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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래시백 한국영화 100년] 민주화 열기 속 탄생한 ‘코리안 뉴 웨이브’… 리얼리즘 영화 새 지평을 열다

입력
2020.03.07 04:30
1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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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2> 장선우 박광수 감독 

 ※ 한국영화가 지난해 탄생 100년을 맞았습니다. 새로운 100년을 시작하며 영화보다 재미있는 한국영화 100년의 이야기를 영화전문가를 통해 매주 토요일 <한국일보>에서 들려드립니다. 

박광수 감독의 데뷔작 '칠수와 만수'(1988)는 분단이 드리운 그림자를 들추며 당대의 시대상을 반영한다.
박광수 감독의 데뷔작 '칠수와 만수'(1988)는 분단이 드리운 그림자를 들추며 당대의 시대상을 반영한다.
장선우 감독의 두 번째 영화인 '성공시대'(1988)는 치열한 판촉전쟁을 통해 자본주의 사회의 물질만능주의를 비판한다.
장선우 감독의 두 번째 영화인 '성공시대'(1988)는 치열한 판촉전쟁을 통해 자본주의 사회의 물질만능주의를 비판한다.

1980년대 말에 들어서 한국 사회는 변화의 급물살을 타고 있었다. 광주 민주화운동 이래 지속된 신군부의 독재 정치는 1987년 6월 민주항쟁으로 국민들의 항거에 부딪쳤고, 민주항쟁은 정권 교체에는 실패했지만 대통령 직선제를 쟁취하는 성과를 이룩했다.

시대의 파란 속에서 충무로도 새로운 방향을 모색하고 있었다. 영화법 개정으로 할리우드 영화가 국내에 직접 배급되자 이를 저지하고자 영화법 개정 투쟁에 나서는 한편, 영화와 사회의 관계를 고민하면서 한국 근현대사의 억압적인 현실, 예민한 사회적 이슈들을 작품 속에 담고자 하는 일련의 경향성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훗날 ‘코리안 뉴웨이브’로 명명되는 영화적 사조의 탄생이었다. 이 흐름을 선두에서 견인한 쌍두마차가 바로 박광수(65)ㆍ장선우(68) 감독이었다.

박광수 감독은 1990년대 대표적인 사회파 감독으로 코리안 뉴웨이브를 이끌었다. 아이엠픽쳐스 제공
박광수 감독은 1990년대 대표적인 사회파 감독으로 코리안 뉴웨이브를 이끌었다. 아이엠픽쳐스 제공

 ◇영화로 풀어낸 분단과 노동 문제 

박 감독의 장래 희망은 원래 영화가 아니었다. 어머니의 손을 잡고 극장을 드나들었고 조긍하 감독의 ‘순정의 문을 열어라’(1958)에 아역으로 출연하기도 했지만 스스로도 “그 경험이 나중에 영화감독 할 때 영향을 준 것 같진 않아요”라 할 만큼 큰 의미를 두진 않았다.

강원 속초에서 태어나 중학교까지 마친 그는 부산의 고등학교에서 미술반으로 활동한다. 자연스럽게 예술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백남준과 앤디 워홀의 작품에서 강한 인상을 받았다고 한다. 조형의 아름다움 보다는 작품이 담고 있는 컨셉트를 중시하는 현대 미술에 이끌린 그는 철학 서적을 탐독하면서 인문학적 교양을 쌓아나갔고, 서울대 미대 조소과에 진학하는 것으로 진로를 잡았다.

미술 작업을 이어가는 것에 대한 회의감을 느낄 무렵, 우연히 대학신문을 들춰본 것이 인생의 전환점이 되었다. 1979년 결성된 국내 최초의 대학 영화연구회 ‘얄라셩’의 회원 모집 기사를 보고 얄라셩에 들어간 박 감독은 뒷날 ‘장미빛 인생’(1994)을 찍는 김홍준 감독과 함께 단편영화를 여럿 작업하게 된다.

1982년 3월, 졸업으로 학교를 떠나게 된 얄라성 멤버들과 동서영화연구회에서 활동하던 전양준(현 부산국제영화제 집행위원장) 등 주한 문화원을 다니면서 가까워진 사람들을 모아 서울영화집단을 결성, ‘넘버 3’(1997)의 송능한 감독과 함께 주축으로 활동한다. 십시일반으로 번역료와 원고료를 모아 남영동에 사무실을 마련한 서울영화집단은 8㎜ 다큐멘터리 ‘수리세’(1984)와 ‘파랑새’(1986) 등을 제작하며 민중영화 운동의 산실이 된다.

다양한 작품을 접할 기회가 드물었던 국내 환경에 답답함을 느꼈던 박 감독은 1983년 프랑스 E.S.E.C.(영화교육특수학교)로 유학을 떠난다. 파리에 체류하면서 80여 개국의 수많은 작품을 섭렵한 그는 기존 문법에서 벗어난 영화의 새로운 가능성을 확인하게 된다. 2년간의 유학을 마치고 귀국하는 비행기를 탄 그는 김포공항에 착륙하기 전 이상한 광경을 목격하게 된다. “여기가 한국 맞나? 잠시 착각했어요. 전혀 못 보던 풍경이었으니까요.” 아파트 단지로 뒤바뀐 강남 지역을 내려다보고 충격 받은 그는 ‘이장호의 외인구단’(1986), ‘나그네는 길에서도 쉬지 않는다’(1987)의 연출부 생활을 하면서, ‘강남 고층 아파트에서 유리창 닦는 사람들이 들여다보는 풍경’과 ‘서울의 밤과 낮에 대한 이야기’로 시나리오를 준비한다.

이때 연우극단의 이상우 연출가가 대만의 단편 소설 ‘두 페인트공’을 희곡으로 각색해 화제를 끌고 있었다. 연극을 본 박광수는 이를 원작 삼아 데뷔작 ‘칠수와 만수’(1988)를 만들게 된다. 좌익 경력의 비전향 장기수인 아버지와 연좌제로 엮인 탓에 중동에 돈 벌러 가려는 시도가 좌절된 칠수(안성기), 동두천 양공주 출신의 어머니 탓에 편견에 시달리는 만수(박중훈)가 주인공인 영화다. 페인트칠을 하다 고층건물 옥상에 갇힌 이 두 사람의 이야기는 서울 올림픽 개최로 한껏 부풀어있던 한국 사회의 구조적 모순을 겨냥하고 있었다. ‘칠수와 만수’로 박 감독은 이듬해 국내의 신인감독상을 휩쓸었고 스위스 로카르노국제영화제에서 젊은 평론가 상을 받았다.

영화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1995)은 노동법 준수를 외치며 분신한 전태일의 삶을 그린다.
영화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1995)은 노동법 준수를 외치며 분신한 전태일의 삶을 그린다.

이후에도 박 감독은 금기시되어 온 정치적 소재를 현대적인 영화 미학과 회화적 미장센에 접목하는 시도를 거듭했다. 낙후된 탄광촌의 현실과 지식인 운동가의 초상을 그려 제12회 낭트3대륙영화제 심사위원특별상을 수상한 ‘그들도 우리처럼’(1990), 동독에 입양된 한국인 남매의 갈라져버린 인생 행로를 통해 분단현실과 해외입양의 문제를 다룬 ‘베를린 리포트’(1991)를 연달아 내놓았다.

박광수 필름의 창립작 ‘그 섬에 가고 싶다’(1993), 7,600여명의 모금으로 2억5,000만원을 마련해 제작된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1995)을 통해 각각 분단 이데올로기와 한국 노동운동의 기원을 거슬러 올라갔다. 사회파 작가 박광수의 비판적 문제의식은 30억원의 제작비를 들여 흥행 실패의 고배를 마신 대작 ‘이재수의 난’(1998)에까지 연연히 이어진다.

장선우 감독은 '성공시대'와 '우묵배미의 사랑'으로 한국적 리얼리즘의 한 축을 구축하는 한편, '나쁜 영화'와 '거짓말'로 충무로 전위에 서기도 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장선우 감독은 '성공시대'와 '우묵배미의 사랑'으로 한국적 리얼리즘의 한 축을 구축하는 한편, '나쁜 영화'와 '거짓말'로 충무로 전위에 서기도 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리얼리즘에서 한국영화 전위로 

장선우 감독의 초반경력은 파란만장했다. 고등학교 1학년 때부터 서클 활동을 하다가 자퇴한 그는 서울대 인류학과에 입학해서는 독일 철학과 마당극 놀이에 몰두하며 학창 시절을 보냈다. 1975년 유신체제와 긴급조치에 항의한 김상진 열사의 할복 사건이 벌어지고선 이듬해, 장 감독은 1주기 추모 집회를 주도하다가 체포되었고, 집행유예를 선고받은 뒤 바로 군에 입대했다. 제대 후 한동안 독서신문과 소설문학의 편집부에서 일하던 그는 복학하자마자 다시 마당극을 하며 민중문화 운동에 투신했다가 구속되어 감옥에서 6개월 옥살이를 한다.

명보극장에서 이장호의 ‘바람불어 좋은 날’(1980)을 본 장 감독은 곧바로 충무로로 뛰어들었다. 대중적 파급력이 큰 영화에서 사회변혁의 가능성을 보았던 것이다. ‘그들은 태양을 쏘았다’(1982)의 각본을 집필했고, ‘바보 선언’(1984)의 연출부로 들어가 현장 실무를 익혔다.

방송국 PD로 일하던 선우완과는 MBC ‘베스트셀러 극장’의 단막극 20편의 각본을 쓰면서 동료가 되어 ‘서울예수’(1986)를 공동연출하며 감독으로 데뷔했지만, 영화는 개신교계의 반발로 ‘서울황제’라 제목을 바꿔서 개봉했고, 흥행에도 실패했다. 이 무렵 그는 월간지 뿌리 깊은 나무와 마당에 신랄한 영화평을 기고하면서 대안적인 영화미학을 고민한 영화평론가이기도 했는데, 본명은 장만철로 필명 ‘선우’는 선우완의 성에서 따온 것이었다.

식품업계 라이벌 미원과 제일제당 간에 벌어진 ‘조미료 전쟁’에서 소재를 얻은 블랙 코미디 ‘성공시대’(1988)는 안성기가 분한 김판촉, 이혜영이 연기한 성소비 등, 등장인물의 이름에서부터 드러나듯, 자본주의 사회의 이면에 드리운 인간 소외와 물신화의 문제를 풍자적으로 다루고자 한 의도의 산물이었다. 영화는 서울관객 10만7,000명의 관객을 모으며 비평과 흥행 양면에서 모두 성공한다.

정지영 감독의 ‘남부군’(1990) 시나리오를 작업한 이듬해, 장 감독은 ‘우묵배미의 사랑’(1990)을 내놓으며 일대 변신을 꾀한다. 전통적인 멜로 드라마의 문법을 바탕에 깐 이 작품에서 장선우는 이전의 표현주의적 과장과 우화적 성격을 버리고 도시화와 산업화의 여파에 내몰린 민중의 삶을 담담히 관조해 한국영화 리얼리즘의 새 지평을 열었다.

장선우 감독은 영화 '꽃잎'(1996)으로 한국 상업 영화 최초로 광주 민주화 운동을 다룬다.
장선우 감독은 영화 '꽃잎'(1996)으로 한국 상업 영화 최초로 광주 민주화 운동을 다룬다.

‘경마장 가는 길’(1991)은 극적인 줄거리 없이 익명화된 두 사람 R과 J의 일상적인 만남과 헤어짐을 반복적으로 보여준다. ‘너에게 나를 보낸다’(1994)와 더불어 지식인의 나약함과 속물 근성을 비춘 이 영화는 80년대 지식인의 사회 개혁과 계몽에 대한 믿음을 깨버린 90년대 포스트 모더니즘의 첨병이었다.

이후 장 감독의 필모그래피는 급진적인 실험과 센세이션의 연속이었다. 난해한 구성의 종교영화 ‘화엄경’(1993)으로 베를린영화제에서 알프레드 바우만상을 수상했고, 흑백 영상과 애니메이션, 갖가지 시청각적 효과를 동원한 전위적인 기법으로 한 소녀의 심리를 파고들어 광주의 역사를 소환한 ‘꽃잎’(1996)을 내놓았다.

페이크 다큐멘터리를 시도한 ‘나쁜 영화’(1997), 프랑스 상황주의 영화의 형식을 도입한 ‘거짓말’(2000)까지 장 감독은 한국영화의 전위에 선 존재였다. 그러나 ‘충무로의 대재앙’으로 회자되는 ‘성냥팔이 소녀의 재림’(2002)의 실패로 그는 자신의 시대를 순식간에 마감했다. 코리안 뉴웨이브가 사양길로 접어들고, 한국영화에는 다시 세대교체의 물결이 밀어닥치고 있었다.

조재휘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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