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자의 솔선수범이 건강한 공동체의 조건
권력자도 ‘배분적 정의’ 원칙 실천
협력 주도하는 정당이 궁극적 승자
이인영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가운데), 심재철 미래통합당 원내대표(오른쪽), 유성엽 민생당 공동대표가 4일 오후 국회 로텐드홀에서 선거구 확정 관련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배우한 기자

1980년대 초반 미국에 유학하고 있던 시절, 필자의 남루한 승용차가 맨해튼 링컨 터널 입구에서 벤츠 스포츠카의 조수석 문을 들이 받았다. 차량의 보험증서와 자동차등록증을 제시하며 “전적으로 책임지겠다”라고 미안해하는 나에게 피해 차량 운전자는 나의 운전 과실을 나무라기는커녕 “어디 다친 데 없느냐”라고 물으면서 “차량 피해는 내가 해결하겠다”라고 말했다. 그 운전자의 의연한 대응을 접하는 순간 “아! 이것이 경제적 강자가 취하는 태도이구나”라고 놀라면서 ‘강자의 잣대가 바로 약자에 대한 배려와 나눔에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계기가 되었다.

부자와 넉넉하지 못한 사람이 함께 어울려 사는 어느 곳이든 부자는 공동체를 위해 더욱 많은 책임을 안고 있음은 자명하다. 소득의 40% 이상을 세금으로 내는 고소득자가 많을수록 건강한 정부활동이 보장되고 배분적 정의에 부합하게 된다. 경제적 강자가 세금을 많이 부담한다고 해서 “내가 얼마나 많은 세금을 내는지 알고 있느냐”라는 넋두리를 한다면 배분적 정의의 개념을 이해하지 못하는 무지의 소치이다. 부자들의 높은 세금 부담은 자랑거리가 아니고 공동체 구성원으로서의 값진 책무이기 때문이고 이러한 성숙된 시민 의식이 확산될수록 보다 가치 있는 사회로의 진입이 용이하다.

공부 잘하는 학생이 머리 좋다고 뽐내지 않고 학업성적이 뒤처진 동료들을 돌보아 주는 선행 역시 우수한 학생의 책무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나눔과 배려의 긍정적 자세를 통해 우애와 신뢰가 다져지는 것이 상식이다.

강자가 취해야 하는 보편적 원칙은 정치 영역에서도 예외일 수 없다. 행정부를 이끌고 국회 다수 의석을 확보하고 있는 여권은 국가의 보편적 이익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상대적 소수정당에 비해 월등 무거운 책임을 안게 된다. 이런 점에서 정치적 경쟁에서 신임을 얻지 못한 상대적 소수 정파에 대해 원숙한 포용과 협력을 주도해야 함은 대의제 민주정치의 요체라고 할 수 있다. 야권의 무리한 투쟁마저도 지지계층의 신임을 확인하려는 불가피한 정치적 선택으로 간주하는 성숙된 자세야말로 역설적으로 말해 강자의 특권이라고 생각해야 한다. 이 점에 대해서는 진보ㆍ보수론자를 막론하고 이의를 달지 않을 것이다.

여권이 야권의 반대 수위에 비례적으로 맞서는 행태를 보인다면 경제적 강자와 경제적 약자가 같은 비율로 세금을 내는 것이 ‘경제 정의’에 부합하다는 논리와 다를 바 없다. 여권이 야권의 입장을 경청하고 명분을 살려 줄수록 대의민주제 시스템의 총량적 파이를 크게 만들 수 있음에도 이를 게을리 하는 것은 정치적 강자의 도덕적 권위를 스스로 훼손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전투와 경쟁에서 이긴 자가 궁극적으로 승리하는 것은 아니다. “진정한 승자는 협력에 성공한 자”라는 영국 BBC 소속 생태학자의 언급에 우리 모두 귀를 기울여야 한다.

한 달여를 앞둔 4월 총선에서 승리했다고 자만해서도 안 되지만, 기대에 못 미치는 결과가 나왔다고 해서 움츠려서도 안 된다. 무엇보다도 선거에 승리한 정치적 강자가 겸손과 포용의 열린 자세를 통해 패자를 협력과 공존의 틀로 끌어들이는 노력에 따라 진정한 승자인지가 판별될 수 있다. 성과가 기대에 못 미치게 된 정당 역시 결과에 순응하며 국정의 선순환에 기여할 수 있도록 치열한 자기성찰의 용기를 보여 주어야 한다. 승자와 패자가 혹시라도 정치적 의도를 갖고 총선 결과를 사법적 논쟁으로 비화시키거나 자기합리화로 일관하는 상황이 전개된다면 궁극적으로는 패자로 전락할 수 있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2020년 4월 15일 저녁 늦은 시간, 총선개표가 마무리되는 시점에 승리를 거둔 정당의 대표가 경쟁 정당의 패배를 위로하고 ‘오늘의 진정한 승리는 정치권의 협력을 요구한 유권자’라며 협치를 다짐하는 연설을 들을 수 있길 고대한다면, 비현실적인 기대일까? 정권과 정당에 대한 국민의 시선은 고정되어 있지 않고 엄정하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오연천 울산대 총장ㆍ전 서울대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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