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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리에 꼬리를 무는 영화] 역병의 시대, 보이지 않는 것의 공포

입력
2020.03.11 04:30
2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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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컨테이젼'(2011)은 새로운 바이러스가 확산할 때 벌어지는 일을 가장 현실감 있게 묘사한다. 워너브러더스 코리아 제공
영화 '컨테이젼'(2011)은 새로운 바이러스가 확산할 때 벌어지는 일을 가장 현실감 있게 묘사한다. 워너브러더스 코리아 제공

프랑스 영화 ‘나쁜 피’(1986ㆍ감독 레오 카락스)에선 희귀 바이러스로 ‘STBO’라는 질병이 창궐한다. 성적 접촉 때만 전염되는데, 이전의 성병과는 다르다. 한쪽이라도 애정 없는 성관계를 했을 때 양쪽 모두 감염된다. 나를 사랑한다고 생각하는 사람과 함께 잠자리를 했는데, 병에 걸린다면… 보이지 않는 마음이 보이지 않는 바이러스를 만들어내고, 보이지 않는 공포로 이어진다. 등장인물들이 텅 빈 파리 밤거리를 드라이브하는 모습이 매우 상징적이다. ‘나쁜 피’는 사랑의 의미를 되짚기 위해 STBO라는 상상의 질병을 만들어냈지만, ‘사회적 거리두기’를 하며 살아가야 하는 우리에겐 예사롭지 않는 메타포다.

프랑스 영화 '나쁜 피'(1986). 사랑 없는 섹스를 하면 감염되는 바이러스를 소재로 이야기를 전개한다. 오드 제공
프랑스 영화 '나쁜 피'(1986). 사랑 없는 섹스를 하면 감염되는 바이러스를 소재로 이야기를 전개한다. 오드 제공

보이지 않는 바이러스의 공포를 가장 실감나게 그린 건 ‘컨테이젼’(2011ㆍ감독 스티븐 소더버그)이다. 맷 데이먼과 귀네스 팰트로, 케이트 윈즐릿, 주드 로 등 출연진이 화려하지만 개봉 당시 관객은 22만명에 불과했다. 그러다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산으로 가장 주목 받게 됐다. 지난 3일 영화진흥위원회 집계를 보면 ‘컨테이젼’은 주문형비디오(VOD) 주간 박스오피스 최신 집계(2월 17~23일)에서 4위(이용건수 4만2,034건)에 올랐다. 신종 바이러스 때의 일을 세세히 담았는데, 지금 우리 상황과 크게 다르지 않다. 영화에서 카메라는 인물이 사라진 뒤에도 한 곳을 지긋이 응시한다. 사람이 손 댔거나, 침 등이 튀었을 만한 곳이다. 그 곳에 있는 보이지 않는 무엇이 세상을 혼돈에 밀어 넣을 것이란 예고다.

영화 '눈먼 자들의 도시'는 정체불명 바이러스의 창궐로 사람들 눈이 멀게 되는 상황을 그린다. 토마스엔터프라이즈 제공
영화 '눈먼 자들의 도시'는 정체불명 바이러스의 창궐로 사람들 눈이 멀게 되는 상황을 그린다. 토마스엔터프라이즈 제공

‘눈먼 자들의 도시’(2008ㆍ감독 페르난도 메이렐리스)는 사람들이 아예 볼 수 없는 상황에서 발생하는 공포와 혼란을 묘사한다. 정체불명 바이러스로 사람들이 갑작스레 시력을 잃고, 정부는 전염 방지를 위해 ‘눈먼 자’들을 따로 격리한다. 앞을 볼 수 없는 절망적인 상황에서 사람들은 부도덕하거나 이기적인 행태를 보인다. 유일하게 볼 수 있는 여인(줄리앤 무어)이 눈먼 자들 사이에서 등대 같은 역할을 한다. ‘눈먼 자들의 도시’는 물질만능주의에 눈이 먼 현대인에 대한 우화다.

영화 '인비저블맨'은 보이지 않는 위협의 공포에 대해 그린다. 유니버설 픽쳐스 제공
영화 '인비저블맨'은 보이지 않는 위협의 공포에 대해 그린다. 유니버설 픽쳐스 제공

상영 중인 ‘인비저블맨’(감독 리 워넬)은 볼 수 있음에도 볼 수 없는 상황에 처한 한 여인을 통해 시선이라는 권력을 다룬다. 주인공 세실리아(엘리자베스 모스)는 투명인간이 된 남자친구 애드리안을 볼 수 없지만, 애드리안은 세실리아를 자유롭게 바라보고 마음껏 폭력을 행사한다. 세실리아가 애드리안을 볼 수 있고, 애드리안은 세실리아를 볼 수 없을 때 상황은 뒤바뀐다. 영화는 남성의 시선이 지배적일 때 폭력적인 가부장체제가 공고화됨을 보여준다. 여성주의 시각으로 만들어진 영화지만 ‘역병의 시대’에 마냥 그렇게만 볼 수 없다.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공포에 직면한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두려움을 이겨내는 지혜와 용기다.

라제기 영화전문기자 wenders@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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