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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영의 다른 생각] 책이 친구인 이유

입력
2020.02.17 18:00
수정
2020.02.17 18:36
2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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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이 우리와 동행한 긴 역사를 돌이켜 보면, 책은 우리의 가까운 친구였다. 우선 누가 뭐라 해도 책은 항상 유익했다. 책은 필요한 정보와 의미를 전달하는 가장 대표적인 매체였다. 우리는 책을 통해서 자신을 돌아보고 앞으로 계속 달려나갈 자세를 고쳐잡을 수 있었다. 그만한 선생이 또 어디에 있었는가. 책이 아니었으면 누가 여기까지 올 수 있었겠는가. ©게티이미지뱅크
책이 우리와 동행한 긴 역사를 돌이켜 보면, 책은 우리의 가까운 친구였다. 우선 누가 뭐라 해도 책은 항상 유익했다. 책은 필요한 정보와 의미를 전달하는 가장 대표적인 매체였다. 우리는 책을 통해서 자신을 돌아보고 앞으로 계속 달려나갈 자세를 고쳐잡을 수 있었다. 그만한 선생이 또 어디에 있었는가. 책이 아니었으면 누가 여기까지 올 수 있었겠는가. ©게티이미지뱅크

어떤 개념이든 쪼개고 나누어서 생각하는 철학의 습관은 고대 그리스의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해 그 얼개가 거의 완성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분석과 분류의 왕이다. 그는 무엇인가 눈앞에 나타나면 일단 조각조각 자르고 본다. 중세의 철학자들이 개념과 주제와 질문을 나누고 또 나누면서 엄청난 분량의 논쟁적 저술을 쏟아낼 때 그들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충실한 제자였던 셈이다. 물론 분석에 대한 이들의 사랑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다. 나누고 모으고 또 나누고 모으다 보면, 처음에는 뿌옇게만 보였던 대상들이 비교적 또렷하게 자기 모습을 드러내는 경우가 많은 법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윤리학 저술에서 우애의 문제를 다룬 바 있는데, 여기서도 그는 당연히 일단 여러 종류로 나누면서 시작한다. 그는 친구에는 그리고 친구에 대한 사랑으로서의 우애에는 세 종류가 있다고 말한다. 첫째로는 이익으로 매개되는 친구가 있다. 서로 유익함을 주고받으면서 유지되는 관계이다. 물론 이를 나쁘게 볼 필요는 전혀 없다. 친구들 사이에서 어떤 형태이든지 도움을 주고받는 것은 지극히 정상적일 터이다. 둘째로는 즐거움 덕분에 유지되는 친구 관계가 있다. 어떤 이득이나 효용이 개입하지는 않지만, 가끔 만나도 하염없이 즐겁기만 한 친구들이 있기 마련이다. 왜 만나는지 가끔 돌이켜 생각해보면 허전한 마음이 엄습하기도 하지만, 대개 진정 귀한 친구들은 이 부류에 속하는 법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 둘 말고도 세 번째 종류의 우애가 있다고 말한다. 그것은 훌륭함 혹은 탁월함 때문에 만나게 되는 친구이다. 경제적 이득을 목표로 머리를 맞대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해서 가벼운 안주에 소주 한잔으로도 즐겁게 웃고 떠들 수 있는 사이도 아니지만, 정말 부러울 정도로 훌륭한 인격의 소유자인 그를 자주 만나 감동적인 이야기를 들으며 우애를 다지고 싶어 하는 경우이다. 유감스럽게도 이런 친구가 세상에 흔한 것 같지는 않다. 그러나 자신이 모범으로 삼고 싶은 훌륭한 친구가 옆에 있다면 참으로 행복한 인생이 아닐 수 없겠다. 이 우애는,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우리 스스로가 훌륭하고 좋은 사람이 되길 원하기 때문에 생겨나고 유지된다. 아름답게 살고 싶어 하는 사람에게 아름답게 사는 친구만큼 귀한 선물이 또 어디에 있겠는가.

아리스토텔레스 이야기를 길게 꺼낸 이유는 이 이야기를 읽을 때마다, 우리의 오랜 친구 책이 생각나기 때문이다. 책이 우리와 동행한 긴 역사를 돌이켜 보면, 책은 이 세 가지의 의미에서 모두 우리의 가까운 친구였다. 우선 누가 뭐라 해도 책은 항상 유익했다. 책은 필요한 정보와 의미를 전달하는 가장 대표적인 매체였다. 구텐베르크의 혁명은 정보와 지식의 유통 질서를 한 순간에 뒤바꾸어버린 세계사적 사건이었다. 더구나 책을 읽는 일은 우리에게 큰 기쁨이었다. 손에 책을 들고 페이지를 넘겨가면서, 우리의 선한 영웅이 무사히 고향으로 귀환할 수 있을지 밤늦도록 마음을 졸이던 짧은 여름밤이 누구에게나 있지 않았던가.

그러나 무엇보다 책은 훌륭한 친구였다. 우리는 책을 통해 자신을 돌아보고 앞으로 계속 달려나갈 자세를 고쳐 잡을 수 있었다. 그만한 선생이 또 어디에 있었는가. 책이 아니었으면 누가 여기까지 올 수 있었겠는가. 책 덕분에 골똘히 생각할 기회를 얻었고 책 덕분에 무지를 깨달을 수 있었으며 결국 책 덕분에 그 무지를 조금이나마 극복할 수 있었다. 결국 책은 유익한 친구, 즐거운 친구, 그리고 훌륭한 친구였다.

지금 책은 어떤 위치에 처해 있는가. 책을 친구로 삼은 사람들은 그 우애를 굳건히 다져 나가고 있는가. 책의 가치를 옹호하는 일은 책의 이 세 가지 측면에서 주도면밀하게 이루어져야 한다. 우선 유익함과 즐거움을 주는 매체인 책의 위상이 올바로 회복되어야 한다. 책 말고도 유익한 것, 즐거운 것이 넘쳐 나지만, 진정으로 유익하고 참된 기쁨을 안겨주는 좋은 책들이 계속 발간되고 독자들의 선택을 받아 책의 존재 이유를 끊임없이 증명할 수 있어야 한다. 단편적인 무수한 정보의 집적이 도대체 무슨 유익함과 무슨 즐거움을 안겨줄 수 있단 말인가.

그러나 무엇보다 책의 경쟁력은 그것이 인류가 고안해 낸 가장 훌륭한 지적 매체라는 점에 놓여 있다. 나는 책을 제외하고 도대체 무엇이 우리에게 인격적 고양의 가능성을 마련해줄 수 있는지 알지 못한다. 물론 쉽지 않은 일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을 빌리면, 훌륭한 친구와 사귀기 위해서는 “오랜 시간과 긴 만남”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익숙해지기 위해 그리고 그의 참된 모습을 알기 위해 시간을 지불해야 한다. 다행스러운 일은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런 훌륭한 친구가 세상에 드물다고 한탄했지만, 훌륭한 책은 세상에 너무도 많다는 점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윤리학 책으로부터 오늘날 서점에 수없이 쏟아지는 신간에 이르기까지 훌륭한 책들은 당당하게 자기 자리를 잡고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훌륭한 친구인 책과의 우정을 다시 회복할 때이다. 우리가 훌륭해지는 다른 방법은 없다.

김수영 철학박사ㆍ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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