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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판 아우슈비츠의 피맺힌 절규를 기록해 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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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판 아우슈비츠의 피맺힌 절규를 기록해 달라"

입력
2020.02.22 04:30
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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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형제복지원ㆍ선감학원ㆍ서산개척단 피해자 단체 대표 3명 인터뷰 

 “2월 임시국회서 ‘과거사법 개정안’ 통과로 진상 규명 이뤄져야” 

형제복지원 피해생존자모임 대표인 한종선(오른쪽)씨와 최승우씨가 형제복지원 인권 유린 사건에 대한 진상 규명을 요구하며 국회 앞 노숙 농성을 하고 있다. 형제복지원 피해생존자모임 제공
형제복지원 피해생존자모임 대표인 한종선(오른쪽)씨와 최승우씨가 형제복지원 인권 유린 사건에 대한 진상 규명을 요구하며 국회 앞 노숙 농성을 하고 있다. 형제복지원 피해생존자모임 제공

“과거사 의제에서 이제는 벗어나야 한다”는 주장이 있다. 전 세계가 무한경쟁으로 치닫는 이때, 국가의 미래 준비에 모든 노력을 기울여도 부족할 판에, 수십 년 전의 부끄러운 과거를 자꾸 들춰내는 게 무슨 실익이 있느냐는 이야기다. 요컨대 현 시점에서 과거사 문제에 힘을 쏟는 건 국력 낭비라는 것이다.

그러나 ‘케케묵은 오래 전 사건’을 여전히 떨쳐내지 못한 채, 지금 이 순간을 살아가는 사람들도 있다. 1960~80년대 군사정권 시절 ‘강제수용소’나 다름없던 형제복지원, 선감학원, 서산개척단에서 갇혀 살았던 피해 생존자들이 대표적이다. 온갖 고문과 구타, 폭력에 시달리며 인권을 짓밟혔던 그들은 그곳을 벗어난 이후에도 십중팔구 밑바닥 인생에서 헤어나오지 못했다. 사회는 그들의 아픔에 눈길 한번 주지 않았다. 무언가 억울했지만, 누구한테 항변해야 할지조차 몰랐다. ‘지독한 불운’이라 여기며 그저 숨죽이고 지내야만 했다.

자신들의 인생을 망가뜨린 실체는 ‘국가폭력’이었다는 사실을 깨달은 건 한참이 지나서였다. ‘과거사’는 그들에게 단순히 지나간 옛일이 아니라, 지금 바로잡아야 할 ‘현재의 문제’가 됐다. 뒤늦게나마 진상 규명을 요구하는 목소리를 냈으나, 현실의 벽에 부닥쳤다. 2010년 12월 진실ㆍ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 해산과 함께 과거사 문제를 조사할 법적 기구가 사라진 것이다. ‘2기 진실화해위’의 출범 및 활동의 근거가 될 법이 필요했다.

하지만 입법 과정은 순탄치 않았다. 문재인 정부는 ‘국민 눈높이에 맞는 과거사 문제 해결’을 국정과제로 제시했지만, 국회에서 여야 합의가 이뤄지지 않아 난항이 계속됐다. 20대 국회 종료를 코앞에 두고 열린 2월 임시국회에서도 과거사법 개정안 처리 여부는 여전히 불투명하다. 지난 17, 18일 형제복지원ㆍ선감학원ㆍ서산개척단의 피해 생존자 단체 대표 3명을 각각 인터뷰해 그들의 이야기를 직접 들어봤다.

“(피해에 대한) 배상이나 보상이 중요한 게 아닙니다. 왜 잡혀갔는지, 폭행을 당했는지, 누가 죽었는지, 살아남은 이들은 퇴소 후 어떤 아픔을 겪고 어떻게 이겨 냈는지를 당사자 이름과 함께 기록으로 남기자는 거예요. 평범했던 한 사람의 인생이 거대한 힘에 의해 송두리째 바뀐 과정을 기록하자는 거죠.”

지난 18일 광주광역시 서구의 한 병원 내 커피숍에서 만난 한종선(44) 형제복지원 피해생존자모임 대표는 시종일관 ‘기록’을 강조했다. 2017년 11월부터 2년 넘게 동료 최승우(51)씨와 함께 국회 앞에서 노숙 농성을 계속해 온 한 대표는 최근 허리디스크 증세 악화로 결국 수술을 받았다. 입원 중인데도 인터뷰 요청에 흔쾌히 응할 만큼, 그는 형제복지원 사건을 좀 더 ‘알리고’ 싶어했다. 조속한 진상 규명을 위해서다. “이미 돌아가신 분도 있고, 지금도 누군가 세상을 떠나고 있어요. 그렇게 이름 없이 생을 마감하면 그들의 억울함은 누가 풀어줘요. 배상금 받는다고 가족한테 위안이 되나요. 저는 안 될 것 같아요. 그보다는 기록이 우선입니다. 저한텐 그게 제일 중요해요.”

‘제2의 삼청교육대’로 불리는 부산 형제복지원은 공무원이 동원돼 1975~87년 ‘부랑자 선도’ 명목으로 아이부터 어른까지, 무고한 이들을 닥치는 대로 잡아들여 불법 감금하고 강제노역을 시켰던 곳이다. 1987년 당시 수용자만 3,975명, 연인원 2만1,685명인 전국 최대 규모의 부랑인 보호시설이었다. 그 안에서 학대와 성폭행, 구타, 암매장은 일상이었고, 사망자도 최소 513명에 달한다. 전두환 정권 최악의 인권 유린 사건으로 꼽히는 이유다.

군사정부 시절 ‘강제수용’ 인권 유린 사건. 그래픽=신동준 기자
군사정부 시절 ‘강제수용’ 인권 유린 사건. 그래픽=신동준 기자

 ◇1인 시위 시작, “짐승에서 사람으로” 

한종선 대표는 1984년 작은누나와 함께 입소했다. 불과 여덟 살 때였다. 부친이 파출소에 데려가 ‘여기 있으라’고 한 뒤 자리를 뜨자, 잠시 후 지프 차량이 와서 남매를 태우고 갔다. 3년간 이어진 악몽의 시작이었다. 2년 후엔 부친도 잡혀 들어왔다. 아버지와 누나는 그곳에서 정신이상자가 됐고, 지금도 정신병원에서 지낸다. 가족의 삶은 풍비박산됐다. 한 대표는 87년 복지원 폐쇄 이후 일반 보육원으로 이송됐지만 잘 적응하지 못했고, 13세 때 뛰쳐나왔다. 사회는 그런 그를 품어 주지 않았다. 절도죄로 교도소를 세 차례 들락거리는 등 악순환만 반복됐다.

이러한 삶에 변화가 찾아온 건 2008년이었다. ‘아버지와 누나가 있는 병원에서 광우병 쇠고기 반찬이 나오면 어떡하나’라는 걱정으로 미국산 쇠고기 수입 반대 시위에 참여했고, 사회 현실에도 조금씩 눈을 떴다. 그러면서 87년 당시 검찰이 형제복지원 인권유린 사태를 수사했음에도 사안의 핵심인 박인근(2016년 사망) 원장의 특수감금 혐의는 무죄가 확정됐고, 곁가지인 공금횡령 혐의만 유죄 판결(징역 2년6월)이 내려진 사실도 알게 됐다. “박인근은 수사와 재판 과정에서 줄곧 전두환 정권의 비호를 받았고, 사건은 축소ㆍ은폐될 수밖에 없었어요. 진짜 주인공(가해자)은 박인근이 아니라 국가였다는 걸 보여 주는 직접 증거입니다.”

‘형제복지원 사건=국가폭력’이라고 인식하게 되자, 뭐라도 해야만 했다. 하지만 뾰족한 수가 안 보였다. 미칠 듯이 고민만 거듭하는 나날이 이어졌다. 그러다 2012년 여름 어느 날, TV로 방영된 영화 ‘콜래트럴’에서 킬러 역을 맡은 톰 크루즈의 대사 한마디가 가슴을 때렸다. “당신은 꿈만 꿨기 때문에 나 같은 놈한테 인질이 된 거야.” 한 대표는 다음 날 곧바로 피켓을 만들어 국회 앞 1인 시위에 나섰다. 25년간 잊힌 형제복지원 사건이 다시 수면 위로 떠오르는 순간이었다. 2012년 발간된 책 ‘살아남은 아이’에서 그는 “짐승에서 사람으로 변해 가는 중, 내가 했던 최초의 일”이라고 설명했다.

물론 처음엔 아무도 주목해 주지 않았다. 좌절감도 느꼈다. 그러나 학계와 시민단체에서 도움의 손길을 내밀기 시작했고, 형제복지원 출신 피해자들의 동참도 잇따랐다. 그 덕에 속도는 느려도 조금씩 전진할 수 있었다. 한 대표는 “2012년 이후 1인 시위, 단식농성, 국토대장정, 노숙농성 등 모든 걸 다 해 봤다. 처음엔 1년만 하려고 했는데, 어느덧 9년째가 됐다”며 미소를 지었다. 19대 국회 때 발의된 ‘형제복지원 특별법안’이 임기 종료로 폐기된 쓰라린 기억도 있지만, 자랑스러운 성과도 일궈 냈다. 2018년 9월 오거돈 부산시장의 사과, 같은 해 11월 문무일 당시 검찰총장의 사과 및 박인근 원장 대법원 판결에 대한 비상상고 등을 이끌어 낸 것이다. “(진실 규명이 필요하다는) 사회적 합의는 이미 이뤄졌다고 봅니다. 어쨌든 큰 물결은 만들어 냈잖아요. 자부심을 느낍니다.”

정말로 이 사건의 ‘기록’을 남기게 된다면, 그 매듭은 어떻게 지어야 할까. 한 대표는 ‘부랑인 프레임’을 깨고 싶다고 했다. “모두들 형제복지원을 ‘부랑인 수용소’로 알고 있지만, 피해 당사자들은 ‘난 부랑인이 아니었다’고 억울해해요. 그런데 대한민국 헌법에 따르면 부랑인이라 해도 죄를 짓지 않는 한 잡아가선 안 되는 거잖아요. 당시 (복지원 수용) 정책이 ‘반인권적’이었다고 확실한 끝맺음을 해야 합니다.” 형제복지원 내에서 벌어진 인권유린을 언급하기에 앞서, 부랑인 여부를 따지기에 앞서, 누군가를 강제수용하는 단계부터 국가폭력이 발생했다고 봐야 한다는 얘기였다.

1963년부터 5년간 선감학원에 수용됐던 김영배 선감학원 아동피해대책협의회 회장이 지난 17일 안산시 선감역사박물관에서 잠시 생각에 잠겨 있다. 전시된 그림 속 소년의 슬픈 표정과 묘하게 닮은 듯한 김 회장의 얼굴에서 50여년전 그가 겪은 고통이 그대로 느껴진다 안산=이한호 기자
1963년부터 5년간 선감학원에 수용됐던 김영배 선감학원 아동피해대책협의회 회장이 지난 17일 안산시 선감역사박물관에서 잠시 생각에 잠겨 있다. 전시된 그림 속 소년의 슬픈 표정과 묘하게 닮은 듯한 김 회장의 얼굴에서 50여년전 그가 겪은 고통이 그대로 느껴진다 안산=이한호 기자

 ◇“선감도, 사적 공원 만들어 인권교육 현장으로” 

경기 안산시 대부도 근처의 자그마한 섬 선감도. 현재 경기창작센터가 들어선 자리에는 원래 ‘선감학원’이 있었다. 1942년 일제가 ‘소년 감화’ 목적으로 설립했고, 해방 이후 경기도가 인수해 1982년까지 운영했던 부랑아 보호시설이다. 하지만 2010년대 중반부터 드러난 선감학원의 실상은 ‘형제복지원 판박이’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였다. 설립ㆍ운영 시기를 따지자면 형제복지원의 원형격으로도 볼 수 있다. ‘소년판 삼청교육대’로 지칭될 정도로 인권유린이 심각했다.

지난 17일 선감도에서 만난 김영배(65) 선감학원 아동피해대책협의회 회장은 인터뷰 내내 유년시절 고통의 기억이 되살아나는 것처럼 보였다. “옛날 일을 얘기하고 나면 다리에 힘이 쫙 풀려요. 오랫동안 잠재의식 속에 있던 트라우마를 되새기는 게 참 힘이 드네요.” 50년 이상 흘렀어도 그때의 상처는 쉽게 아물지 않았다.

경기 파주 출신인 김 회장이 선감학원에 수용된 건 1963년, 그러니까 8세 때였다. 서울에 사는 큰누나 집에 갔다가 남대문경찰서 앞에서 영문도 모른 채 경찰한테 끌려갔다. 그는 “날 왜 붙잡았는지 오히려 내가 묻고 싶다. 그냥 잡힌 것”이라고 말했다. 당시 경찰과 공무원은 주로 ‘의복이 남루하다’ ‘주거가 불명확하다’ 등의 이유로 무작정 남자 아이들을 데려갔다. ‘단속 실적’을 쌓기 위해서였다. 40년간 이곳에 수용된 전체 원생 규모는 현재 남아 있는 공식 문서상 5,759명(82년 7월 15일, 경기도 부녀아동과)이지만, 중복 집계가 많았던 것으로 전해져 실제로는 4,000명대 후반~5,000명대 초반 정도로 추정되고 있다.

5년간 이곳에 갇혀 살았던 김 회장은 “굶주림과 폭력의 기억이 또렷하게 남아 있다”며 “특히 배고픔의 고통은 당해 보지 않으면 모른다”고 했다. 먹을 걸 찾으려고 쓰레기 더미를 뒤지는 건 다반사였고, 뱀이나 쥐를 잡아먹기도 했다. “심지어 ‘쫀드기’라고 불렀던, 초콜릿처럼 뭉쳐진 흙까지 먹었어요.” 농사, 염전, 축산, 양잠 등 강제노역에 시달린 건 물론이고, 고된 일과가 끝나면 하루도 빠짐없이 구타가 이어졌다.

탈출을 시도하는 원생들도 많았다. 그러나 갯벌과 급류로 체력이 소진돼 돌아오거나 그대로 숨지는 경우가 많았다. 김 회장은 “공식 기록상 사망자는 24명이지만, 정확히 알 수가 없다. 150명 정도라는 조사 결과도 있다”고 전했다. 희생자 시신이 떠내려오면 묘비 없는 공동묘지에 동료들이 묻어 줬다고 한다. 게다가 탈출 시도는 언제나 ‘단체기합’이라는 응징을 낳았다. “생지옥입니다. 지옥이 뭔지 난 잘 모르지만, 그곳이 지옥이라고 생각합니다.”

김 회장이 과거사법 통과를 염원하는 건 신속한 ‘피해자 지원’을 위해서다. 연락이 닿는 생존자 30~40명 중 10여명은 기초생활수급자로 경제적으로 매우 어려운 형편이다. 그는 “우리 입장에선 가해자는 경기도”라며 “쉼터라도 마련해 달라고 도에 요청했지만, ‘조례로는 어렵다. 관련 법률이 만들어져야 한다’는 입장만 취하고 있다”고 답답해했다.

김 회장은 특히 “일단 사람이 살고 봐야 하는 것 아닌가”라며 경기도의 조치에 아쉬워했다. 지난달 16일 이재명 경기도지사가 선감학원 아동인권침해 사건에 대해 정식으로 사과했지만, 실질적인 구제책은 내놓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무튼 도가 법을 요구하니 우리도 절차를 밟아야겠죠. 과거사법 처리 이후엔 선감도를 사적(史蹟) 공원으로 조성하고, 우리가 기억하는 고통의 형상을 모형화해서 인권교육의 장으로 활용했으면 합니다. 이 과정에 피해자들도 직접 참여, 상처를 회복할 수 있길 바라고 있습니다.”

지난 4일 서울 여의도 이룸센터에서 열린 ‘20대 국회 과거사법 통과를 위한 긴급 간담회’가 열리고 있는 도중 정영철(왼쪽) 서산개척단 진상규명대책위원회 위원장이 일어나 발언하고 있다. 4ㆍ9통일평화재단 제공
지난 4일 서울 여의도 이룸센터에서 열린 ‘20대 국회 과거사법 통과를 위한 긴급 간담회’가 열리고 있는 도중 정영철(왼쪽) 서산개척단 진상규명대책위원회 위원장이 일어나 발언하고 있다. 4ㆍ9통일평화재단 제공

 ◇“법 없이 문제 해결? 계란으로 바위 치기” 

1960년대 ‘사회명랑화 사업’으로 진행된 대한청소년개척단(서산개척단) 사건도 진실화해위 활동 종료 이후에야 제기된 국가폭력이다. 1961년 5ㆍ16 쿠데타를 일으킨 박정희 정권은 ‘거리의 부랑아에게 갱생의 기회를 주겠다’며 1,700여명을 집단 수용시킨 뒤, 충남 서산군 일대의 방치된 폐염전을 개간해 농지로 만들도록 했다. 이 과정에서 불법 감금과 폭력, 강제 노역은 여지없이 자행됐다.

“열아홉 살 때인 1961년 12월 부산에 있을 때 군인들이 총으로 위협해 강제로 끌고 왔어요. ‘후리가리(실적을 쌓기 위한 경찰의 일제 단속)’였죠.” 정영철(78) 서산개척단 진상규명대책위원회 위원장의 말이다. 인터뷰는 지난 17일 밤 전화 통화로 이뤄졌다. “어마어마하게 많은 사람들이 그곳에서 목숨을 잃었어요. 맞아 죽고, 영양실조로 죽고, 도망가다 붙잡혀 죽고, 일하다 쓰러져 죽고… 마치 공개 처형을 하듯, 간부들이 단원들을 모아 놓고선 제 동료를 야구배트로 때렸는데 픽 쓰러지자 ‘지랄하네’ 말하는 걸 직접 본 적도 있습니다.”

1965~66년쯤 비참함을 견디지 못한 단원들의 집단 반발로 간부들은 줄행랑을 쳤고, 강제수용 생활도 끝났다. 그러나 정 위원장을 비롯한 수백 명은 남았다. ‘땅을 개간하면 1인당 3,000평씩 무상 분배하겠다’는 정부 약속을 철석같이 믿었기 때문이다. 1968년 ‘가분배’를 받아 농사를 지으며 살았지만, 정부는 1991년 말을 뒤집었다. “시세대로 유상 매각하겠다”고 통보한 것이다. 소송을 냈지만 줄줄이 패소했다. 정 위원장은 “국가에선 한 게 전혀 없고, 우리가 아무 대가 없이 개간해 만든 땅인데 너무 억울했다”며 “농사 말고는 할 줄 아는 게 없으니 20년 상환 조건으로 매입할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특히 다른 개척단이 있었던 전남 장흥에서 실제 무상분배가 이뤄진 사실과 비교하면, 박탈감은 더욱 커졌다.

정 위원장은 “민주주의 정착 이후엔 국가가 우리의 원통함을 파헤쳐 주고, 사과도 할 거라 기대했는데 아무것도 없었다”며 “결국 과거사법이 생겨야만 다음 행동을 할 수 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다음 행동이 무엇이냐’고 묻자 이런 답변이 돌아왔다. “정확히는 모르겠어요. 다만 그동안 느낀 건 법 없이 (문제에) 부딪치는 건 ‘계란으로 바위 치기’라는 겁니다.”

주목할 대목은 강제수용 이후에도 하층민으로 살아왔던 피해자들이 ‘진짜 문제는 개인적 불운이 아니라 국가 폭력에 있다’는 걸 자각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주윤정 서울대 사회발전연구소 선임연구원은 지난 2018년 발표한 논문 ‘법 앞에서: 형제복지원 피해생존자들의 해방과 기다림의 정치’를 통해 이를 설명한 바 있다. 주 연구원은 “국가 책임에 대한 진상 규명과 적절한 조치도 중요하지만, 사회에서 철저히 배제됐던 그들의 역사와 경험을 의미화하고 사회 일원으로 포용하는 과정도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국가는 과거사 피해 당사자들의 질문과 요구, 호소에 응답해야 할 의무가 있다는 말이다.

광주ㆍ안산=김정우 기자 wookim@hankookilbo.com

김민준 인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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