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6.5℃’는 한국일보 중견 기자들이 너무 뜨겁지도 너무 차갑지도 않게, 사람의 온기로 써 내려가는 세상 이야기입니다.
미국 할리우드 대표 지성으로 꼽히는 내털리 포트먼은 지난 9일(현지시간) 미국 로스앤젤레스 돌비극장에서 열린 아카데미시상식에서 특별한 쇼를 벌였다. 포트먼은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을 연출한 셀린 시아마와 ‘더 페어웰’의 룰루 왕 등 여성 감독 이름이 새겨진 드레스 재킷을 걸치고 카메라 앞에 섰다. 훌륭한 영화를 만들고도 제대로 주목받지 못한 여성 감독을 향한 지지였다.
포트먼은 이날 입고 나온 드레스로 오히려 레드카펫에서 조연이 됐다. 대신 관심은 아카데미에서 온전히 빛나지 못한 여성 감독들에게로 향했다. 이번 아카데미 감독상 후보엔 여자 감독이 단 한 명도 오르지 못했다. 후보에 오른 다섯 명은 마틴 스코세이지(‘아이리시맨’)를 비롯해 쿠엔틴 타란티노(‘원스 어폰 어 타임 인 할리우드’) 등 모두 남자 감독뿐이었다.
봉준호 감독에게 ‘기생충’으로 감독상과 작품상을 쥐여주며 문화적 다양성의 돌파구를 마련했다는 평가를 받는 아카데미의 이면이다. 포트먼이 소외된 여성 감독을 위한 쇼를 준비하지 않았다면 ‘남성’에 편향된 시상식의 불평등은 또 묻히고 말았을지 모른다.
위기일 때 쇼는 위력을 발휘한다. 양승조 충남지사는 지난 1일 아산 경찰인재개발원에서 200m 떨어진 곳에 집무실을 차렸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발생지인 중국 우한에서 귀국한 교민의 임시생활시설 인근이었다. 집무실 근처에 숙소도 마련했다. 지역 주민들에게 안전함을 보여주기 위한 몸부림이었다.
대부분의 쇼가 지탄받기 마련이지만, 양 지사의 쇼는 달랐다. 온라인엔 ‘이런 쇼는 환영’이란 반응이 적지 않게 올라왔다. 그의 쇼가 작게나마 누군가로부터 보호받고 있다는 위안을 줬기 때문이다. 신종 코로나 확산이란 위기 대응에서 정확한 정보 제공만큼 중요한 게 정부가 국민에게 연대를 확인시키는 즉 ‘위기에 함께 하고 있다’는 걸 보여주는 일이다. 감염병 확산의 공포는 종종 이성을 마비시킨다. 논리가 쉬 작동하지 않을 때 판단은 잔혹해진다. 이번 신종 코로나 사태에 ‘중국(인) 혐오’가 불거진 배경이다.
막연한 불안에 특효약은 정서적 제스처다. 하지만 중앙정부의 대응은 낙제점에 가까웠다. 진영 행정안전부 장관은 아산에선 계란 세례를 당했고, 진천에서는 격렬한 항의에 부딪혀 몸을 피해야 했다. 임시생활시설 지정과 관련해 우한 교민들의 어려운 사정과 국가 위기를 절박하게 호소하는 과정을 거치지 않은 후폭풍은 거셀 수 밖에 없었다.
진 장관이 임시생활시설 인근에 집무실과 숙소를 차리는 쇼라도 벌였다면 어땠을까. 이 위기에 가정법까지 동원한 건 그만큼 국민들이 정부의 ‘쇼’를 뜨겁게 원하고 있어서다. 일촉즉발의 감염병 난민 갈등을 잠재운 건 정부가 아닌 주민들이 벌인 쇼, 바로 ‘우리가 아산이다(We Are Asan)’의 정서적 포용이었다.
신종 코로나의 확산세가 아직 수그러들 기미를 보이지 않자 바이러스에 대한 공포는 사람과 도심으로 옮겨가고 있다. 관계 당국의 쇼가 절실히 필요한 곳은 도처에 널렸다. 신종 코로나 확진자 경유지로 알려진 일부 영세 업체는 폐업 위기에 놓였다. 질병관리본부에 따르면 공기 중에 나온 바이러스는 대부분 이틀 안에 죽는다. 소독과 방역 작업을 철저히 한 뒤 며칠이 지나도 대부분의 가게는 찾는 손님이 3분의1 수준으로 뚝 떨어진다고 한다. 막연한 불안감에 손님들이 발길을 끊은 탓이다.
여기서 제안 하나. 문재인 대통령을 비롯해 박능후 보건복지부 장관, 진영 행안부 장관 등이 방역이 끝난 신종 코로나 피해 식당을 찾는 건 어떨까. 신종 코로나 대응의 최전선에 있는 리더들이 앞장서 쇼를 벌일 때 공포로 멍든 일상은 쉬 회복될 수 있다. 끝나지 않은 신종 코로나 사태, 정부의 쇼가 끊이지 않아야 하는 이유다.
양승준 지역사회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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