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것도 끝나지 않았다. 치열하게 적어낸 이 기록으로 나의 고통스러운 상황이 끝날 수 있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2018년 대한민국을 충격과 경악에 몰아넣은, 성폭력 피해 생존자 김지은이 책을 냈다. ‘김지은입니다’는 그가 세상을 향해 두 번째로 낸 고발장이다. 그 해 3월 5일 폭로가 첫 번째 고발장이었다면, 이번 두 번째 고발장은 지난해 9월9일 대법원이 안희정 전 충남지사에 대한 유죄 확정 판결을 내린 뒤 나온 셈이다. 가해자에 대한 처벌이 마무리되면서 법적 투쟁은 끝났으나, 다시 한번 고발장을 내는 이유는 피해자의 삶이 여전히 미투(#MeToo) 이전으로 되돌아가지 못해서다.
폭로, 수사, 재판, 그리고 확정판결 이후에까지 세상은 김지은에게 계속해서 되물었다. “여러 번 당하는 데도 왜 가만히 있었냐.” “더 적극적으로 거부 의사를 왜 밝히지 않았느냐.” “같이 좋아했던 것 아니냐.” 그런 말들이 계속 김지은 주변을 맴돌았다.
책은 이 모든 것에 대한 김지은의 답변이다. 피해 사실을 처음 세상에 공개한 이후 안 전 지사가 유죄 확정 판결을 받기까지 554일간 가슴 속에만 꾹꾹 담아뒀던 이야기 일체를 본인이 직접 정리했다. ‘위력에 의한 성범죄’가 어떻게 발생했고, 왜 한동안 드러내지 못했으며, 죽을 힘을 다 해 폭로한 뒤에도 이해받지 못한다는 사실이 어떤 좌절감을 안기는지, 그 고통의 시간들을 절절하게 토해냈다.
김지은은 안 전 지사의 말 한마디에 일자리도 잃고, 사회적으로도 매장당할 수 있는 일개 비정규직 노동자였다. 평판으로 먹고 사는 정치권, 조직을 배신하면 죽음뿐이라는 동료들 사이에서 이미 제왕적 권력에 취한 차기 유력 대선주자 안 전 지사는 존재 자체가 위력이었다. 24시간 대기상태에서 안 전 지사 개인의 심기뿐 아니라 가족의 일거수일투족까지 챙겨야 하는 김지은은 사실상 노예, 몸종과 다름 없었다.
기본적 인권과 노동권조차 논의될 수 없던, 위력이 일상화된 세계에서 성폭력은, 어쩌면 별 것 아닌, 손쉬운 일이었을 지도 모른다. 청와대 주인이 되고자 맹렬히 달려가는 안 전 지사와 그 무리들이 외치는 ‘대의’ 앞에서, 한 비정규직 노동자의 저항이나 비명은 아무 것도 아니었다. 김지은은 그 무리들에게서 벗어나지 못하면 죽을 것 같아서, 한편으론 또 다른 피해자를 막기 위해 미투를 결심했다고 말한다.
하지만 사람들은 미투를 미투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김지은을 일러 ‘사생팬’ ‘이상한 여자’라 부르는 말들이 나돌았다. 안 전 지사 측 조직적 음해에 재판부도, 여론도 흔들렸다. 유죄 확정 판결이 난 지금도 여전히 ‘불륜 아니냐’고 말하는 이들이 있는 걸 보면, 성폭력 사건에서 피해자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프레임이 얼마나 지독한지 실감할 수 있다.
미투 이후 김지은은 “투명인간이 되기를 꿈꿨다”고 할 만큼 자신의 존재 자체를 힘겨워 했고, 부정했다. 자해, 신경쇠약, 자살시도가 이어졌지만, 결국 그는 살아남기로 했다. 이대로 죽어버리면 거짓이 버젓이 진실로 둔갑하는 걸 막을 수 없을 테니 반드시 살아야만 한다고 다짐했다. 다시 일어선 김지은은 거듭 강조한다. 위력에 갇혔던 김지은의 목소리가 널리 기억되는 것이야말로 지금도 무수히 존재할 ‘김지은들’에 대한 가해를 멈추는 길이라고.
김지은입니다
김지은 지음
봄알람 발행ㆍ384쪽ㆍ1만7,000원
“아무리 힘센 권력자라도 자신이 가진 위력으로 인간이 인간을 착취하는 일이 두 번 다시 일어나지 않도록 해주십시오. 막대한 관계와 권력으로 진실을 숨기는 행위가 반복되지 않도록 법의 지엄함을 보여주십시오. 그래서 다시는 미투를 고민해야 하는 사람이 이 땅 위에 나오지 않도록 하여주십시오. 간절히 간절히 부탁드립니다.”
김지은이 쓴 항소심 최후진술서다. 목숨과 인생을 건 그의 미투로 인해 우리 사회는 위계와 위력에 의한 성폭력, 직장 내 갑질, 인권 유린 문제를 각인했다. 더디더라도 이를 해결하기 위해 조금씩 전진하고 있다.
그렇다면 김지은의 삶도 나아져야 하지 않을까. 김지은을 일상으로, 미투 이전의 삶으로 되돌려놓는 건 이제 우리의 몫이 아닐까. 김지은이 단순히 살아남는 걸 넘어, 새로운 삶을 꿈꿀 수 있기를 응원한다. 응원은 김지은 개인 뿐 아니라, 이 땅의 수많은 ‘보통의 김지은들’을 위한 것이기도 하다.
강윤주 기자 kkang@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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