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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왜그 있다, 떼창도 나온다, 민요인데 힙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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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왜그 있다, 떼창도 나온다, 민요인데 힙하다

입력
2020.02.23 14:00
수정
2020.02.23 18:57
2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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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악계 괴짜 슈퍼스타 이희문

소리꾼 이희문의 대표작인 ‘깊은사랑’ 3부작은 경기소리의 역사와 이희문이라는 한 개인의 존재를 연관지어 양쪽 모두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과정을 담은 공연이다. 1부 ‘깊은사랑’의 한 장면. 이희문컴퍼니 제공
소리꾼 이희문의 대표작인 ‘깊은사랑’ 3부작은 경기소리의 역사와 이희문이라는 한 개인의 존재를 연관지어 양쪽 모두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과정을 담은 공연이다. 1부 ‘깊은사랑’의 한 장면. 이희문컴퍼니 제공

“배고파 지어 놓은 밥에 뉘도 많고 돌도 많다. 그 밥에 어떤 돌이 들었더냐. 초벌로 새문안 거지바위, 문턱바위, 둥글바위, 너럭바위, 치마바위, 감투바위, 뱀바위, 구렁바위, 독사바위, 행금바위, 중바위….”

휘모리잡가 ‘바위타령’에 스왜그(자기과시)가 넘친다. 라임(압운)도 기막히게 맞아떨어진다. 이것은 랩인가, 민요인가. 여기에 흥겨운 안무까지 곁들였으니 흡사 댄스곡이다. 연습실 한가운데 놓인 장구와 꽹과리, 액자에 걸린 ‘중요무형문화재 제57호 경기민요 이수증’이 아니었다면, 소리꾼 이희문(44)을 몰라볼 뻔했다.

이희문은 국악계 슈퍼스타다. 장단을 타고 넘는 선율과 간드러진 목소리는 틀림없이 경기민요인데, 팬들은 ‘힙하다’며 열광한다. 외국인까지 ‘떼창’을 하는 진풍경도 펼쳐진다. 경기민요와 재즈, 록, 레게, 디스코가 빚어낸 오묘한 조화, 짙은 화장과 독특한 의상, 하이힐 등으로 연출한 전위적인 이미지 등 이희문의 무대는 파격 그 자체다. 경기민요의 뮤지컬 ‘헤드윅’ 버전이랄까. 그는 ‘전통’이란 틀을 해체, 전복함으로써 ‘전통’을 새롭게 창조한다. 이런 그에겐 ‘이단아’ ‘조선 아이돌’ ‘국악계의 프레디 머큐리’ ‘관뚜껑을 박차고 나온 국악 천재’ 같은 수식어가 따라다닌다.

이희문이 서울 서초동 예술의전당에서 선보이고 있는 무대는 그의 대표 레퍼토리인 ‘깊은舍廊사랑’ 3부작이다. 사라진 전통 문화를 재현한 1부 ‘깊은사랑’(20, 21일), 남자 소리꾼의 뿌리를 탐구한 2부 ‘사계축四契軸’(22, 23일), 근대화 이후 경기민요와 여자 소리꾼의 삶을 그린 3부 ‘민요삼천리民謠三千里’(25, 26일)로 구성된다. 2016년부터 개별적으로 선보였던 시리즈를 한꺼번에 무대에 올리기는 처음이다.

그만큼 이번 공연은 각별하다. ‘소리꾼 이희문’이라는 존재의 근원을 탐구하는 작품이기 때문이다. 이희문은 일본에서 영상을 공부하고 뮤직비디오 조감독으로 일하다, 스물일곱 나이에 소리에 입문했다. 뒤늦게 소리꾼이 되겠다는 그를 어머니도 말리지 못했다. 이희문의 어머니는 경기민요 명창 고주랑이다.

소리꾼 이희문의 연습실에는 장구와 드럼, 꽹과리와 키보드가 공존한다. 그는 “예술은 자유롭고 창조적이며 항상 동시대성을 지녀야 한다”며 “전통도 알맹이는 변하지 않되 시대에 따라 형태나 모습은 변할 수 있다”고 말했다. 고영권 기자
소리꾼 이희문의 연습실에는 장구와 드럼, 꽹과리와 키보드가 공존한다. 그는 “예술은 자유롭고 창조적이며 항상 동시대성을 지녀야 한다”며 “전통도 알맹이는 변하지 않되 시대에 따라 형태나 모습은 변할 수 있다”고 말했다. 고영권 기자

-공연 주제가 눈길을 끈다.

“민요를 하는 어머니를 둔, 특별한 환경에서 자란 ‘나’라는 사람에 대한 이야기다. 자라면서 줄곧 들어 온 우리 소리의 변천사, 그리고 문화재제도 같은 역사 속 오류도 짚는다.”

-‘깊은舍廊’에서 사랑은 ‘사랑방’이란 뜻이다.

“나도 처음엔 ‘딥 러브(Deep Love)’인 줄 알았다(웃음). 1970년대까지만 해도 농한기에는 노는 땅에 움을 파서 방을 꾸며 놓고 모임장소로 썼다고 한다. 땅 깊숙이 만든 사랑방이라서 ‘깊은 사랑’이라 불렀다. 거기로 소리꾼을 불러 소리를 듣기도 했다. 깊은 사랑에 초청됐다는 건 소리꾼으로 인정받았다는 의미였다. 귀명창과 소리꾼들이 예술과 삶을 나누었던 문화를 복원해 보고 싶었다.”

‘깊은사랑’ 2부 ‘사계축’의 한 장면. 이희문컴퍼니 제공
‘깊은사랑’ 2부 ‘사계축’의 한 장면. 이희문컴퍼니 제공

-국악계에 매우 드문 남자 소리꾼으로서 정체성 고민도 엿보인다.

“자라면서 어머니로부터 듣고 본 게 있으니, 아무래도 여자 소리, 여성스러운 제스처에 익숙하다. 아니, 여자보다 훨씬 잘한다(웃음). 왜 남자가 여자 소리를 하느냐는 얘기도 많이 들었다. 난 배운 대로 했을 뿐인데. 그러다 의문이 생겼다. 대체 남자 소리는 어떤 걸까, 남자 소리꾼은 왜 사라진 걸까.”

-답을 찾았나.

“일제강점기에 일본 기생 문화가 들어오고 권번이 생기면서부터다. 여자 소리가 규격화ㆍ상품화되면서 남자 소리를 찾는 수요가 줄었다. 생활 속에서 노래를 만들어 불렀던 자유로움도 사라졌고. 문화재 제도도 마찬가지다. 보호한다는 이유로 틀에 가두고 있다. 그 옛날 소리 문화는 홍대 인디밴드 같았을 거다. 그렇다면 내가 추구하는 자유로움도 틀리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3부에선 어머니 고주랑 명창을 연기한다.

“근대화 시대 여자 소리꾼의 활동과 쇠퇴를 이야기하고 싶은데, 내가 가장 잘 아는 소리꾼이 어머니이지 않나. 직접 원단을 떼어다가 어머니가 젊은 시절 입었던 한복과 똑같은 의상을 만들어 입는다. 화장도 하고, 머리도 올리고(웃음).”

‘깊은사랑’ 3부 ‘민요삼천리’에서 이희문은 어머니 고주랑 명창으로 꾸미고 무대에 올라 여성 소리꾼의 삶을 이야기한다. 이희문컴퍼니 제공
‘깊은사랑’ 3부 ‘민요삼천리’에서 이희문은 어머니 고주랑 명창으로 꾸미고 무대에 올라 여성 소리꾼의 삶을 이야기한다. 이희문컴퍼니 제공

예술은 ‘결핍’에서 싹튼다. 이희문에게는 어머니 고주랑이 그런 존재다. 재일동포 아버지를 위암으로 일찍 여읜 이희문은 생계를 꾸리느라 늘 바빴던 어머니를 그리워했고 원망했다. 사춘기 때는 반항심에 말썽도 부렸다. 그는 “내 모든 작품의 모티브는 어머니”라며 “결국은 자기 살풀이를 하는 것”이라고 했다.

이희문에게는 어머니가 두 명 더 있다. 친구 아들 이희문의 타고난 재주를 알아채고 그에게 소리를 권하고 가르친 이춘희 명창, 현대무용극에 그를 주인공으로 발탁하고 퍼포머로서 정체성을 일깨워 준 현대무용가 안은미다. “세 어머니들로부터 ‘핏줄’과 ‘소릿줄’과 ‘춤줄’을 이어받은”(송현민 음악평론가) 이희문은 ‘이희문 장르’라는 독창적 예술 세계를 만들어 가고 있다.

오더메이드 레퍼토리 시리즈 ‘잡’(시계방향으로) ‘쾌’ ‘탐’. 이희문컴퍼니 제공
오더메이드 레퍼토리 시리즈 ‘잡’(시계방향으로) ‘쾌’ ‘탐’. 이희문컴퍼니 제공

-공연이 늘 파격적이다.

“어릴 때부터 소리를 했으면 나도 그 안에 갇혀 있었을지 모른다. 더구나 소리를 하기 전에 영상 일을 했던 터라, 기존 전통 예술의 시스템에 답답함을 느꼈다. 그때 안은미 선생님과 함께했던 작업에서 영감을 얻었다. 소리꾼 이자람을 보면서 나만의 콘텐츠를 만들고 싶다는 자극도 받았다.”

-여장인 듯, 여장이 아닌 듯, 젠더를 넘나든다.

“2014년 오더메이드 레퍼토리 ‘快(쾌)’라는 작품을 할 때부터였다. 망사스타킹, 하이힐, 가발 등을 착용했지만 여장은 아니었다. 박수무당의 이미지를 현대적으로 풀어보고 싶었다. 처음엔 스트레스가 심해서 두드러기도 나고 식도염도 앓았다.”

-무대 밖과 너무 달라서 변신술 같다.

“의상에 따라 마음가짐이 달라진다. 다른 인격이 나온다고 할까. 전통 음악의 뿌리는 무속 음악이다. 굿판을 보면 신이 들어왔다 나갈 때마다 무속인이 옷을 갈아입는다. 내 의상도 비슷한 의미다. 하지만 이제는 의상이나 화장에 그다지 구애 받지 않는다. 해볼 만큼 해봤달까. 하이힐 높이도 낮아지고 있다(웃음).”

소리꾼 이희문(가운데)이 활동했던 민요 록밴드 씽씽. 이희문컴퍼니 제공
소리꾼 이희문(가운데)이 활동했던 민요 록밴드 씽씽. 이희문컴퍼니 제공

이희문이라는 이름을 대중에 각인시킨 건, 그가 몸담았던 민요 록밴드 ‘씽씽’이다. 씽씽이 2017년 미국 공영라디오 NPR 프로그램 ‘타이니 데스크 콘서트(Tiny Desk Concert)’에서 공연한 영상이 유튜브에서 400만뷰를 기록하면서 국내에서도 난리가 났다. 공연 좌석이 8분 만에 매진되기도 했다.

씽씽뿐만 아니다. 이희문은 경기민요를 중심에 둔 독특한 레퍼토리를 꾸준히 무대에 올리고 있다. 12잡가를 재해석한 오더메이드 레퍼토리 雜(잡), 전통 소리와 클럽 문화를 융합한 오더메이드 레퍼토리 ‘貪(탐)’, 소리꾼 그룹 놈놈(신승태ㆍ조원석)과 재즈밴드 프렐류드가 함께한 ‘한국남자’, 목소리의 가능성을 탐색한 ‘이희문프로젝트 날(陧)’ 등 어느 하나 범상치가 않다. 지난해에는 ‘오방神과’라는 이름으로 새 음반을 냈다.

‘한국남자’(시계방향으로) ‘이희문프로젝트 날’ ‘오방신과’. 이희문컴퍼니 제공
‘한국남자’(시계방향으로) ‘이희문프로젝트 날’ ‘오방신과’. 이희문컴퍼니 제공

-2018년 씽씽 해체 이후 더 바쁘게 지내는 것 같다.

“씽씽을 그만두고 고민이 생겼다. 씽씽에서 중요한 게 음악이었을까, 목소리였을까. 답을 찾아야만 했다. 그래서 멜로디 악기를 빼고, 오로지 목소리로만 승부하는 공연을 올렸다. 그게 ‘이희문프로젝트 날(陧)’이다. 새 인생을 시작한다는 의미에서 웨딩드레스를 모티브로 긴 천을 덧댄 하얀 옷을 입었다.”

-영감은 어디에서 얻나.

“잘 놀아야 한다. 이 사람과 놀면 이 음악, 저 사람과 놀면 저 음악이 자연스럽게 나온다. 무대에서도 ‘틀려도 상관없다’는 마음으로 논다.”

-구상 중인 신작은.

“아버지 이야기를 하고 싶다. 1980년대 일본 버블 경제와 재일동포의 삶, 한일 관계 등이 담기지 않을까 싶다. 어릴 때부터 살았던 강남을 모티브로 한 음악극도 구상 중이다. 연극 요소를 가져와 모노드라마처럼 연기도 할 생각이다. ‘깊은사랑’을 책과 영화로도 만들고 싶다.”

“뜬 구름 잡는다는 말을 좋아해요. 예술은 그런 거니까요.” 소리꾼 이희문은 “서로 생각이 다르다는 걸 인정하고 생긴 대로 살아가자”고 말했다. 고영권 기자
“뜬 구름 잡는다는 말을 좋아해요. 예술은 그런 거니까요.” 소리꾼 이희문은 “서로 생각이 다르다는 걸 인정하고 생긴 대로 살아가자”고 말했다. 고영권 기자

-경기민요만의 매력은 무엇인가.

“블랙코미디 같달까. 멜로디는 경쾌한데 가사는 애잔하다. ‘바위타령’만 봐도 밥에 섞인 돌을 골라내면서 바위 이름을 붙이는 내용이다. 고단한 삶이 녹아 있다. 함축적인 시 언어라서 매번 다른 감성으로 다가온다.”

-이희문이 생각하는 전통이란.

“경기민요 역사가 100년이 채 안 됐다. 당시엔 유행 장르였다. 내가 지금 하는 음악이 100년 후까지 전해지려면 현재 가장 힙한 것이어야 한다. 예술에 권위가 있으면 편하게 즐길 수 없다. 나는 A급으로 격상된 전통 소리를 B급으로 낮추려 하는 거다. 그래서 ‘B급 소리꾼’이란 말이 가장 듣기 좋다.”

김표향 기자 suzak@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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