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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본다, 젠더] 여성으로 바뀌니 달라진 세상… 항상 여성임을 의식해야 했다

입력
2020.02.28 04:30
2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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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페미니즘은 거역할 수 없는 흐름이 됐지만, 이론과 실천 모두 여전히 어렵습니다. ‘바로 본다, 젠더’는 페미니즘 시대를 헤쳐나갈 길잡이가 돼줄 책들을 소개합니다. 손희정 문화평론가가 한국일보에 4주마다 금요일에 글을 씁니다.

<1> 버지니아 울프, ‘올랜도’

버지니아 울프. 한국일보 자료사진
버지니아 울프. 한국일보 자료사진

20년도 더 된 책을 책장에서 뽑아 몇 장을 넘기다 덮었다. 그리고 서점으로 향했다. 같은 책의 다른 판본을 찾아 첫 장을 펼쳐보았다. 확인해 볼 것이 있었기 때문이다. 마음에 들었던 탓에 그 책을 구매해 돌아와 다시 읽기 시작했다. 오랜만에 꺼내든 책은 그 옛날의 나보다 오늘의 나에게 더 많은 말을 건네고 있었다. 버지니아 울프의 1928년 작 ‘올랜도’에 대한 이야기다.

‘올랜도’는 16세기부터 20세기 초까지, 400년 가까이 젊음을 유지하고 살면서 남성에서 여성으로 성 전환하는 영국 귀족 ‘올랜도’의 전기 형식을 띤 판타지 소설이다. 울프가 어찌나 끼를 부리고 능청을 떠는 지, 종종 낄낄거리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책에서 가장 매혹적인 부분은 아무래도 소설의 중반, 올랜도가 꼬박 일주일을 죽은 듯이 자고 일어나 남성에서 여성으로 변화한 스스로의 모습을 확인하는 장면일 터다. 울프는 그 순간을 이렇게 묘사한다.

“올랜도는 완전히 벗은 채로 서 있었다. 이 세상이 시작된 이래 그 어느 인간도 그보다 더 매혹적일 수는 없었다. 그의 모습은 남자의 힘과 여자의 우아함을 동시에 지니고 있었다. (...) 올랜도는 여자가 되었다. (...) 성의 변화가 비록 그들의 미래를 바꿔놓기는 했으나, 그들의 정체성은 전혀 바뀌지 않았다.”

올랜도 본인과 그를 오랫동안 따르고 사랑했던 개와 사슴은 그를 “똑같은 사람(same person)”으로 받아들인다. 반면, 그를 잘 몰랐던 사람들과 그의 성전환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사람들은 다르게 반응한다. 그가 “처음부터 여자였을 것”이라고 주장하거나, “지금 이 순간에도 여전히 남자”라는 것을 증명하려고 애쓰는 것이다. 사람들은 때로 익숙한 세계에 안주하기 위해 타인의 존재를 지워버리는 폭력을 감수한다.

남성으로 살 때에는 단 한 번도 자신의 성별을 예민하게 인식할 필요가 없었던 올랜도는 여성이 된 이후로 매 순간 자신의 성별을 인식하게 된다. 코르셋을 조여야만 껴입을 수 있는 불편한 옷과 여성으로서 수행해야 하는 수많은 법도들, 그리고 자신을 향한 차별적 말과 행동이 그를 옥죄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국가는 그로부터 재산을 회수하려 든다. 성별이 바뀌었기 때문에 아예 그를 죽은 사람 취급했기 때문이다. 백 번 양보해 설사 동일성을 인정한다 하더라도 18세기 영국은 여성의 재산권을 인정하지 않았으므로, 그가 남자와 결혼해서 아들을 낳지 않는 이상 재산을 유지할 수 없다고 강제한다.

이처럼 울프는 올랜도의 성전환과 그것이 “바꿔놓은 미래”를 그리면서 ‘같은 사람’을 성기에 따라 남성과 여성으로 구분한 뒤 차별하는 가부장제 사회의 정상성의 규범에 질문을 던진다. 그리고 그 속에서 여성을 ‘제 2의 성’으로 만드는 문화적이고 제도적인 조건들을 탐색한다. 100년 전 작품인 ‘올랜도’가 지금/여기에서 여전히 생명력을 가지는 건, 성(sex/gender/sexuality)에 관한 관습적인 사고방식이 여전하기 때문이다.

올랜도

버지니아 울프 지음ㆍ박희진 옮김

솔 발행ㆍ304쪽ㆍ1만4,500원

글의 시작으로 돌아가 보자. 처음 손에 잡았던 판본은 산호 출판사에서 1994년에 출간한 ‘올란도’였다. 이 판본에는 꼭 있어야 할 첫 문장이 없었다. 그건 “V. 색빌웨스트에게(To V.Sackville-west)”다. 이 소설은 울프가 그의 동성 연인이었던 시인 비타 색빌웨스트에게 바치는 작품이다. 이 짧은 한 줄은 울프가 고심 끝에 몇 번의 수정을 거쳐 완성한 문장으로 알려져 있다. 산호 출판사의 판본이 지운 건 이 부분이었다.

그러니 ‘올랜도’를 읽기로 했다면 첫 페이지부터 확인하시라. “V. 색빌웨스트에게”라는 헌사가 없다면, 그 책은 위대한 작가의 글혼을 왜곡하고 있는 것이다. 그 한 줄을 무슨 이유로 지웠건 간에 말이다.

손희정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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