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준호 감독이 9일(현지시간) 미 캘리포니아주 로스앤젤레스의 돌비 극장에서 열린 제92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영화 '기생충'으로 받은 감독상, 국제영화상을 들고 기자실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로스앤젤레스=AP 뉴시스

“1인치 자막의 장벽을 뛰어넘으면 훨씬 더 많은 영화를 즐길 수 있다.” 멋진 얘기다. 봉준호 감독의 이 발언 뒤에는 미국인이 자막 읽는 것을 꺼리는 현실이 담겨있다. 미국 영화시장에서 비영어권 작품이란, 찾아보는 것 자체가 어렵다. 미국은 자국 영화 상영 비중이 93%에 이른다. 한국은 50% 수준이다.

그러니 92년 아카데미상 역사에서 비영어권 작품이 작품상이나 감독상을 받은 것조차 손에 꼽을 정도다. 한국영화는 단 한 번도 후보에 조차 오르지 못했다. 영화 ‘기생충’이 작품상, 감독상, 각본상에 국제장편영화상까지 동시에 수상한 것은 영화사에 길이 남을 진기록이다. 코로나19 사태로 전세계가 위축되고 있지만, 이 와중에도 아카데미 수상 소식에 힘입어 영화 ‘기생충’의 흥행 열기는 전세계로 퍼지고 있다.

현대자동차를 구입한 외국인이 울산공장을 방문하고 싶다는 이야기는 들어보지 못했다. 그러나 ‘기생충’에 등장하는 피자집과 슈퍼 앞에는 연일 외국인들의 행렬이 이어지고 있다. 이것이 바로 영화의 힘이다.

◇’실패한 신인’ 봉준호를 찾아라

대구 대명동의 봉 감독 생가를 복원하면 ‘제2의 기생충’이 만들어질까. 충무로를 이 잡듯 뒤져 뛰어난 감독을 찾으면 또 다른 아카데미상을 받을 수 있을까. 절대 그렇지 않다.

우리가 지금 해야 할 일은 ‘기생충을 만든 봉준호’를 찾는 게 아니라 재능은 있지만 ‘플란다스의 개’를 만들고 흥행에는 실패한 ‘신인감독 봉준호’를 찾는 것이다. 영화산업적 측면에서 무엇을 어떻게 하면 좋을까.

먼저 ‘봉준호펀드’를 만들자.

신인감독, 신인작가, 신생제작사에 직접적으로 제작비 혜택을 줄 수 있는 펀드를 만들어서 유망한 신인들이 작품활동을 할 수 있도록 지원하자. 창의적 감독 후보들을 발굴하고 지원하는 제작사가 늘어나야 또 다른 봉준호가 탄생한다. 유명 감독과 제작사에는 돈이 몰리는 반면, 신인들 시나리오는 투자회사에 제안하기조차 힘들다. ‘기생충’은 양극화 사회의 부조리를 보여주어 전세계적 공감을 얻고 있지만, 그 양극화는 영화계의 씁쓸한 뒷모습과 묘하게 닮아 있다. 펀드를 만들어 신인들에게 도전 기회를 주는 직접적인 제도가 필요하다.

둘째, 제작사와 투자사에 세제혜택을 주자.

자동차, 반도체 같은 첨단산업의 발전 이면에는 대규모 연구개발비가 필수적이고 이 비용은 정부의 세제혜택으로 상당 부분 보전된다. 그러나 창작산업의 연구개발비용은, 그 성격은 비슷한데 세금이나 재무회계상 혜택이 없다. 제작사는 원작을 구입하거나, 작가와 감독에게 초기 계약금(감독에게는 거의 유일한 수입이다)을 줘야 하는 등 초기 비용을 거의 홀로 부담해야 한다. 경험 많은 노련한 제작자들도 평균 5편 이상의 영화를 기획해야, 겨우 한편 정도 실제 제작에 들어갈 정도로 영화 만들기는 힘든 일이다. 이 때문에 창작활동 초기비용은 사실상 제작사와 창작자의 끝없는 희생에 기대고 있다.

어쩌다 흥행에 성공해 수익이 생겨도 그간 쌓인 빚을 갚느라 정작 남는 돈은 얼마 되지 않는다. 영화 창작을 위한 초기 비용을 과감하게 연구개발비로 인정하고 세제혜택을 주자. 콘텐츠 산업이 튼튼해지면 그 혜택은 초코파이, 라면, 화장품, 스마트폰, 자동차 등 한국의 모든 상품이 누린다. 세제혜택은 다른 산업의 성장으로 충분히 갈음된다.

◇이미경 부회장의 역할, 인정하자

셋째, 세계시장으로 무대를 넓히자.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투자회사 대표자가 수상 소감한 것을 두고 적절성 논란이 있었다. 창작자들 잔치인 영화제에서 왜 기업 대표가 수상소감을 했느냐는 지적은 그간 관행으로만 보면 나올 수도 있다고 본다.

영화 '기생충'이 9일(현지시간) 미 캘리포니아주 로스앤젤레스의 돌비 극장에서 열린 제92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작품상을 받아 이미경(미키리) CJ그룹 부회장이 무대에 올라 수상 소감을 말하고 있다. 로스앤젤레스=AP 뉴시스

그러나 영화는 창작의 우수성만으로는 세상에 나올 수 없다. 대규모 자본이 지속적으로 투자돼야 겨우 한편이 만들어진다. 그리고 국내에 머물지 않고 아카데미 같은 세계 무대로 나아 가려면 기업가적인 안목과 장기 투자가 필수조건이다.

단지 투자회사 대표 자격이 아니라, 비영어권 영화를 세계 무대에 내 보내기 위해 오랜 기간 후원해 온 기업인의 연설은 충분히 그 자격이 있다. 세계적 창작자들과 거대 스튜디오 자본이 결합된 할리우드 무대에서, 변방의 작은 나라에서 온 봉준호 감독과 투자회사 대표자가 함께 무대에 올라 소감을 말하는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오히려 미국의 유수 언론들은 봉 감독뿐 아니라 투자회사와 그 대표의 역할에 대해서도 관심을 보이고 있다. 한국 영화가, 한류 컨텐츠가 세계 시장으로 넓혀 가려면 창작자 못지 않게 기업의 역할도 중요하기 때문이다.

한국영화는 전체 수입의 75%를 극장에서, 20%를 케이블방송(IPTV)에서 벌어들인다. 나머지 4~5% 정도가 해외수출이다. ‘기생충’은 한국에서 1,000만 관객을 동원한 수입을 넘어서는 돈을, 이미 해외에서 벌어들이고 있다. 아시아권이나 특정 지역에 한정되지 않고 유럽, 북미, 남미까지 흥행 열기가 이어지고 있다. 한국 영화의 세계시장 성공 가능성을 열었다는 점만으로도 아카데미 수상 이상의 큰 의미가 있다.

국내 영화시장은 2013년 관객 2억명을 돌파한 이후 7년 동안 관객수가 정체되어있다. 사실상 성장이 한계에 도달했다. 우수한 창작물이 지속적으로 나오려면 기업의 투자도 따라야 하고, 시장도 함께 커져야 가능하다. 이 부분이 바로 한국 기업들이 해야 할 일이고, 또 해외 시장이 필요한 이유이다.

◇안방시장 그냥 내줘선 안 된다

또 미국의 거대 기업들은 스크린을 넘어 온라인 스트리밍 시장으로 영역을 확대하고 있다. 선발업체 넷플릭스가 이미 한국에서 200만이 넘는 가입자를 확보했고, 다른 경쟁사들도 앞다투어 한국시장에 진출할 예정이다. 우리나라 안방 시장이 외국회사에 모두 넘어가면, 한국 창작물의 글로벌 시장 진출은 극소수 창작자에게만 기회가 주어질 것이고, 젊은 신인들은 더욱 배제될 것이다.

모처럼 글로벌 시장 진출에 호기를 맞은 한국영화가 국내 창작과 산업 생태계를 돌아보며 더욱 긴장해야 하는 시점이다. 프랑스, 독일은 온라인 스트리밍 회사들이 자국 시장에서 벌어들인 매출액의 일정 부분을 자국 컨텐츠 투자에 쓰도록 법제화했는데, 이는 우리 정부가 참고해볼 만한 대목이다.

마지막으로, 촬영을 위한 하드웨어를 만들자

중국 영화의 거장 장이모우 감독의 ‘영웅’은 전세계가 주목하고 미국에서도 흥행한 사극 영화다. 이 영화에서 가장 화제가 된 것 중 하나가 거대한 자금성의 모습이다. 실제 촬영은 상하이 인근 작은 도시 헝디엔의 세트장에서 진행됐다. 이 세트장에는 실물 80% 크기의 자금성을 비롯, 진나라 황궁, 송나라 거리, 홍콩과 광둥의 옛거리 등이 수백만평의 부지에 구현되어 있다.

각종 영화, 드라마 촬영 등으로 헝디엔 세트장은 연중 쉬는 날이 없다. 한국 영화 ‘암살’도 여기서 촬영됐다. 미국 또한 대형 스튜디오들마다 자체 세트장을 보유하고 있다. 1900년대 초반의 뉴욕 옛 거리를 고스란히 재현해둔 파라마운트의 세트장은 한국 영화인들에겐 그저 부럽고 또 부럽기만 한 곳이다.

우리에게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창덕궁, 종묘와 같은 아름다운 건축물이 많지만, 촬영장으로 쓸 수 없다. 문화재 보호 때문이다. 우리도 시대물을 쉽게 촬영할 수 있도록 세트장을 만들자. 지금까지 한국영화는 작품에 필요한 세트를 일회성으로 만들어 쓰고 버렸다. 쉽게, 싸게 이용할 수 있는 좋은 세트장이 있다면 창작자들은 더 쉽게 상상의 나래를 펼 수 있고, 한류산업의 토대를 더욱 단단히 만들 수 있다. 영화표 값의 3%를 떼서 영화발전기금을 만드는 정부의 역할이 필요한 부분이다.

◇’기생충’은 영화를 아낀 국민의 힘

세계에서 영화를 가장 많이 보는 국민은 누구일까. 대한민국 국민이다. 우리 국민은 연평균 4.2회 영화를 본다. 영화의 나라 미국이 3.5회, 일본이 1.2회, 중국은 0.8회다. 한국인들을 정말 영화를 사랑한다. ’기생충’의 아카데미 4관왕은 세계 영화사에 길이 남을 기록이지만 그 뒤엔 영화를 너무 사랑한 우리 국민들이 있음을, 영화인들 또한 잊지 말아야 한다.

이상무 엠컨텐츠랩 대표

※글을 쓴 이상무 엠컨텐츠랩 대표는 15년간 CJ엔터테인먼트, 롯데엔터테인먼트에서 일하며 ‘부당거래’ ‘아저씨’ ‘방자전’ ‘마더’ ‘신과 함께’ ‘완벽한 타인’ 등의 영화를 투자제작한 영화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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