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석구석 내리쬐던 햇빛의 기운은 뭉근하게 데워진 후끈한 밤공기로만 남았다. 여린 전등 빛 하나 새어 나오는 창문이 없고 흥얼거리듯 틀어져 있던 TV 소리도 모두 사라졌다. 사람의 흔적이라고는 어둠 속에 흐릿하게 보이는 집들의 형체뿐. 더듬더듬 방 앞의 의자를 찾아 앉으니 하늘에 별이 이렇게 많았나, 싶었다. 사람이 만든 불빛이 모두 사라진 발리에서 유일하게 빛을 발하는 건 별뿐이다. 까만 하늘에 별빛 총총 정도가 아니라 온통 반짝이는 꼬마전구 무더기에 깔아 놓은 밑바탕으로 검푸른 하늘이 슬쩍 보이는 듯하다. 빛과 소리가 사라진 발리의 새해맞이는 항상 익숙하던 것을 잠시 단절하는 것, 일부러 만들어 낸 불편함 속에서 잠시 고요로 빠져드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사람이 주변을 인식하는 건 참 상대적이다. 언제나 옆에 있어도 그 존재의 크기를 얼마만큼으로 알아차리는 건 다 사람의 마음에 따라서다. 요즘처럼 우리가 바깥세상과 무수하게 연결되어 있음을 절절히 느낀 적도 없다. 우리 하늘로 들어오는 비행기가 어느 땅을 지났는지 두 눈 뜨고 지켜보게 되고, 누가 스쳐 갔는지 인식조차 못했던 사람들이 혹여 나와 어디 닿았을까 움츠러든다. 서로 간에 오가는 물자와 인력들과 그보다 더 빠르게 전해지는 서로의 뉴스들. 어느새 촘촘히 얽혀 있는 세계의 네트워크 속에서 단절을 꿈꾸기도 또 단절을 실행하기도 녹록하지가 않다. 확장하기, 연결하기, 달려가기에 보다 익숙한 우리에게 멈추고 끊는다는 건 세상 흐름과는 영 반대의 길인 셈이다.
발리에서 사용하는 사카 달력의 새해 첫날인 녀피(Nyepi)는 꼬박 24시간 동안의 자발적인 단절로 시작한다. 차든 사람이든 길을 다닐 수가 없고 발리의 공항과 항구까지 폐쇄해 누구도 섬 안팎을 드나들 수 없다. 전기나 불을 사용하지 말아야 하고 늘 하던 일도 재미있는 놀이도 멈추어야 한다. 소리를 내지 않는 침묵의 날인지라 믿음이 깊은 사람들은 자신의 입을 가리며 침묵을 지킨다. 힌두교에서 저승세계를 지배하는 야마 왕이 매년 한 해가 끝나는 날이면 지옥의 악마들을 세상으로 쓸어내는데, 이때 풀려난 악마가 인간세계에 끼어들지 않도록 발리 섬 전체가 사람이 살지 않는 죽은 땅인 양 행세하는 것에서 시작한 전통이다.
일절 활동을 멈춘 채 집에서 조용히 보내는 24시간, 많고 많은 날 중 하난데 참 느리고 긴 하루다. 아무 소리가 나지 않는 TV와 라디오, 텅 비워진 채 문을 닫은 가게들. 언제나 끝없는 소리와 자극에 둘러싸여 있던 여행자들은 갑자기 찾아온 침묵에 내심 당황한다. 놀잇거리가 사라진 고요 속에 남는 건 그저 자신과 주위를 바라보는 것뿐. 그러다 보면 평생 쳐다볼 일 없던 별 무더기도 보이고 바쁜 일상에 지쳐 주름 한 줄 더해진 옆 사람의 얼굴도 보인다. 지난 한 해 잘못한 것들, 정신 없어 놓친 것들이 줄줄이 머릿속에 떠오르는 시간이다.
모든 것을 끊고 가만히 멈추어 있던 하루가 지나고 나면 발리에 있는 모든 집의 아궁이에서는 새로운 한 해의 불이 지펴진다. 긴 침묵에서 깨어나 이전의 죄가 정화된 새로운 사람이 되게 해달라고 기도를 올리고는, 친구와 친지를 찾아가 그간 알게 모르게 가졌던 미움과 원망에 대해 서로 용서를 구한다. 잠시의 단절을 통해 자신을 되돌아보았으니 이제는 다시 서로를 연결하고 지지할 때라는 의미다. 올해 3월, 우리와는 다른 시기에 새해를 맞는 발리 사람들과 함께 우리도 간절한 기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갈 곳을 잃은 양 불쑥불쑥 나타나 세상을 두려움으로 몰아넣는 위협들이 모쪼록 사라지기를, 인간과 자연의 조화로운 관계가 회복되고 우리에게 다시 ‘연결의 시간’이 돌아올 때 있는 힘껏 서로를 껴안을 수 있기를 말이다.
전혜진 여행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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