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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일본, 다른 일본] ‘사회파’ 부재의 일본 영화계에 자성의 계기, 봉준호의 ‘기생충’

입력
2020.02.19 04:30
2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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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준호 감독이 ‘기생충’으로 이룬 쾌거가 일본 영화계에서는 영화의 사회적 기능을 등한시하는 모습을 돌아보는 계기가 되고 있다. 한국과 일본 영화의 상반된 모습은 비슷한 것 같으면서도 크게 다른 한국과 일본 문화의 축소판이기도 하다. 일러스트 김일영
봉준호 감독이 ‘기생충’으로 이룬 쾌거가 일본 영화계에서는 영화의 사회적 기능을 등한시하는 모습을 돌아보는 계기가 되고 있다. 한국과 일본 영화의 상반된 모습은 비슷한 것 같으면서도 크게 다른 한국과 일본 문화의 축소판이기도 하다. 일러스트 김일영

봉준호가 만든 일본어 영화, <흔들리는 도쿄>(2008)

봉준호 감독의 작품 중에 비교적 덜 알려진 ‘흔들리는 도쿄ㆍShaking Tokyo’(2008)라는 단편 영화가 있다. 프랑스의 미셸 공드리, 레오 까락스 감독과 엮은 3부작 ‘도쿄!’에 포함된 한 편인데, 도쿄를 배경으로 서로 다른 세 이야기를 엮은 이 옴니버스 영화는 개성파 감독들의 몽환적인 연출이 어우러져서 기묘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이 영화는 그 해 칸 영화제의 ‘주목할 만한 시선’ 부문에 선정되었지만, 말 그대로 주목만 받고 끝났다. 제목에 도쿄라는 지명이 들어가지만 일본에서도 잘 알려진 영화는 아니다.

봉준호 감독의 골수팬이 많은 우리나라에서도 이 영화가 자주 회자되지 않는다. 아마 일본 배우가 처음부터 끝까지 일본어로 연기하는, 표면상으로는 100% 일본 영화이기 때문일 것이다. 남자 주인공은 가가와 데루유키, 여자 주인공은 미소녀 시절의 아오이 유우, 영화 ‘쉘 위 댄스’등에서 코믹 연기로 눈길을 끈 다케나카 나오토도 잠깐 출연한다. 히키코모리(은둔형 외톨이)라는 심각한 사회 문제를 정면으로 다루면서도 판타지와 로맨스를 아름답게 버무려 놓아서, 봉준호의 필모그래피 중에서도 감성이 독특하다.

히키코모리를 주제로 삼은 만큼 사회적으로 고립된 젊은이들의 우울한 이야기를 상상하기 쉽지만, 일본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봉준호 감독은 “일반적인 인식과 정반대로 그리고 싶었다”고 말한다. 그가 묘사하는 주인공은 “자신이 히키코모리라는 점에 대해 자부심이 높고, 예술의 영역에 달할 정도로 기하학적으로 ‘완벽하게’ 방을 정리하는 깔끔한 사람”이다. 히키코모리는 자신감이 부족하고 지저분한 방에서 무기력하게 널브러져 있는 사람이라는 부정적 선입견을 보기 좋게 뒤엎는다. 그렇다고 영화가 사회적으로 고립된 그들의 삶을 정당화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타인과 부대끼는 삶이야말로 불편함을 감내할만한 가치가 있다는 메시지를 전달한다. 영화를 보지 않은 사람들을 위해 스포일러는 여기에서 멈추는 것이 좋겠다.

봉준호의 작품에 더해, 미셸 공드리의 ‘인테리어 디자인’, 레오 까락스의 ‘메르드’까지 옴니버스 3부작 ‘도쿄!’는 이방인의 눈을 통해 일관되게 일본 사회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 의식을 드러낸다. 초현실적 영상미를 추구하되 그를 통해 강렬한 사회적 메시지를 전하는, 영화라는 장르의 위력이 새삼 돋보이는 작품이다.

봉준호 감독과 함께 3부작 <도쿄!>를 제작한 미셸 공드리(왼쪽)와 레오 까락스(가운데) 감독. 영화사 제공
봉준호 감독과 함께 3부작 <도쿄!>를 제작한 미셸 공드리(왼쪽)와 레오 까락스(가운데) 감독. 영화사 제공

 ‘놀이 기구화’하는 일본 영화에 대한 비판 

영화사에 길이길이 회자되는 명작 ‘라쇼몽’(1951)의 구로사와 아키라에서 시작해, 오즈 야스지로, 미조구치 겐지, 이마무라 쇼헤이 등 일본은 세계적으로 작품성을 인정받는 영화 감독을 끊임없이 배출했다. 가깝게는 칸 영화제에서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영화 ‘어느 가족’(2008)이 황금종려상을 수상했다. 굳이 영화제를 들먹이지 않아도 독특한 주제 의식과 디테일한 영상미가 돋보이는 일본 영화가 적지 않아, 한국에도 팬이 많다.

그런데 일본 영화계에 사회 문제를 정면에서 다루는 소위 ‘사회파’ 영화가 눈에 띄게 줄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설혹 그런 영화가 있어도 대중의 반응이 시들하다. 빈곤 문제를 꼬집은 ‘어느 가족’도 일본 국내 흥행은 성공적이었지만, 영화 속에서 그려진 유령 연금이나 아동 빈곤 문제가 사회적 어젠다로 떠오르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세계에서 주목 받는 일본 영화가 적어진 것도 많은 이의 공감을 이끌어내는 힘이 있는 ‘사회파’ 영화가 시들해졌다는 점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좀더 꼬집어 말하자면, 일본의 관객은 영화에 사회적 메시지를 기대하지 않는다. 영화를 볼 때만이라도 골치 아픈 세상살이와 거리를 두고 싶다는 것인데, 그만큼 ‘영화는 오락’이라는 이미지가 확고하다고도 하겠다. 예를 들어, 지난해 일본 흥행 수위는 예외 없이 자녀와 함께 보는 애니메이션이나 대중적인 아이돌 스타를 주연으로 내세운 오락 장르였다.

한국인 배우 심은경이 일본인을 연기한 ‘신문기자’라는 영화가 필자의 주변에서 유일하게 화제가 된 ‘사회파’ 영화인데, 2019년 일본 전체 흥행 순위에서는 60위권 밖의 초라한 성적이다. 관객의 반응이 시들하니 그런 영화를 만들겠다는 동기 부여도 옅어질 수밖에 없을 터이다.

영화가 오락성을 추구한다는 것이 왜 비난받아야 하겠느냐마는, 그 배경에 연예 산업의 구조적 모순이 버티고 있다는 점에서 비판이 제기된다. ‘박치기’(2005), ‘훌라걸스’(2006) 등 오락성과 사회성을 겸비한 좋은 영화를 만든 제작자의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그의 말에 따르면 일본에서는 영화가 대형 연예 기획사가 연예인을 띄우는 수단으로 기획되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연예인의 이미지에 맞게 영화의 장르, 출연진, 각본 등을 모두 결정한 뒤 계획에 잘 맞추어 찍어주는 영화 감독을 수소문하는 웃지 못할 상황도 자주 있다고 한다.

영화 자체의 작품성보다 연예인의 상품성을 먼저 고려하는 영화는, 광고를 찍거나 팬덤을 유지하는 데에 유리한 이미지를 만드는 데에 중점을 둔다. ‘사회파’ 영화가 날개를 펼칠 여지가 적고, 설혹 기회가 주어진다고 해도 많은 부분에서 상업적 타협을 요구 받는다. 모든 일본 영화가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대형 기획사와 방송국의 상대적으로 강한 연예 산업의 구조적 영향을 피해갈 수 있는 여지가 적은 것도 사실인 것 같다.

앞서 언급한 영화 ‘신문기자’만 해도, 일본인 배우들이 ‘정부에 맞서 싸우는 기자’라는 이미지가 부담스러워 캐스팅을 피했다는 말이 공공연히 돈다. 서른 셋이라는 젊은 나이에 이 영화로 일본 아카데미상 우수 감독상을 거머쥔 후지이 미치히토 감독조차도 “정치적 메시지가 부담스러워서, 감독 제안을 거절했었다”고 비화를 밝힐 정도이다.

좋은 ‘사회파’ 영화가 적어지니 자연스레 그런 영화를 기대하는 팬도 줄어든다. 이런 악순환이 계속되는 가운데, 4D영화나 VR(가상 현실) 기술을 이용한 체험형 영화의 인기는 상승 중이라는 소식이 들린다. “영화의 위상이 디즈니랜드의 놀이 기구 정도로 쪼그라드는 것이 아닌가”라는 탄식이 나올 만하다.

봉준호 감독이 2008년 히키코모리를 주제로 연출한 <흔들리는 도쿄ㆍShaking Tokyo>의 한 장면. 영화사 제공
봉준호 감독이 2008년 히키코모리를 주제로 연출한 <흔들리는 도쿄ㆍShaking Tokyo>의 한 장면. 영화사 제공

영화 <기생충>이 일깨운 ‘사회파’ 영화의 저력

한때 문화계 ‘블랙리스트’에 이름을 올렸지만, 쉼 없이 ‘사회파’ 영화를 만들어 온 봉준호 감독의 쾌거가 일본 영화계에 스스로를 돌아보는 계기가 되고 있다. “과거의 영광에 집착하지 말고, 사회 문제에 대해 비판적인 목소리를 낼 줄 아는 한국 영화를 본받아야 한다”는 자성적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돌이켜 보면, 한국 영화의 ‘사회파’ 지향은 숙명이었다. 일제 시대에 개봉한 무성 영화 ‘아리랑’(나운규 감독, 1926년)에서는 내레이션을 맡은 변사가 일본인 순사의 감시를 피해서 “주인공이 젊은 시절 독립 운동을 했다가 핍박을 받았다”라는 내용을 읊었다는 에피소드가 있다. 일본 식민지 시대를 어렵게 넘긴 뒤에도 시련은 계속되었다. 한국 전쟁 때에는 촬영 장비와 스튜디오 등 넉넉지 않던 물질적 기반이 유실되었고, 군사 정권 시기에는 마구잡이 검열로 외상을 입었다.

불과 몇 년 전까지 ‘블랙리스트’라는 시대착오적인 탄압이 자행될 정도이니, 시장 경제의 풍요로움과 관대함 속에서 순조롭게 성장한 일본 영화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험한 제작 환경이었다. 어떻게 보면 덕분에 한국 영화가 단단해졌다. 정치 문제를 외면할 정도로 상황이 한가롭지 않다 보니, 사회적 발언대를 자처하는 길을 택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사회파’를 지향하는 것이 좋은 작품의 필요 조건은 아니다. 엄청난 제작비를 들인 ‘국뽕’ 영화가 초라한 작품성으로 조롱받는 일도 적지 않은 만큼, 한국 영화계는 과한 사회적 메시지가 때때로 작품의 완성도와 서사의 세련됨을 해친다는 의견에 귀를 기울일 필요도 있을 듯하다. 그런데 일본 영화계는 정반대의 과제를 안고 있다. 표현의 디테일과 오락성에 집착하다 보니, 영화라는 장르의 사회적 가능성을 축소시켰다는 비판을 면하기 어렵다. 한국 영화의 강점이 일본 영화의 약점, 거꾸로 한국 영화의 약점이 일본 영화의 강점이라고도 할 수 있으니, 참으로 묘하다.

김경화ㆍ칸다외국어대 준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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