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대리기사의 부활
※국내 일간지 최초로 2017년 베트남 상주 특파원을 파견한 <한국일보>가 2020년 2월 부임한 2기 특파원을 통해 두 번째 인사(짜오)를 건넵니다. 베트남 사회 전반을 폭넓게 소개한 3년의 성과를 바탕으로, 급변하는 베트남의 오늘을 격주 목요일마다 전달합니다.
베트남 최대 명절인 뗏(설) 연휴가 시작된 지난달 22일 오후 8시30분. 하노이 옛 시가지를 벗어나는 길목에서 경찰이 음주 단속을 하고 있었다. 음주 측정에 응하는 대신 휴대폰을 꺼내 들고 “내가 지금 누구한테 전화하는지 아느냐”는 반(半)협박, “한 번만 봐달라”는 읍소가 곳곳에서 터져 나왔다. 한 시간가량 오토바이 5대와 자동차 2대가 음주 운전으로 적발됐다. 베트남 정부가 음주운전단속법(알코올피해예방법)을 시행하면서 올 1월 1일부터 바뀐 풍경이다.
예상보다 강력한 단속에 밤손님이 줄어든 식당들도 울상이다. 음주 도이머이(쇄신)라 불리는 이번 조치로, 좌판에 앉아 간단한 요리에 얼음 맥주를 마신 뒤 오토바이로 귀가하던 베트남의 상징적 일상이 추억으로 남을 운명에 처해서다.
그런데 이날 유독 여유롭게 단속 현장을 지나가는 취객 차량들이 눈에 띄었다. 운전을 대리기사에게 맡긴 차주들이었다. 단속이 없으니 술을 마시고도 운전을 하던 습관이 몸에 밴 베트남에선 절대 통하지 않을 것 같던 한국식 대리운전이 살아날 조짐을 보이는 장면이었다.
폐업을 고민하던 베트남 대리운전업계가 기사회생하는 분위기는 수치로도 확인할 수 있다. 2017년부터 하노이에서 운영된 ‘당신은 술을 마셔요, 운전은 제가 할게요(You Drink I DriveㆍUDID)’ 베트남 서비스는 음주 단속 첫 달인 지난달 순수익이 전달보다 180% 폭증했다. 예컨대 11일엔 대리기사 936명이 4,168건의 요청을 처리했는데, 하루 평균 3~5건에 불과하던 지난해와 비교하면 격세지감이다.
관련 업체는 변화에 발 빠르게 부응하고 있다. UDID는 2년 내 호찌민과 다낭 등 베트남 주요 8개 도시로 사업을 확장할 계획이다. 후발 업체인 ‘세잉 드라이브(Saying drive)’와 ‘라다(Rada)’는 곧 서비스를 출시한다. 고젝 등 현지 승차공유업체들도 대리운전 서비스 도입을 검토하고 있다. 대리운전은 자동차 오토바이 모두 가능하다.
대리운전의 원조라 할 수 있는 한국 업체들에게도 베트남은 매력적인 투자처다. 현지 업체들의 규모가 아직 영세하고, 대리기사 연계 방식이 유연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여기에 현지 승차공유업체 강자인 그랩이 베트남 정부로부터 독점 여부 조사를 받고 있는 터라, 시장의 공백을 메울 기회도 노려볼 수 있다. 실제 한국 업체 2, 3곳이 베트남 현지 진출을 타진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무엇보다 현지화 전략이 중요하다. 스타트업 기업을 운영했던 응우엔민콴(47)씨는 “베트남에선 좋은 평판 획득이 사업 성공의 전제”라며 “지역 식당 등과 논의해 대리운전 완료 시 차주와 업주 모두에게 인센티브를 제공하는 방식 등을 고려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문제는 사업의 지속 가능성이다. 다행히 ‘음주 쇄신’은 베트남 정부가 명운을 걸고 진행 중인 부정부패 척결 등 사회변혁 시도의 마침표다. 지난해 상반기까지 3년간 70여명의 공산당 간부와 고위 관리 등을 징계하거나 재판에 넘기고, 260만달러와 토지 142만㎡를 몰수한 베트남 정부는 과도한 음주 문화를 마지막 해결 과제로 선정했다.
사실 베트남에 투자한 국가들은 베트남의 음주 문화를 사회 불안정성의 핵심이라고 꼬집는다. 기린홀딩스와 사이공증권 등에 따르면, 베트남은 2018년 한해 466만7,000㎘의 맥주를 마셔 세계 9위에 올랐다. 동남아 국가 중엔 압도적 1위이고, 한국(18위)보다 순위가 높다.
증가폭도 가파르다. 상위권에 오른 중국(1위) 일본(7위) 같은 아시아권 국가에서 맥주 소비가 줄어든 반면, 베트남은 7.1%나 상승했다. 베트남의 연간 1인당 음주 지출 비용은 평균 300달러로, 지난해 2,655달러였던 국내총생산(GDP)을 감안하면 높은 수치다.
물론 음주 자체와 음주운전의 상관관계는 명확하지 않다. 그러나 음주 단속이라는 시스템 자체가 없던 베트남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이전까지 베트남에선 교통사고가 발생한 뒤에야 음주 여부를 측정하고 처벌하는 게 고작이었다. 올해부터는 상시 적발을 기본으로 벌금을 3,000만~4,000만동(150만~200만원)으로 책정했다. 베트남 노동자의 평균 월급은 33만원 정도다. 음주 정도에 따라 오토바이도 압수한다. ‘사후 처리’에서 ‘사전 단속’으로 방향을 바꾼 정책은 ‘사고만 내지 않으면 되지’ 하는 안일한 습관에 철퇴를 내린 격이다.
베트남 민심도 정부 정책에 호응하고 있다. 지난해 4월 하노이에서 음주 교통사고로 여성 한 명이 사망한 사건은 대규모 음주운전 반대 시위로 이어졌다. 당시 사망한 여성의 아들(15)이 시신 앞에서 울고 있는 사건 현장 사진은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중심으로 급속히 퍼졌다. 이후 여론은 애도를 넘어 정책 변화 요구로 번졌다.
정부의 강공과 여론의 지지에도 불구하고 베트남의 음주운전 고질을 고치기엔 아직 갈 길이 멀다. 단속을 시작한 지난달 1일부터 보름간 6,279명이 음주운전을 하다 적발됐다. 부과된 벌금만 약 10억5,000만원이다. 외국인도 예외가 없어서 최근 단속에선 한국인이 적발됐다.
쿠앗비엣헝 베트남 국가안전교통위원회 부회장은 “음주운전 처벌 규정이 선진국에 비하면 여전히 약해 효과가 제한적일 수 있다”라며 징역형 도입을 시사했다. 아울러 교통경찰이 평상복을 입고 암행 단속을 할 수 있도록 법령을 정비하고 있다. 정부의 의지가 그만큼 강하다는 뜻이고, 음주를 하면 차(오토바이)를 몰지 말던가, 대리기사에게 운전을 맡겨야 한다는 얘기다. ‘자유로운 맥주의 나라’ 베트남이 달라지고 있다.
하노이=정재호 특파원 next88@hankookilbo.com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