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6.5℃’는 한국일보 중견 기자들이 너무 뜨겁지도 너무 차갑지도 않게, 사람의 온기로 써 내려가는 세상 이야기입니다.
그날 청평호는 파랬다. 늦겨울 햇살에 수면이 반짝였고, 마른 공기는 맑고 차가웠다. 개신교가 이단으로 찍은 종교단체 ‘신천지예수교증거장막성전’의 대표 이만희씨는 올해 한국 나이로 아흔이다. 아마 중국에서 왔을 ‘코로나19’라는 돌림병을, 샛눈을 피하려 일단 신앙을 숨긴 그의 신도들이 국내에 퍼뜨렸다는 게 세간의 질타다.
그를 기다리던 참이었다. 자기는 병에 걸리지 않았다는 사실을 안 2일, 그는 거처인 청평 ‘평화의 궁전’으로 기자들을 불렀다. “인간은 이다지도 슬픈데, 주여 바다는 너무나 파랗습니다.” 엔도 슈사쿠 소설 ‘침묵’(1966)의 사제는 말없는 절대자를 향해 절규한다. 비슷한 기분이었던 것 같다.
북한강을 끼고 있는 신천지의 아성은 음습하지 않았다. 방역을 위해 더 철저히 소독했을 터였다. 마스크로 입도 꽁꽁 틀어막았다. 그런데도 회견에 다녀오자마자 나는 더욱더 깨끗이 씻었다. 과학에 근거한 예방 차원 행동이라 여겼다. 경기지사가 ‘시설 폐쇄’를 명한 곳이다. 바이러스를 털어내야 했다.
하지만 주술적인 종교 의식 같은 거였을지도 모른다. 오염되기 전부터 원래 신천지가 더럽다는 신념을 내가 갖고 있었으면 가능한 일이다. 뉴스에 이런 댓글도 달렸다. “코로나19가 폭발적으로 늘어난 건 바이러스 같은 그들의 전도 방식 때문이다. 그 방법을 이만희가 지시했고 신도들 각자가 정말 바이러스를 품게 돼버렸다.”
‘신천지가 바이러스’라는 연상은 유사성에서 비롯된다. 어떻게든 자신을 확장하려 한다는 점에서 둘은 닮았다. 그러나 그건 우연이다. 필연적인 인과관계 따위는 당연히 없다. 초상화 같은 그저 묘사인 도상(圖像)이 피사체의 실존을 증명해주는, 가령 사진 같은 지표(指標)가 아닌 것과 마찬가지다. 은유를 정말이라 믿는 건 중세적 사고다.
진심인지 확실치 않지만 신천지는 사과했다. 드러난 정황상 그들이 바이러스의 확산을 방치했거나 아예 일부러 살포했으리라 짐작하기는 어렵다. 신천지는 물론 색출해 검사하고 필요하면 격리해야 할 ‘감염원’이다. 다만 불에 태워 죽일 ‘마녀’는 아니다. 희생양 만들기는 전근대 종교의 야만적인 광기였다.
‘신천지 혐오’는 애초부터 존재했다. 일반인에게 신천지는 제도 종교와 달리 터무니없고 형편없다. 진위야 따져봐야겠지만 신천지 탓에 가출한 딸이 더 이상 집에 발을 못 들이는 건 신천지가 놓아주지 않아서가 아니라 부모가 받아주지 않아서인 경우도 많다는 게 신천지 측 얘기다. 궁전을 마련한 김에 박물관도 인근 어디에 지어보려 추진하다 기대를 접은 건 혐오 시설을 들일 수 없다는 가평군민의 거센 반발을 넘지 못해서였다.
총선이 코앞이다. 민심은 흉흉하다. 야권은 왜 일찌감치 중국인을 막지 않아 일을 키웠냐며 정부ㆍ여당을 맹공 중이다. 전략적이다. 중국에서 귀국하는 한국인까지 내치지 못할 바에야 딱히 소용 없었을 거라는, 복잡할 것도 없는 추론은 무시된다. 사실이든 아니든 ‘친중 종북 정권’은 현 정부의 다른 이름이다. 미운 놈 그럴 줄 알았다는 빈축의 핑계가 생겼을 뿐이다.
선거를 말아먹지 않으려면 여권도 책임을 떠안을 수 없다. 마침 사고 친 게 만만한 신천지다. 자유든 인권이든 예외로 둬도 된다. ‘신천지 축출교’는 ‘중국 봉쇄교’와 동종의 정치 종교다. 정치권 각 진영이 자기 이해에 맞춰 맹신과 혐오를 부추기고 있는 셈이다.
‘궁전’이라는 이름이나, 대문 앞 사자(獅子)상이나, ‘사자 조심’ 팻말이나, 바깥문 목각병정이나 그 조악함이 ‘키치’(싸구려)라 부르기도 민망할 정도다. 엉터리 같은 종교에 빠진 신도들의 사정도 한 번 헤아려봤으면 싶다. 아무래도 신천지가 간절한 이는 실제 선민(選民)보다 선민을 꿈꾸는 약자이기 십상이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건 혐오가 아니라 연민이다.
권경성 문화부 기자 ficciones@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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