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29일(현지시간) 미국과 아프가니스탄 무장조직 탈레반이 체결한 역사적 ‘평화합의’가 서명 문서의 잉크도 마르기 전에 누더기로 전락할 위기에 놓였다. 탈레반이 합의 이틀 만에 아프간 정부군에 대한 공격을 재개하자 아프간 주둔 미군도 방어를 명분으로 맞불 공습에 나섰다.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까지 직접 나서 탈레반을 달랬지만 어렵사리 구축한 평화가 점점 좌초되는 분위기다.
아프간 주둔 미군 대변인인 소니 레깃 대령은 4일 트위터를 통해 “미군이 이날 아프간 남부 헬만드주에서 아프간 국가방어보안군(ANDSF) 검문소를 맹렬히 공격하던 탈레반에 대응 공습을 단행했다”고 밝혔다. 그는 “미군의 탈레반 공습은 11일 만에 처음”이라며 ‘방어 차원’의 대응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탈레반도 2일부터 아프간 곳곳에서 아프간 정부군을 향해 공격을 재개했다. 전날 나스랏 라히미 아프간 내무장관은 “지난 24시간 동안 탈레반이 아프간 34개 지방 중 16곳에 33건의 공격을 퍼부었다”며 합의 위반이라고 강하게 반발했다. 반면 자비훌라 무자히드 탈레반 대변인은 “국제동맹군이 아닌 아프간군에 대한 무력 행사는 정상적인 작전”이라고 반박했다. 미군 등을 겨냥하지 않았기 때문에 평화합의 위배는 아니라는 논리다.
그러나 미국은 정부군을 상대로 한 공격 행위도 합의에 어긋난다는 점을 명확히 했다. 레깃 대령은 “탈레반 지도부는 폭력 수준을 낮추고 공격을 늘리지 않겠다고 국제사회에 약속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우리는 평화를 추구하지만 필요 시 언제든 동맹 방어에 나설 것”이라며 무력 동원이 지속될 수 있음을 시사했다.
전날까지만 해도 트럼프 대통령은 2001년 9ㆍ11 테러 이후 미국 대통령으로는 최초로 탈레반 지도부와 접촉하는 등 합의 불씨를 꺼뜨리지 않으려 애쓰는 모습이었다. 그는 3일 백악관에서 취재진에게 “오늘 물라 압둘 가니 바라다르 탈레반 지도자와 통화했다”며 “좋은 대화를 했고 폭력이 사라져야 한다는 데 동의했다”고 밝혔다. 백악관은 성명을 통해 “아프간 정부와의 내부 협상에 신속히 착수할 것을 탈레반에 촉구했다”고 구체적 통화내용도 전했다.
하지만 균열 조짐은 합의 직후부터 나타났다. 합의문대로라면 양측은 10일부터 항구적인 정전을 목표로 정치협상을 시작해야 하나, 논의에서 배제된 아프간 정부는 대화 개시의 전제 조건인 포로교환을 수용할 수 없다고 버티고 있다. 아슈라프 가니 대통령은 “중요 협상 카드를 권한도 없는 미국이 내어줬다”고 불만을 표시했다. 탈레반도 “수감된 대원 5,000명을 먼저 석방하지 않으면 아프간 내부 정파 간 대화는 없다”고 못을 박은 상태이다.
강유빈 기자 yubin@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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