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콜드케이스]아일랜드서 숨진 佛 프로듀서, 그녀의 크리스마스는 누가 앗아갔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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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콜드케이스]아일랜드서 숨진 佛 프로듀서, 그녀의 크리스마스는 누가 앗아갔나

입력
2020.03.20 0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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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소피 토스캉 뒤 플랑티에 살해 사건 

 새 영화 구상 위해 홀로 별장에 

 성탄 이브 전날, 잔혹한 시신으로 

 초동 수사 실패… 23년 동안 미제 

 ※‘콜드케이스(cold case)’는 오랜 시간 미해결 상태로 남아 있는 범죄사건을 뜻하는 말로, 동명의 미국 드라마로도 잘 알려져 있습니다. <한국일보>는 격주 금요일 세계 각국의 미제사건과 진실을 쫓는 사람들의 노력을 소개합니다. 

1996년 아일랜드에서 일어난 프랑스 여성 소피 토스캉 뒤 플랑티에 살인 사건은 23년이 흐른 지금까지도 범인을 찾지 못하고 있는 미제사건이다. 사진은 날짜가 알려지지 않은 채 프랑스 남부 콤브레 마을에서 찍힌 소피 토스캉 뒤 플랑티에의 모습. 콤브레=AFP 연합뉴스

1996년 크리스마스를 이틀 앞둔 12월 23일. 아일랜드 수도 더블린에서 남서쪽으로 3시간가량 달리면 닿는 아름다운 항구도시 코크의 작은 마을 스컬이 난데없이 ‘섬뜩한 범죄 현장’이라는 낯선 꼬리표를 달았다. 지난 수십년간 단 한 건의 살인도 일어나지 않았던 이 한적한 시골마을에서 39세의 프랑스 영화 프로듀서 소피 토스캉 뒤 플랑티에가 이른 아침 구타당한 시신으로 발견됐다. 그는 5년 전 이 곳에 별장을 마련한 뒤 가족이나 친구와 매년 두세 차례씩 시간을 보냈다. 새 영화 구상과 휴식을 겸해 처음으로 홀로 별장을 찾았던 토스캉 뒤 플랑티에는 이날 얼굴을 알아볼 수 없을 정도의 부상을 입고 숨진 채 별장 인근에서 발견됐다. 철조망에 걸려 찢긴 나이트가운 차림이었다. 그가 사력을 다해 폭행에 맞서 도망치려 했음을 암시하듯 한쪽 주먹에는 뜯긴 머리카락이 꽉 쥐어져 있었다. 토스캉 뒤 플랑티에는 사건 전날 밤 프랑스 영화계의 전설적 프로듀서인 남편 다니엘에게 전화해 크리스마스 이브에 프랑스로 돌아갈 계획을 알린 것으로 사후에 밝혀졌다. 프랑스로 돌아가 남편과 오붓하게 크리스마스를 보내려 했던 토스캉 뒤 플랑티에는 다시는 집으로 돌아갈 수도, 크리스마스를 기념할 수도 없게 됐다.

‘켈틱 타이거(Celtic Tiger)’로 불릴 정도의 고도 경제 성장기였던 1996년의 아일랜드는 범죄 비중이 그리 크지 않았다. 당시 아일랜드 법무장관은 코크가 속해 있는 먼스터주(州)에 전담 병리학자가 배치돼야 한다는 요청을 거듭 무시했다. 더블린에서 파견된 병리학자가 도착하기를 기다려야 했던 아일랜드 경찰은 사건 현장 보존에 실패했다. 더블린에서 코크까지 차로 3시간, 다시 코크 중심가에서 스컬 마을까지는 2시간이 더 소요되는 먼 거리다. 꼬박 하루 동안 사건 현장은 그대로 방치됐고 차갑게 식어버린 시신의 정확한 사망시간 추정조차 쉽지 않았다. 아일랜드 경찰은 초동수사 실패로 뚜렷한 단서를 포착하지 못했다. 경찰은 이내 법의학적 증거 찾기를 포기하고 이듬해 2월 증인 진술에 의존해 용의자를 특정해 체포했다. 별장 인근에 살던 프리랜서 기자 이안 베일리였다. 하지만 베일리는 무혐의로 풀려났다. 경찰이 첫 단추를 잘못 꿰면서 이 사건은 23년이 흐른 지금까지도 범인을 밝히지 못한 미제사건으로 남아 있다.

지난해 12월 16일 이안 베일리가 프랑스 영화 프로듀서 소피 토스캉 뒤 플랑티에 살인 사건에 대한 프랑스 당국의 유럽체포영장 발부와 관련해 더블린 고등법원이 이를 승인한 후 법원을 빠져 나가고 있다. 더블린=AFP 연합뉴스

◇“취재였을 뿐”… 유력 용의자 이언 베일리의 등장

영국 맨체스터 출신의 기자 베일리는 1991년부터 토스캉 뒤 플랑티에의 별장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살고 있었다. 그는 사건 발생 즈음 현장에 나타난 게 목격돼 용의선상에 올랐다. 아일랜드 매체 선데이 트리뷴에서 프리랜서로 활동 중이던 베일리는 취재 목적으로 그 곳을 찾았다고 해명했다.

아일랜드 경찰은 사건 현장에서 베일리와 일치하는 DNA를 채취하지 못했지만 그의 유죄를 확신했다. 여성을 상대로 한 그의 폭력 전과 때문이다. 후에 공개된 베일리의 일기에 따르면 그는 1993년과 1996년에 “사실 죽이고 싶었다”며 여자친구 쥘 토마스를 폭행한 사실을 상세히 기록해 뒀다.

무엇보다 스컬 마을에서 아이스크림 전문점을 운영하는 여성 마리 파렐의 진술이 결정적이었다. 파렐은 사건 당일 오전 3시 현장과 가까운 곳에서 베일리를 목격했다고 주장했다. 또 베일리가 당시 선데이 트리뷴 편집장에게 “기자 커리어를 위해 토스캉 뒤 플랑티에를 죽였다”고 말한 사실도 드러났다. 물론 그는 경찰 조사에서 “농담이었다”고 해명했다. 베일리는 무언가에 긁힌 듯한 자신의 손과 얼굴의 상처에 대해서도 “크리스마스 트리용 나무와 칠면조를 자르다 생긴 것”이라고 비켜갔다. 그를 살인 혐의로 기소할 만큼의 충분한 증거를 확보하지 못한 아일랜드 검찰은 곧 그를 석방했다. 이 때까지만 해도 베일리는 법원을 20년 넘게 들락날락하게 될 자신의 운명을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증거 불충분해도… ‘24년째 용의자’

베일리는 1998년 1월 한 차례 더 체포됐다가 또다시 무혐의로 석방됐다. 이번에는 베일리를 용의자로 모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파렐이 진술을 번복했다. 파렐은 이전 진술이 경찰의 압박에 따른 것이었다고 주장했다.

베일리의 곤혹스러운 상황은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토스캉 뒤 플랑티에 살인 사건은 아일랜드와 프랑스의 국제적 스캔들로도 비화됐다. 유족의 요구로 2008년 프랑스 사법당국이 나서면서 베일리는 다시 용의선상에 올랐다. 프랑스 형법은 피의자 국적에 관계없이 전 세계 어디서나 프랑스 시민을 살해한 혐의를 받는 사람을 자국 법원에 기소할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다. 프랑스는 ‘유럽 체포영장’ 제도를 앞세워 아일랜드에 베일리의 송환을 요구했다. 그러나 아일랜드 법원은 2012년과 2017년에 베일리의 프랑스 송환 불가 판결을 잇따라 내렸다.

프랑스 정부는 집요했다. 줄곧 살인 혐의를 부인한 베일리의 항변에도 프랑스 측은 지난해 5월 피고인 없이 진행되는 궐석재판을 진행한 뒤 그에게 25년형을 선고했다. 프랑스 법원은 다시 한번 유럽 체포영장을 발부했고 지난해 12월 더블린 고등법원은 결국 이를 승인했다. 또다시 체포된 베일리는 일단 보석으로 풀려났다. 송환 관련 심리는 오는 5월 5일부터 사흘간 열리는 것으로 잠정 결정됐다. 현재 63세인 베일리는 변호인을 통해 “아일랜드 법무장관이 자국 시민을 박해하는 외국 사법부의 지속적인 시도를 진전시키고 있다”면서 “내가 무덤에 가거나 아니면 프랑스 감옥에서 생을 마감해야 사건이 끝날 것”이라고 항변했다.

◇이혼 경력 피해자를 둘러싼 음모론

물론 베일리만 의심을 받은 건 아니다. 얼추 40~50명이 용의자 목록에 이름을 올렸다. 토스캉 뒤 플랑티에는 다니엘과 결혼하기 전 한 차례 이혼을 경험했다. 이혼 여성에 대한 편견 때문인지 그의 죽음을 치정 문제로 풀이하려는 시각도 많았다. 수사 과정에서 한 때 내연 관계였던 프랑스 화가 브루노 카르보네도 소환됐다. 카르보네는 “토스캉 뒤 플랑티에와의 인연은 1993년에 끝났고 스컬 별장에서 함께 시간을 보낸 것도 이 때가 마지막이었다”고 경찰에 진술했다.

카르보네는 용의자 명단에서 빠르게 사라졌지만, 이번엔 아내의 불륜을 알게 된 남편 다니엘이 제3자를 통해 아내를 살해했다는 ‘음모론’이 불거졌다. 이혼 절차를 밟던 중 재산분할 문제로 부부의 갈등이 깊어졌다는 구체적인 정황에 대한 뒷말까지 나왔지만 결국은 이 모두가 사실무근으로 밝혀졌다.

토스캉 뒤 플랑티에의 사망은 많은 것을 바꿔 놓았다. 아일랜드 남부 해안의 평온한 도시 코크는 범죄 스캔들의 무대로 20년 넘게 하루가 멀다 하고 아일랜드 언론의 헤드라인을 장식했다. 사건 내용은 팟캐스트와 영화로도 만들어졌다. 기자인 샘 번게이와 다큐멘터리 프로듀서 제니퍼 포르데는 2018년 팟캐스트 ‘웨스트 코크’에 이어 내년에는 ‘어 굿 서스펙트’라는 책도 내놓을 예정이다. 아일랜드 거장 감독 짐 쉐리단은 5년간 400시간 넘게 촬영한 사건 관련 다큐멘터리를 조만간 공개한다. 부실한 초동수사로 터무니 없는 상황의 원인을 제공한 아일랜드 경찰의 형편 없는 치안 능력도 다시금 도마에 올랐다.

베일리는 프랑스에서 25년형을 선고 받았고 프랑스로 인도될 가능성도 있지만 아일랜드에선 자유인이다. 그러나 서로 집안 사정까지 속속들이 아는 작은 시골마을에서 그는 이미 이웃들에게 유죄 판결을 받은 것과 다름 없는 처지다. 미 CNN방송은 “작은 동네에서 미제사건은 공공연한 골칫거리”라며 “베일리가 유죄가 된다 해도 그를 (이 곳에서) 내보낼 수 없다면 아무것도 변하지 않을 것”이라는 한 이웃 주민의 말을 전했다.

김소연 기자 jollylife@hankookilbo.com

그래픽=송정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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