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유사는 한국에만 속한 책이 아니라 세계적인 보물이에요. 문학, 종교사, 불교철학, 언어가 총망라된 걸작 중에 걸작이죠.”
고려의 승려 일연이 충렬왕 7년에 편찬한 삼국시대 역사서 ‘삼국유사’는 김부식의 ‘삼국사기’와 더불어 고대사 연구에 가장 중요한 자료로 꼽힌다. 정작 한국인 중에도 직접 읽어 본 이는 드물 텐데, 이게 이탈리아어로 번역됐다. 한국문학번역원의 지원을 받아 삼국유사 이탈리아어판을 번역한 마우리찌오 리오또(61) 교수를 최근 한국일보사에서 만났다.
로마국립대에서 한국고대사로 박사학위를 따고 나폴리 동양대학에서 29년간 한국어문학을 가르쳐온 리오또 교수는 유럽 내 1세대 한국학 전문가로 꼽힌다. ‘구운몽’ ‘춘향전’ 같은 고전부터 이문열의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 같은 현대문학까지 다양한 한국 작품을 번역해왔다.
삼국유사 번역은 그런 리오또 교수에게도 오랜 숙제였다. 삼국유사 판본 중 가장 완전하다는 1512년 중종임신본(中宗壬申本)을 저본으로 삼은 첫 번역이다. 동시에 1987년 시작된 이탈리아 카로치 출판사 중세학 시리즈에 한국 고전 가운데 처음으로 포함됐다.
2014년 시작된 이번 번역에는 5년이 걸렸다. 원문이 어려워서이기도 하지만, 저자인 일연의 오류 또한 함께 잡아내서다. 산스크리트어를 잘 몰랐던 일연이 불교철학 관련 개념을 옮기면서 원문을 잘못 읽은 경우가 많았다. 리오또 교수는 “신라 때 인도기행문인 ‘왕오천축국전’을 쓴 혜초 같은 인물도 있었는데, 일연이 활동한 고려부터 그런 왕래가 끊겼다”며 “국제적 국가였던 한국이 고려, 조선시대를 거치며 점차 우물 안 개구리가 되어 간 게 아쉽다”고 했다.
‘우물 안 개구리’라는 비판은 지금 한국 인문학에도 적용된다. 그가 보기에 지금 한국 인문학의 국제적 감각은 삐뚤어져 있다. 케이팝과 한류 열풍에도, 정작 학문적 실속은 없다고 지적했다. 리오또 교수는 “해외서 한국학과에 지망하는 학생이 늘어난 건 사실이지만 대부분 1, 2년간 한국어만 배우고 끝난다”며 “아무리 케이팝이 중요하다 해도 관련 논문이나 국가 지원마저 모두 케이팝에 쏠리는 상황에서 학문적으로 확장될 여지는 없다”고 지적했다.
‘케이팝 논문’이 흥하는 것은 유행만 따라가는 한국 인문학의 또 다른 문제를 보여준다. “한국에서는 학문이 정치나 정책과 너무 깊이 연관돼요. 실크로드가 유행한다니까, 코리안 디아스포라가 유행한다니까, 그때그때 죄다 그 공부하고 논문 쓰고 그래요. 그런데 학문의 기반은 고전이에요. 이탈리아에는 고전고등학교가 따로 있어서 여기서 라틴어, 그리스어 등을 배워서 고문헌 연구를 할 수 있는 기반을 다져요. 한국에도 고전 문헌이 많은데, 이걸 깊게 연구할 인재를 미리 길러낼 필요도 있어요.”
이런 쓴소리는 한국에 대한 깊은 애정에서 나온다. 리오또 교수는 이탈리아 매체와 인터뷰할 때마다 ‘북한’과 ‘케이팝’에 대한 질문만 받는다. 그것 말고도 한국에는 다른 훌륭한 문화가 많다고 힘주어 강조하느라 바쁘다. 하지만 잘못은 한국에도 있다. “외국에서 치러지는 한국 행사에 가보면 수십 년째 똑같은 판소리만 공연하고 있어요. 근데 한국에는 다른 흥미로운 문화가 정말 많거든요. 외국인이 궁금해할 거라 미리 생각해서 그것만 고집하는 한국을 보면 답답합니다.”
리오또 교수는 지난해 11월 나폴리 동양대학에서 은퇴했다. 그 뒤 한국으로 넘어와 안양대 인문한국플러스사업단에 둥지를 틀었다. 여기서 비교문학을 연구하는 한국 제자를 길러내는 게 새로운 목표다. “과거 인도로 향했던 스님들이야말로 비교문화학의 실천자였습니다. 인문학은 고립되면 발전이 없어요. 외국 학자들과의 교류가 더 활발해져야 해요. 과거와 타인을 알아야만 현재를, 나를 이해할 수 있고, 미래를 준비할 수도 있습니다.”
한소범 기자 beom@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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