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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지의 뜻밖의 미술사] 전염병 앞에서, 이성은 잠들고 악마는 깨어났다

입력
2020.02.20 18:00
수정
2020.03.11 17:13
2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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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야의 ‘채찍질 고행단의 행렬’-

고야, ‘채찍질 고행단의 행렬’, 1812-14, 나무에 유채, 46 x 73 cm, Real Academia de Bellas Artes de San Fernando (출처 Wikipedia)
고야, ‘채찍질 고행단의 행렬’, 1812-14, 나무에 유채, 46 x 73 cm, Real Academia de Bellas Artes de San Fernando (출처 Wikipedia)

몇 년 전에 사스와 메르스 확산으로 우리 사회가 한바탕 홍역을 치르더니, 올해 또다시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가 사람들을 공포로 몰아넣고 있다. 전염병 하면 무엇보다도 서양 중세에 크게 유행한 흑사병이 떠오를 것이다. 1346년에서 1353년 사이 유행한 대흑사병은 당시 유럽 인구를 3분의 1 정도 감소시키고, 중세의 봉건제까지 송두리째 무너뜨린 인류사의 대참사였다.

여기저기서 사망자가 속출하자, 부자들은 교회를 건축하여 봉헌하고 미술품들로 교회를 장식함으로써, 신에게 구원을 갈구했다. 한편, 흑사병을 인간의 죄에 대한 신의 징벌로 생각하고, 자신의 몸에 채찍질을 함으로써 참회하는 채찍질 고행단도 등장했다. 이들은 옷도 갈아입지 않고 씻지도 않았으며 아무데서나 자는 비위생적인 생활, 채찍질 상처로 인한 염증 때문에 쉽게 흑사병의 숙주가 되었고, 결과적으로 전염병을 더욱 널리 퍼트리게 된다.

일찌감치 교회에 의해 금지되었지만 이 풍습은 오랫동안 계속되었고, 지금도 일부 유럽 도시에서는 사순절에 흰색 가면을 쓰고 고행단의 행위를 흉내 내는 행진을 한다. 위 그림은 19세기 초, 프란시스코 고야가 그린 채찍질 고행단의 행렬 모습이다.

이 그림은 고야가 인간의 무지와 광신, 교회의 타락을 비판하기 위해 그린 연작 중 하나다. 화면에 검은 옷을 입고 무릎을 꿇은 사람들, 나무 십자가를 지고 가는 사람들, 성모 마리아의 동상을 옮기는 사람들이 보인다. 중앙의 뾰족한 모자를 쓰거나 흰 천으로 얼굴을 가린 반나체의 남자들은 그들의 등에 무자비한 채찍질을 하여 광란의 분위기를 주도하고 있다. 등에서 허리춤에 걸쳐진 흰옷까지 흘러내리는 붉은 피는 종교적 광신이 빚어낸 인간의 비이성과 잔인성을 표현한다.

밝고 화사한 색채로 왕족과 귀족 초상화를 그리던 궁정 화가 고야는 1792년 귓병을 앓으면서, 인간과 사회에 대한 냉소적이고 비관적인 견해를 갖게 되었다. 작품에서도 인간의 무지, 우매함, 탐욕을 조롱하는 어둡고 부정적인 경향을 보여 준다. 특히, 고야는 종교적 광신을 경멸했고 이를 풍자하기 위해 많은 그림과 판화를 제작했다. 고야의 눈에는 채찍질 고행단의 피를 줄줄 흘리는 자기 학대 행위 역시 어리석음과 무지의 산물로 보였을 것이다.

우리는 더 이상 신에게 기도하거나 채찍질로 회개하는 방식으로 전염병을 피할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대신, 중세, 혹은 고야의 시대와는 또 다른 종류의 비이성과 무지가 사람들을 잠식하고 있다. SNS를 통한 가짜 뉴스, 각종 음모론과 루머, 그리고 인종차별이 그것이다. 미국과 유럽에서는 중국인과 아시아인에 대한 인종차별 사건이 일어나고 있고, 심지어 독일의 슈피겔같이 권위 있는 언론까지 부적절한 인종주의적 표지로 논란을 일으키고 있다. 이러한 것들은 당시 흑사병의 원인이 쥐에 기생한 쥐벼룩이라는 것을 몰랐던 사람들이 부랑자, 유대인, 한센병 환자, 외국인 등이 전염병을 일으킨다고 생각하고, 집단적인 폭력이나 학살을 자행한 것과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다.

중세 흑사병은 역사에서 자취를 감췄다. 그러나 아무리 과학기술이 발달해도 영원히 전염병과 바이러스에서 벗어날 수 없는 생물학적 숙명 앞에, 인간의 이성은 중세 때나 지금이나 초라하기만 하다. 고야가 말했듯이, “이성이 잠들면 악마가 깨어난다.”

김선지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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