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은 어떤 여지의 속성을 갖고 있다. 즉 도착하지 않은 미래를 내포하고 있다는 뜻이다. 하지만 ‘벌써’는 그것을 쓰는 순간 철저한 현재, 나아가 과거를 거느린다. 사진은 경남 양산시 통도사의 자장매 모습. 왕태석 선임기자

누군가 새해라고 했다. 누군가는 2020년이라고 하고 누군가는 설도 지났다고 했다. 그러자 가장 말없이 있던 누군가가 벌써 2월이라고 했다. 2월이라는 단어의 출격에 새해와, 2020년과, 설이, 부유하는 먼지처럼 잘게 부서져 흩어졌다. 아니다. 2월이라는 현재 시간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것을 더욱 부각하고 명징하게 하는 앞선 단어 ‘벌써’ 때문이었다. 그냥 2월이라고 했으면 누군가는 며칠이라고 했을 거고 누군가는 요일과 시간까지 또 나열했을 것이다. 그렇게 우리는 현재와 ‘서서히’ 대면했을 것이다.

그러나 2월보다 훨씬 강한 악센트가 주어지던 ‘벌써’의 출현으로 2월은 ‘갑자기’ 들이닥쳤다. 벌써 2월! 두 음절의 짧은 부사 ‘벌써’가 붙자 2월은 원치 않는 현재가 되었다. 느닷없는 맞닥뜨림이 되었다. 누군가는 인상을 조금 찌푸렸고 누군가에게선 짙은 한숨이 얼굴 가득 퍼졌으며 누군가는 진저리치듯이 양 어깨를 떨다가 고개까지 흔들었다. 자신이 기대하고 예상했던 속도, 자신의 의지에 따라 그 속도에 편입될 수도 피할 수도 있었던 경험치를 뛰어넘어 훅! 들어온 민낯의 시간은 그래서 불편했다.

뒤따르는 모든 것에 속도를 붙이는 단어, 당연히 속도만큼 감정을 증폭시키는 단어. 이미 오래 전에, 예상보다 빠르게, 어느새, 라는 국어사전 뜻풀이를 굳이 보지 않아도 맞닥뜨린 현재에 순간 기립을 하게 하는 단어. 모른다고, 알고 싶지 않다고, 묻어왔던 시간 흐름을 일시에 확 펼쳐 보여주는 단어. 그래서 각자의 의지와 상관없이 현재의 시간과 갑자기 조우하게 하는 단어.

‘벌써 2월’이라는 누군가의 말에 화들짝 놀라 닥치는 대로 바깥 풍경을 찾아 부산하게 시선이 흔들렸던 그때, 제 속도보다 두 배는 빨리 뛰어 열이 나는 심장과는 반대로 이마 아래 나를 구성하고 있는 모든 기관은 체온이 급하강되고 있었다. 나는 여기 있는데 많은 게 나를 지나쳐 갔다는 자각은 그래서 왔다. 사랑도 사람도 시절도 나를 세상에 데려온 내 어머니까지도 벌써... 말이다. ‘벌써’라고 수식될 수 있는 게 많아진 나이에 어느새 나는 당도해 있었다.

누군가가 말한다.

“이상하지? 자꾸 말에 ‘벌써’를 붙여. 벌써 토요일이네, 벌써 저녁이네, 벌써... 벌써... 생각해 보면 살면서 별로 써 온 말도 아닌데 이상하게 이제는 어떤 말을 하려면 ‘벌써’가 턱 하니 먼저 가 붙는단 말이야. 그러면 그게 기가 막힌 게, 그 다음 말을 이을라치면 세상이 극적으로 변한다는 거야. 햇빛 쨍쨍한 대낮도 일시에 왈칵 검어지고, 밥 뜸 드는 냄새도 갓 만들어진 무덤 흙냄새로 맡아진단 말이야. 미루는 걸 좋아하고 느슨한 성격이라 늘 아직, 아직 했는데 이상하지? 언젠가부터 그걸 쓰지 않더라고. 아직, 아직 그럴 때는 놀랄 일도 없었는데 벌써, 벌써 하니까 매 순간이 놀랄 일이야. 아직 2월이라고 했으면 느긋했을 텐데 벌써 2월, 하는 순간 2월이 엄청 큰 사건처럼 느껴지는 거야.”

누군가 대답한다.

“우리가 벌써 ‘벌써’를 자꾸 쓰는 나이가 돼서 그래요. 애매하지 않고 중요 표시 별 표 다섯 개 같은 나이! 아직, 아직 하며 미루고 핑계 댔을 때보다 막연하지 않아서 좋지 않아요?”

그녀가 말한 ‘아직’ 이란 단어가 기를 쓰고 살았던 지난 4년간의 시간을 들춘다. 16년을 병석에 계셨던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건 2016년 8월이었다. 그때부터 2020년 2월인 지금까지 4년째 나는 내 인생 속도에서 가장 느린 시간을 살아왔다. 도무지 줄어들지도 흘러가지도 않는 것 같은 시간을 살아오는 동안 나는 모든 것에 ‘아직’이란 말을 달고 살았다. 나는 어머니가 세상에 없다는 사실이 ‘아직’ 인정되지 않았고, 당연히 ‘아직’ 괜찮지 않으며, 하루도 그립지 않은 날이 ‘아직’ 없기 때문이다. 혈육과의 사별은 그렇게 모질고 혹독했다. 세월도 그 앞에선 가지 않았다.

그런데 오늘 누군가가 던진 ‘벌써’라는 단어에 나는 아직, 아직 하며 붙잡고 있었던 어떤 시간을 통째로 만났다. 부인과 거부의 용도로 써 왔던 ‘아직’이 오고 있는 시간의 걸음이었다는 건 그래서 알게 됐다. ‘아직’이 쌓이면 ‘벌써’로 지나간다는 것도 덤으로 깨달았다. ‘아직’은 어떤 여지의 속성을 갖고 있다. 즉 도착하지 않은 미래를 내포하고 있다는 뜻이다. 하지만 ‘벌써’는 그것을 쓰는 순간 철저한 현재, 나아가 과거를 거느린다. 어머니 세상 떠나신 지 벌써 4년째, 세상 속에서의 어머니의 부재는 내가 아무리 ‘아직’이라고 고집 부려도 ‘벌써’라는 단어로 확실해졌다. ‘아직’ 내가 못 보내고 있다는 내 애통함은 ‘벌써’ 가신 지 4년째라는 사실 앞에서 우김과 억지처럼 초라해졌다. 그만큼 ‘벌써’는 뒤따르는 모든 상황을 기정사실로 만들어버리는 위력을 분출했다.

핸드폰이 요란하다. 새삼스럽게 올해 내 나이를 묻는 스승의 문자가 들어왔다. ‘아직’이라고 하고 싶은데 ‘벌써’를 끌어당겨야 어울릴 것 같은 기이한 숫자가, 보내지도 못한 창에서 깜박이다 꺼진다.

서석화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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