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일 서울 숙명여대 게시판에 트랜스젠더 여성의 입학을 환영하는 대자보와 반대하는 내용을 담은 대자보가 나란히 붙어 있다. 연합뉴스

숙명여대에 합격한 트랜스젠더 여성이 숙명여대 재학생들의 반대로 결국 입학을 포기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사실 그냥 반대라고만 말하면 어폐가 있다. 그랬다면 아마 입학을 포기하는 일까지는 없었을 것이다. 그 반대 속에는 눈뜨고는 볼 수 없는, 신체마저 조롱하고 멸시하는 혐오발언이 쏟아졌다. 다른 여대의 대학생들도 연대를 빙자해 그 폭력에 동참했다.

이 사태에는 그리 긴 논평이 필요하지 않다. 이건 혐오범죄다. 그것도 아주 비관적인 형태의. 성소수자에 대한 차별이야 하루 이틀 일이 아니지만, 학칙 해석에 보수적이기 마련인 학교 본부가 입학을 허가했음에도 오히려 학생들이 나서 입학에 반대하고 혐오발언을 쏟아냈다는 점이 한층 충격적이다. 기득권층이 혐오를 퍼트린 게 아니라 풀뿌리에서 혐오가 자생했고, 기득권층보다 더 강경하게 소수자를 배제할 것을 요구했다.

달리 볼 여지가 없는 명백한 혐오범죄인 이 사건이 굳이 논란을 일으킨 건 그들이 이 혐오범죄의 명분으로 여성 인권을 들고 나왔기 때문이다. 그들은 트랜스젠더가 여성의 공간에 침입하여 여성을 위협한다고 주장하며, 트랜스젠더의 성별 변경을 법적으로 막아야 한다는 성명문을 페미니즘의 이름을 달고 내놨다. 그건 무척 의미심장한 광경이었다.

하지만 이건 뭔가 이상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페미니즘이 요즘 가장 뜨거운 이슈라는 건 부정할 수 없지만, 아무리 그렇다 해도 페미니즘은 옹호자들에게나 비판자들에게나 너무 자주 호출된다. ‘페미니스트로서 성소수자의 입학을 용납할 수 없다’는 말은 마치 ‘신자유주의자로서 이번 지하철 시간 개편은 용납할 수 없다’ 같은 말처럼 들린다. 아무 내실도 없는 말이다.

물론 이건 적확한 비유는 아니다. 페미니즘은 인권을 이야기하는 사상이고, 신자유주의는 경제학의 한 조류다. 그럼에도 둘은 닮은 점이 많다. 가장 중요한 공통점은, 둘 다 그게 뭘 뜻하는지 모르겠다는 것이다. 쉽게 말하자면 한없이 쉬운 것 같지만, 대부분의 쉬운 설명은 틀린 설명이다. 이들은 너무 많은 지류를 포괄하고 있어 명확히 어떤 것이라고 정의하기 어렵지만, 어떤 사람은 이를 도그마처럼 여기고 선악을 분별하는 도구로 삼는다. 신자유주의가 뭔지는 몰라도 어쨌든 정적을 공격하는 도구로 애용되었듯이, 페미니즘도 그렇다. 누군 ‘페미니스트가 아니면 모두 성차별주의자’라고 말하는데, 누군 ‘페미니스트란 여성우월주의자일 뿐’이라고 하고, 또 누군 ‘남성이 페미니스트가 되는 건 불가능한 일’이라 분노한다. 어느 장단에 춤을 춰야 할지 알 수가 없다.

페미니즘은 단어일 뿐이다. 하지만 그 단어가 도그마가 되어 버리니, 다들 실질은 외면하고 단어 자체에만 천착하고 만다. 자신을 페미니스트라 칭하며 성소수자를 혐오한다면 그 혐오는 혐오가 아닌 게 되는가? 전혀 그렇지 않다. 혐오의 원인을 분석하는 건 의미가 있는 작업이겠지만, 그걸 혐오의 변명으로 동원하면 곤란하다. 페미니즘이란 단어가 양심의 가책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는 갑옷이 되어 버리고, 한 치의 죄책감도 없는 혐오범죄가 일어난다.

페미니즘에 오지랖을 부리려는 게 아니다. 이 사건에서 그건 그리 중요한 문제도 아니다. 여기에서 두려운 건 성소수자를 비롯한 다른 소수자 운동이 어찌 될 것인가 하는 것이다. 우리 사회가 보편성에 대한 지향과 연대의식을 잃어버린다면, 수적으로도 명백히 열세인 소수자 운동은 대체 어디에 어떻게 설 수 있을까. 메갈리아는 성소수자에 대한 혐오발언으로 도배되었고, 혜화역 시위는 피해자를 조롱하고 성소수자를 받아들이길 거부했다. 그리고 숙대의 대학생들은 성소수자를 아예 쫓아냈다. 성소수자는 원래 사회 어디에서도 환영받지 못하는 존재라지만, 그래도 이렇게까지 직접적으로 혐오가 폭발하는 일은 드물다. 이 흐름이 돌이킬 수 없는 것이 될까 두렵다.

임예인 슬로우뉴스, ㅍㅍㅅㅅ 편집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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