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축구 신(申)바람
※ 인사할 때마다 상대를 축복(슬라맛)하는 나라 인도네시아. 2019년 3월 국내 일간지로는 처음 자카르타에 상주 특파원을 파견한 <한국일보>는 격주 목요일마다 다채로운 민족 종교 문화가 어우러진 인도네시아의 ‘비네카 퉁갈 이카(Bhinneka Tunggal Ikaㆍ다양성 속에서 하나됨을 추구)’를 선사합니다.
14일 밤 자카르타 도심 마드야 경기장. 70명이 넘는 취재진이 한 사람을 에워쌌다. 취임 후 국가대표(A)팀 34명을 선발하고 이날 처음 소집한 신태용(50) 인도네시아 축구대표팀 감독은 “5명 빼고 다 바꿨다”고 했다. 2시간 훈련을 마친 프라타마 아르한(19) 선수는 “19세 대표팀도 처음인데 바로 국가대표로 뽑히다니 꿈 같다.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현지에선 신 감독의 선수 기용을 개혁의 신호탄으로 받아들인다.
인도네시아 매체에 최근 축구 소식이 부쩍 늘었다. ‘신태용의 숙제’ ‘이슬람 배운 신태용’ ‘국가대표 세대 교체, 파격’ 등 신 감독의 일거수일투족과 그가 뽑은 대표팀의 면면을 조명하고 있다. 축구를 어느 나라 못지않게 사랑하지만 성적이 시원치 않아 그간 접었던 기대를 다시 품는 분위기다. 바야흐로 인도네시아에 ‘축구 신(申)바람’이 불고 있다.
정식 취임 한 달을 맞은 신 감독을 최근 그의 숙소에서 단독 인터뷰했다. 그는 19세 이하 대표팀과 열흘 넘게 태국 전지훈련을 다녀오는 등 바쁜 일정을 소화했다. 14~23일엔 국가대표팀을 소집해 한 달도 더 남은 월드컵 2차 예선(첫 경기 3월 26일 태국전)에 대비하고 있다. ‘이른 소집은 인도네시아축구협회(PSSI)의 전폭적인 지지 덕분’이라고 현지 매체들은 평한다.
-하필 인도네시아인가.
“마음 가는 대로 왔다. 좋은 팀은 누구나 맡을 수 있지만 뒤쳐진 팀은 자신과 싸울 기회라 여겼다. 지난해 7월 PSSI가 대한축구협회에 내 이름을 콕 집어 연락했다. 넉 달 뒤 PSSI 관계자들을 말레이시아에서 만난 뒤 인도네시아 경기를 챙겨봤다. 경기 60분 뒤부터는 선수들이 안 보이더라. 속된 말로 체력이 거지 같다. 체력이 약하면 기술력도 정신력도 다 소용없다. ‘그래, 일단 체력을 끌어올리자’는 답이 나왔다.”
-체력을 어떻게 키울 것인가.
“(태국에서) 일주일간 지켜보니 훈련 습관이 안일하고 승부 근성이 없더라. 신발끈 매고 물 마시고 바나나 먹고 20분 넘게 준비만 한다. 골을 먹었는데 누구도 애석해하지 않는다. 탄수화물 위주의 식습관도 바꿔야 한다. 고기를 더 퍼주고 있다. ‘스포츠는 2등 하면 핑계밖에 안 된다’는 생각을 주입하고 있다. 갈 길이 멀어서 4년 계약했다. 젊은 선수들 위주로 조금씩 달라지는 게 보인다.”
-한달 금식(라마단), 하루 5번 기도 등 이슬람 문화도 걸림돌일 텐데.
“안선근 국립이슬람대 교수에게 오자마자 3시간 이슬람 특강을 받았다. 종교와 문화는 최대한 존중하려 한다. 기도시간은 훈련에 차질이 없도록 융통성 있게 관리하고 있다. 라마단 역시 PSSI와 상의해 대안을 마련하겠다.”
-선수 선발 외압 문제도 고질로 지적된다.
“PSSI가 내게 전권을 줬다. 계약 사항에 못박았다. 외압 같은 건 없을 것이다. 이번에도 신체 조건과 체력이 좋은 젊은 친구들로 A팀을 싹 바꿨다. 내 축구 철학에 지역이나 출신을 따지는 건 없다. 세대 교체가 없으면 좋은 성적도 없다.”
-선수들과의 관계는 어떤가.
“훈련장에서는 감독이라는 명함을 내려놓는다. 감독과 선수라는 벽을 쌓는 걸 경계한다. 어떤 선수가 생일이라면서 ‘피자, 피자’ 하길래 피자 40판을 돌렸다. 다음부터는 ‘저도 생일’이라고 찾아오더라. 훈련장에서 농담도 건네고 여유롭게 하려고 한다. 체력훈련만큼이나 교감이 중요하다. 소통을 잘한 감독으로 남고 싶다.”
-올해 목표는.
“없다. 19세 이하 젊은 선수들의 체력을 키우면서 내년 인도네시아에서 열리는 국제축구연맹(FIFA) 20세 이하(U-20) 월드컵 준비를 제대로 하는 게 목표라면 목표다. 다만 2022 FIFA 카타르 월드컵 2차 예선 세 경기를 잘 마무리하고 싶다. 이미 예선에서 탈락(5전 전패, 3득점 16실점)했지만 남은 경기에서 승점을 챙겨야 한다. 인도네시아 국민에게 ‘축구란 이런 것이다’ 하는 걸 보여주고 싶다.”
월드컵 2차 예선 상대 세 팀 모두 FIFA 순위가 인도네시아에 앞서고, 특히 마지막 경기는 베트남(6월 4일)과 맞붙는다.
-박항서 감독이 있는 베트남과 비교될 텐데.
“신경 안 쓴다. 인도네시아는 사회주의와 유교문화가 밴 베트남과 다르다. 박 감독과 나는 지도 방식도 다르다. 지도자 생활을 오래 해서 그런지 말 만들어 비교하는 세태, 비판 받는 일에 익숙하다. 승리를 위해 나름대로 연구하고 노력할 뿐이다. 긍정 마인드가 내 장점이다.”
인도네시아에는 신 감독 이전에도 신(申)바람이 있었다. 신승중(47) 인도네시아 태권도 품새 국가대표 감독이다. 그가 키운 데피아 로스마니아(24) 선수는 ‘2018 자카르타-팔렘방 아시안게임’ 태권도 품새 개인전에서 금메달을 땄다. 당시 인도네시아의 대회 첫 금메달이자 인도네시아 태권도 역사에 새겨진 아시안게임 첫 금메달이다. 태권도를 배우는 인도네시아 전역의 현지인들에게 신승중 감독과 데피아 선수는 영웅이다. “두 신 감독이 형제냐”고 묻는 현지인도 있다.
신승중 감독은 햇수로 10년을 공들였다. 그는 같은 평산 신씨인 신태용 감독을 이렇게 응원했다. “경기에 지더라도 선수와 감독이 교감하면서 팀워크와 투지를 보여준다면 인도네시아 국민은 감동할 것이다. 그게 인도네시아다.” 신태용 감독이 화답했다. “밑바닥에서 올라가는 축구를 통해 인도네시아 국민에게 희망을 주겠다.” 신바람을 기대한다.
자카르타=글ㆍ사진 고찬유 특파원 jutda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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