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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5] 강남역 철탑 위, 아직 그 사람이 있다

입력
2020.03.10 01:00
2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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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5˚C’는 한국일보 중견기자들이 너무 뜨겁지도 너무 차갑지도 않게, 사람의 온기로 써 내려가는 세상 이야기입니다.

서울 강남역 사거리 교통 폐쇄회로(CC)TV 철탑에서 고공농성 중인 김용희 씨가 전화 통화를 하며 손을 들어 인사하고 있다. 연합뉴스
서울 강남역 사거리 교통 폐쇄회로(CC)TV 철탑에서 고공농성 중인 김용희 씨가 전화 통화를 하며 손을 들어 인사하고 있다. 연합뉴스

강남역 사거리를 지날 때면 고개를 들어 교차로 남동쪽을 바라본다. 교통 폐쇄회로(CC)TV 카메라가 설치된 높이 25미터 철탑 위, 여전히 ‘그 사람’이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서다.

철탑 위 그 사람은 바로 해고 노동자 김용희(61)씨다. 삼성항공에 다니던 중 경남 지역 삼성노조 설립위원장으로 활동하다 해고됐다. ‘무노조 경영’ 원칙을 고수하던 그룹의 심기를 거스른 것이다.

줄기차게 복직 투쟁을 하던 그는 마지막 수단으로 고공농성을 택했다. 지난해 6월 삼성 사옥이 바라보이는 강남역 철탑 위에 올랐다. 여름 초입 그 곳에 오른 김씨는 겨울이 다 지난 지금까지 내려오지 못하고 있다.

목숨을 건 고공농성이었지만 회사 측은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해고되지 않았더라면 맞았을 정년퇴직 날짜도 철탑 위에서 보내야 했다. 작은 싱글베드 넓이보다 좁은 0.5평 공간에서 칼날 같은 삭풍과 뜨거운 지열을 온몸으로 받으며, 길어야 15일을 예상했던 김씨는 이제 9개월을 버티는 중이다.

지난 달 입춘 무렵, 뒤늦은 추위가 서울을 강타한 날이었다. 강남역 사거리를 지나며 철탑 쪽을 쳐다보다가, 갑자기 가슴 먹먹한 장면을 목격했다. 김씨는 벌떡 일어나 주먹을 흔들며 구호를 외치고 있었다. 어쩌면 투쟁가를 부르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아래쪽 세상에선 누구도 김씨의 모습을 주시하지 않았다. 경적 소리와 엔진 소음에 묻혀, 아마도 목이 터져라 외쳤을 김씨의 목소리는 25미터 아래까진 닿지 못했다. 이 번잡한 곳까지 자기 육성이 잘 전달되지 않으리란 건 김씨 역시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는 자신의 작은 움직임을 우연하게라도 본 누군가가 관심을 가질 수 있다는 생각에, 차마 가만히 앉아있지 못했을 것이다. 어쩌면 언제 끝날 지 모를 혹독한 싸움을 더 견뎌야 하는 자신의 의지를 다지기 위해, 더욱 힘주어 구호를 외쳤는지 모른다.

혹자는 ‘저럴 시간에 다른 일을 하겠다’, ‘아무리 억울해도 저렇게까지 할 일은 아니다’고 말할 수 있겠지만, 김씨 자신이라고 저 철탑에서 저리도 오래 버텨야 하는 상황이 올 줄 알았으랴.

절박하다 하여 김씨처럼 고공농성을 택할 사람은 많지 않다. 그러나 근로를 제공한 대가로 급여를 받으며 자본주의를 살아가는 우리는, 그 누구라도 운이 없다면 김씨처럼 삶의 절벽으로 언제라도 떠밀릴 수 있는 운명이다. 그 절벽은 우리 일상에서 불과 25미터밖에 떨어져 있지 않다. 유동인구 1위, 정체가 끊이지 않는 번잡한 교차로, 세계적 기업 본사가 자리한 지척에서, 기약 없는 고공농성이 장기간 이어져야만 하는 이 상황은 바로 자본주의가 품고 있는 모순과 비정함을 여실히 보여준다.

복귀할 회사가 사라졌기에 책임이 없다는 회사 측 해명이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러나 절벽에 매달린 사람을 불과 25미터 앞에 두고, 우리는 언제까지 상황을 방치하고 있을 것인가. 김씨는 사과와 명예복직을 원한다고 한다. 그가 내려올 ‘명분’을 찾아야 하는 것은 바로 철탑 아래 있는 사람들의 몫이다.

코로나가 일상을 삼킨 후, 철탑 위 김용희씨가 느끼는 외로움은 더 커졌을 것이다. 분주하던 강남역 사거리에도 오가는 이들이 확 줄었고, 그의 근황을 전하는 기사들도 잦아들었다. 나와 가족의 안위를 우선 챙겨야 하는 현실에서 김씨 같은 상황에 처한 이들이 느낄 소외감은 더 크다. 코로나 사태가 빨리 끝나길, 그래서 절벽에 내몰린 이들에게 응당 필요한 사회적 연대와 관심이 다시 살아나는 날이 빨리 왔으면 한다.

이 글은, 그렇게도 많이 강남역 사거리를 지나면서도, 그 날 그 장면을 보기 전까진 한번씩 쳐다보기만 하고 말았던 무심함에 대한 미안함과 반성을 담은 이야기다. 이 글을 본 누군가가 강남역 사거리를 지난다면, 살짝 고개를 들어 김씨를 향해 마음으로나마 작은 응원을 보내 주길 바라 본다.

이영창 사회부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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