거래 거부 등으로 저항하는 소비자운동의 하나를 일컫는 용어로, 19세기 아일랜드의 영국인 지주 재산 관리인 찰스 커닝엄 보이콧(Charles Cunningham Boycott, 1832.3.12~1897.6.1)에서 유래했다.

영국 육군 39연대 아일랜드 주둔군이던 그는, 제대 후 그 인연으로 아일랜드 메이오(Mayo) 지역의 영국인 대지주 언(Earl Erne) 백작의 관재인이 됐다. 언 백작의 토지 임차료는 비싼 편이었고, 보이콧의 횡포도 그에 걸맞게 악랄했다고 한다. 1880년 아일랜드토지연맹(Land League)의 임차인 권리운동인 ‘3F’s’ 캠페인, 즉 공정한 임차료(Fair rent)와 임차권 보장(Fixity of tenure), 농작물 자유거래(Free sale) 캠페인이 시작됐다. 언의 농장도 대상지 중 한 곳이었다.

보이콧은 캠페인에 동조한 소작인 11명을 내쫓았다. 소작 희망자는 넘쳐났다. 하지만 사태는 그의 예상과 달랐다. 연맹의 독려 속에 마을 주민들은 그에게 일제히 등을 돌렸다. 농민들은 소작을 마다했고, 가게들은 물건을 팔지 않았고, 우체부는 소포와 편지 배달을 거부했다. 집 하녀들도 요리와 빨래를 못 해 준다며 집을 박차고 나왔다. 주민들은 그를 조롱하고 욕했고, 농작물을 짓밟고 더러는 수확물을 훔쳐 가기도 했다.

보이콧은 1880년 9월 23일 런던 ‘더 타임스’에 ‘토지연맹의 횡포’와 ‘소작인 등의 만행’을 고발하는 편지를 기고했다. 아일랜드 한 작은 마을의 소작인 저항운동은 그렇게 영국 전역의 뉴스로 확산됐다. 보이콧을 돕고자 나선 북아일랜드 반(反) 아일랜드 진영의 ‘오렌지 맨’ 인부 50여명이 그의 농장에 파견됐고, 경찰과 주둔군의 호위 속에 수확 작업을 벌였다. 물론 무료 자원봉사가 아니었다. 언 백작은 악덕 지주라는 전국적인 오명을 썼고, 500파운드어치의 농작물 수확을 위해 1만파운드의 비용을 들여야 했다. 반면 토지연맹은 보이콧 덕에 소작인 권리운동을 아일랜드 전역으로 확산시키는 큰 성과를 거뒀다. 보이콧은 그해 12월 1일 해고당했다. 시민과 소작인들은 보이콧에 대한 거부 운동, 즉 보이코팅(Boycotting)’을 ‘3F’s’란 공식 명칭보다 더 널리 썼다. 최윤필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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