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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콜드케이스] 열한 번째 주검으로 돌아온 딸 “성매매 여성 아니었다면…”

입력
2020.02.21 04:30
수정
2020.02.21 07:18
1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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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뉴욕 롱아일랜드 연쇄살인사건

※‘콜드케이스(cold case)’는 오랜 시간 미해결 상태로 남아 있는 범죄사건을 뜻하는 말로, 동명의 미국 드라마로도 잘 알려져 있습니다. <한국일보>는 격주 금요일 세계 각국의 미제사건과 진실을 쫓는 사람들의 노력을 소개합니다.

미국의 대표 중고 거래사이트인 크레이그리스트를 통해 콜걸로 일하던 섀넌 길버트는 2010년 5월 2일 고객을 만나러 갔던 뉴욕 롱아일랜드 오크 해변 인근에서 실종됐다. 뉴욕 서퍽 카운티 경찰 당국 제공
미국의 대표 중고 거래사이트인 크레이그리스트를 통해 콜걸로 일하던 섀넌 길버트는 2010년 5월 2일 고객을 만나러 갔던 뉴욕 롱아일랜드 오크 해변 인근에서 실종됐다. 뉴욕 서퍽 카운티 경찰 당국 제공

맑았던 어느 봄날 새벽, 딸이 사라졌다. 섀넌 길버트(실종 당시 24세)는 2010년 5월 2일 미국 뉴욕 롱아일랜드의 오크 해변에서 홀연히 자취를 감췄다. 당초 수사에 미온적이었던 뉴욕주 서퍽 카운티 경찰 당국은 섀넌 가족의 닦달에 못 이겨 그제야 롱아일랜드 일대를 훑기 시작했다. 그리고 7개월이 지난 12월 11일, 실종 장소 인근의 길고 해변에서 한 젊은 여성의 시신이 발견됐다.

신원 확인 결과를 초조하게 기다리던 가족에게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 연달아 날아 들었다. 이틀 뒤 같은 곳에서 세 구의 백골 사체가 추가로 나온 것. 그러나 ‘길고 4인’ 가운데 섀넌은 없었다. 딸이 싸늘한 주검으로 돌아온 건 다시 1년이 흐른 2011년 12월이었다. 그 사이 시신은 11구로 늘어나 있었다. ‘롱아일랜드 연쇄살인사건(Long Island Serial KillerㆍLISK)’으로 명명된 장기미제 수사의 시작이었다.

뉴욕 롱아일랜드 연쇄살인사건 추정 피해자. 한국일보
뉴욕 롱아일랜드 연쇄살인사건 추정 피해자. 한국일보

그 즈음 롱아일랜드 남부 해안 일대에서 섀넌을 포함해 9명의 여성과 동양인 남성 1명, 그리고 2세 여아의 시신이 유기된 채 발견됐다. 딱 거기까지였다. 10년이 지난 지금도 수사는 제자리걸음이다. 11명 중 몇 명이 연쇄살인의 피해자인지, 범인이 한 명인지 여럿인지, 추가 피해자가 있는지 등 죄다 의문투성이다. 심지어 5명은 신원조차 확인되지 않았다.

이 사건이 유독 흥미를 끈 건 피해자 다수가 성매매를 하는 젊은 여성이었던 점도 있다. 길고 4인과 이듬해 3월 발견된 여성 모두 20대 초ㆍ중반 나이에 온라인 등으로 성(性)을 파는 일을 했다. 경찰은 유일한 남성 피해자(17~23세 추정) 역시 여성 복장을 한 채 사체가 발견된 점으로 미뤄 비슷한 업종에 종사하다 변을 당했을 것으로 봤다.

◇꼬이는 수사… 경찰 “섀넌은 사고사”

뉴욕 서퍽 카운티 지방검사 토마스 스포타가 2011년 1월 25일 뉴욕 얍행크에 위치한 서퍽 카운티 경찰본청에서 ‘길고 4인’ 관련 브리핑을 하고 있다. 뉴스데이 캡처
뉴욕 서퍽 카운티 지방검사 토마스 스포타가 2011년 1월 25일 뉴욕 얍행크에 위치한 서퍽 카운티 경찰본청에서 ‘길고 4인’ 관련 브리핑을 하고 있다. 뉴스데이 캡처

‘실종된 콜걸’은 섀넌에게도 붙은 딱지였다. 사건 당일 자정, 그는 오크 해변에 위치한 고급 주택단지로 향했다. 전담 기사는 오전 2시쯤 섀넌을 첫 고객 조셉 브루어 집에 내려줬다. 그 집에 한참을 머물던 섀넌은 오전 5시 911에 전화를 걸어 “그들(they)이 나를 죽이려 한다”며 다급히 구조를 청했다. 그들이 누구인지, 3시간 동안 무슨 일이 발생했는지, 지금까지 규명된 진상은 없다. 브루어의 주장은 이렇다. “섀넌은 돌연 패닉에 빠졌고, 집에 돌아가라는 내 말을 무시한 채 집 밖으로 뛰쳐나가 어두컴컴한 해안로 쪽으로 사라졌다.” 섀넌의 행적은 30분 후 이웃 주택가에서 마지막으로 확인됐다. 주민들은 그가 여러 집 문을 세차게 두드리며 도와달라고 소리쳤고, 신고를 받고 경찰이 도착했을 땐 이미 사라진 뒤였다고 증언했다.

1년 7개월이 흘러 섀넌의 시신이 늪지대에서 모습을 드러내자 경찰은 실족에 따른 익사로 결론 내렸다. 길고 4인과 섀넌의 죽음간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다는 게 이유였다. 앞선 4명은 △황마 자루에 싸인 채 △완전히 매장됐고 △사인도 질식사(교살 추정)로 같았다. 반면 섀넌은 발견 당시 신체 일부가 땅 밖에 노출된 상태였다. 조울증을 앓던 그가 사건 당시 약을 복용하지 않았다는 사실도 사고사 판단에 무게를 실었다.

반전은 다시 일어났다. 경찰을 불신한 가족은 2016년 뉴욕 최고(最高) 의료검시관 마이클 바덴 박사를 고용, 재부검을 실시했다. 바덴은 “목뿔뼈 형태로 봤을 때 교살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할 수 없다”는 조심스러운 의견을 내놨다. 현재 가족 변호인 존 레이는 섀넌의 911 통화 녹음 파일(23분)을 미스터리를 풀 중요한 열쇠로 보고, 입수를 위해 경찰을 상대로 소송 중이다.

◇전직 경찰이 범인?

롱아일랜드 연쇄살인사건을 다룬 로버트 콜커의 베스트셀러 소설 ‘로스트 걸스’를 원작으로 한 동명의 영화가 다음 달 넷플릭스에서 개봉된다. 해당 장면은 섀넌 길버트의 엄마인 마리(에이미 라이언 분)가 보다 적극적인 실종자 수색을 요구하며, 경찰서 게시판에 딸의 실종 전단지를 붙이는 모습. 넷플릭스 유튜브 계정 캡처
롱아일랜드 연쇄살인사건을 다룬 로버트 콜커의 베스트셀러 소설 ‘로스트 걸스’를 원작으로 한 동명의 영화가 다음 달 넷플릭스에서 개봉된다. 해당 장면은 섀넌 길버트의 엄마인 마리(에이미 라이언 분)가 보다 적극적인 실종자 수색을 요구하며, 경찰서 게시판에 딸의 실종 전단지를 붙이는 모습. 넷플릭스 유튜브 계정 캡처

하지만 안타깝게도 섀넌의 죽음은 연쇄살인과는 무관한 쪽으로 정리되는 분위기다. 2016년 롱아일랜드 연쇄살인을 재조명한 미 대중문화지 롤링스톤은 “인터뷰한 수많은 사건 관계자들 가운데 누구도 섀넌을 살인 피해자로 믿지 않았다”고 보도했다. 같은 사건을 추적한 베스트셀러 소설 ‘로스트 걸스(Lost Girlsㆍ사라진 소녀들)’의 저자 로버트 콜커 역시 그를 연쇄살인 희생자로 여기지 않았다.

범인의 행방은 오리무중이다. 미 뉴욕타임스(NYT)는 “경찰 당국이 길고 4인의 죽음은 동일범 소행으로 보고 있다”면서도 “용의자를 특정하기는 어렵다”고 전했다. 연쇄살인범(들)이 남성이라는 점, 유기 수법 분석을 토대로 인근 지리에 밝은 롱아일랜드 출신일 가능성이 높다는 점 정도를 제외하고는 수사에 진척이 없는 상황이다. 또 성매매 특성상 피해자들이 경찰 단속을 피할 목적으로 대포폰을 쓰거나 주변 사람들에게 행선지를 숨긴 것도 용의자 추적을 어렵게 했다.

살인범도 치밀한 수법을 동원해 수사에 혼선을 줬다. 가령 2011년 4월 6번째 여성 시신과 7번째 2세 여아 시신은 해변 인근에서 불과 60m 거리를 두고 발견된다. 경찰은 당연히 둘을 모녀로 추정했으나 유전자 감식 결과, 여아의 친모는 그로부터 수㎞ 떨어진 존스 비치 주립공원에서 발견된 9번째 시신으로 밝혀진다. 이 사실을 알아내기까지 5개월이나 걸렸다. 사건 관할이 다르면 자료 공유 및 수사 공조에 한계가 있는 점을 간파하고 의도적으로 모녀의 시신을 떨어뜨려 유기했음을 짐작케 하는 대목이다. 일부 사법 전문가들은 이런 정황을 종합해 ‘전직 경찰 등 수사체계에 정통한 법 집행관’ 출신이 범인일 것이란 가설을 제시하고 있다.

그나마 범인을 남성으로 확신하는 건 ‘그놈 목소리’ 때문이다. 2007년 7월 희생자 중 한 명인 멜리사 바틀레미(당시 24)가 실종된 지 일주일이 지난 무렵, 여동생은 언니 휴대폰 번호로 걸려온 전화를 받는다. 상대 ‘남성’은 동생에게 욕설을 퍼부었고 이후에도 수차례 전화를 했다.

◇10년 만에 새 증거 나왔지만…

제럴딘 하트(앞) 서퍽 카운티 경찰국장이 지난 달 16일 기자회견을 열고 ‘롱아일랜드 연쇄살인범’과 관련한 새로운 증거를 공개하고 있다. 뉴욕타임스 캡처
제럴딘 하트(앞) 서퍽 카운티 경찰국장이 지난 달 16일 기자회견을 열고 ‘롱아일랜드 연쇄살인범’과 관련한 새로운 증거를 공개하고 있다. 뉴욕타임스 캡처

10년 동안 경찰은 침묵했다. 그렇다고 이슈 자체가 잠잠해진 것은 아니다. 미국 최대 커뮤니티 사이트 ‘레딧’ 등에서는 현재까지도 롱아일랜드 연쇄살인을 추적ㆍ조사하는 인터넷 탐정들이 활발히 활동하고 있다. 이들의 공통된 지적은 ‘초동수사 실패’에 모아진다. 작가 콜커는 “서퍽 카운티 경찰은 큰 사건을 감당할 여력이 없어 수사가 확대될수록 움츠러드는 것처럼 보였다”고 회고했다.

경찰이 피해자들의 직업 등을 문제 삼아 개별 사건간 연결고리를 면밀하게 살펴보지 않았다는 비판도 나온다. 2011년 미 CBS방송의 ‘48시간 미스터리’에 출연한 섀넌의 여동생 사라는 “경찰은 언니를 인격체가 아닌 그저 ‘사라진 매춘부’로 취급했다”고 울분을 토했다. 콜커 역시 “이들이 더 높은 사회계층에 속했다면 당국이 보다 적극적이고 신속하게 수사에 임했을 것”이라고 꼬집었다.

비난이 쏟아지자 경찰은 지난달 16일 오랜만에 새 증거물을 공개했다. 1.2㎝ 크기의 ‘WH’ 또는 ‘HM’ 이니셜이 새겨진 가죽 허리띠였다. 제럴딘 하트 서퍽 카운티 경찰국장은 “수사 초기 수집된 증거”라며 “용의자가 사용한 것으로 추정된다”고 설명했다. ‘증거물을 왜 여태껏 썩혀 뒀느냐’는 지적에 경찰은 “이제부터 온라인 제보를 적극 활용하고자 전담 홈페이지(gilgonews.com)를 개설했다”는 동떨어진 답변만 내놨다. 여론에 떠밀려 증거품은 공개했으나 해당 단서를 기반으로 수사에 속도를 낼 방향성은 전혀 제시하지 못한 것이다.

수사와 별개로 사건 해결을 위해 관심의 끈을 이어가려는 노력은 계속되고 있다. 내달 중순에는 로스트 걸스를 원작으로 한 동명의 영화가 동영상 스트리밍서비스 업체 넷플릭스에서 개봉된다. 섀넌의 죽음에 대한 해답을 찾으려 고군분투하는 어머니 마리 길버트가 주인공이다. 지난달 열린 제36회 선댄스 영화제에서 리즈 가버스 감독은 “저 어딘가에 정의가 아직 남아있기를, 그리고 영화가 대중의 주목을 받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최나실 기자 verit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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