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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작권 한국일보]아카데미시상식 주요 터닝포인트/ 강준구 기자/2020-02-12(한국일보)

봉준호 감독이 한 인터뷰에서 언급한 것처럼 ‘로컬’ 시상식인 오스카가, 할리우드에서 만든 수많은 수작들을 제쳐두고 ‘기생충’과 봉준호를 선택했다. 그간의 분위기로 볼 때 국제영화상은 따놓은 당상처럼 보였고, 각본상의 가능성도 어느 정도는 예상할 수 있었다. 그런데 마틴 스코세이지, 쿠엔틴 타란티노, 샘 멘데스 같은 할리우드의 거장과 명장을 제치고 봉 감독이 감독상을 수상했고, ‘기생충’은 결국 작품상까지 거머쥐었다. 이 결과에 대해선 아마도 한 동안 다양한 분석이 이어질 것이며, 어쩌면 오스카 92년 역사에서 가장 충격적인 결과로 기록될 것이다. 이번 수상을 아카데미 위원회 관점에서 분석해보는 것도 흥미로울 듯싶다. 아카데미는 대체 왜 이런 파격을 선택한 것일까.

사회적 의제에 눈뜨다

주목해야 할 건 오스카의 긴 역사가 지닌 스토리텔링의 측면이다. 1929년 5월 26일, 할리우드 루즈벨트 호텔에서 약 270 명의 영화인들이 모여 1회 시상식을 열었을 때만 해도, 그것은 디너 파티에 가까웠다. 수상자를 호명하는 데는 5분도 걸리지 않았던, 그냥 친목 모임 정도였다. 이후 라디오와 TV를 통해 중계되면서 시상식은 큰 인기를 끌기 시작했고, 어느새 전 세계 영화 팬들이 생중계로 즐기는 커다란 쇼가 되었다.

이 과정에서 오스카의 선택은 화제에 오르기 마련이었다. 할리우드 고전시기에 생겨났던 보수적이고 미국 중심적이며 백인 중산층 가치를 내세우는 전통이 한 동안 시상식을 지배했지만, 이후 오스카는 사회적 변화와 대중의 요구에 기민하게 반응하며 역사를 이어왔다. 그것은 결과적으로 장벽을 하나씩 부수어나가는 과정이었다.

2006년 시상식에서 조지 클루니는 중동 지역 문제를 파헤친 ‘시리아나’(2005)로 남우조연상을 수상하면서 “사람들이 에이즈에 관해 이야기하지 못할 때 오스카는 그것을 다뤘고 인종 문제가 대중의 지지를 받지 못할 때 오스카는 인권에 대해 이야기했다”며 오스카의 진보적 측면을 부각시켰다. 어쩌면 이것은 오스카의 긴 역사를 이끌어온 원칙이었다. 보수적 태도에서 시작했지만, 오스카는 어떤 역사적 단계에선 반드시 도약을 이뤄냈다.

그 시작은 인종적 편견에 대한 철폐였을 것이다. 1940년 시상식에서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1939)의 해티 맥대니얼이 아프리칸 아메리칸으로선 최초로 오스카 트로피의 주인공이 된 건 상징적 사건이었다. 1950~60년대 공민권 운동이 일어나기 전, 미국 사회에서 유색 인종의 인권은 매우 처참한 수준이었다. 사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에서 맥대니얼이 맡은 역할도 유모라는 전형적인 역할이었다. 그렇지만 오스카는 그에게 수상의 영예를 안겨줌으로써, 인종 문제에 있어 완고하게 굳어져 있는 미국 사회에 메시지를 전한 셈이다.

그리고 1964년엔 ‘들백합’(1963)의 시드니 포이티어에게 남우주연상을 안김으로써 또 하나의 이정표를 남긴다. 아프리칸 아메리칸만이 대상은 아니었다. ‘사요나라’(1957)에 출연한 일본계 미국 배우인 우메키 미요시는 여우조연상을 수상해 눈길을 끌었고, ‘작은 거인’(1970)의 치프 댄 조지는 네이티브 아메리칸으로는 최초로 오스카 후보(남우조연상)에 올랐다. 특히 1960년대 후반부터 70년대에 이르는 이른바 ‘히피 세대’ 시기의 오스카는 그런 사회적 흐름을 반영하기도 했는데 ‘미드나잇 카우보이’(1969)는 1970년 시상식에서 X등급 영화로는 최초로 작품상을 수상하며 시대가 변하고 있음을 알렸다. ‘디어 헌터’(1977) 같은 반전 영화가 작품상을 수상한 것도 이 시기다.

1980년대 레이건 시대에 접어들면서 보수적 색채를 되찾은 오스카는 1990년대까지 ‘편안한 선택’을 이어갔다. 특히 1990년대엔 이른바 하비 와인스타인이 주도한 ‘오스카 마케팅’이 정점에 올랐던 시기이기도 하다.

흑인배우 할 베리(오른쪽)와 덴젤 워싱턴이 2002년 3월 25일 제74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남녀주연상을 수상한 후 기뻐하고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2000년대 이후 커지는 목소리

지난 20년에 대한 반작용처럼, 변화는 2000년 이후에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크래쉬’(2005) ‘노예 12년’(2013) ‘그린 북’(2018)처럼 인종 문제를 다룬 영화가 작품상을 수상했고, ‘브로크백 마운틴’(2005)이나 ‘문라이트’(2016) 같은 퀴어 영화에 대한 뜨거운 관심이 있었다. ‘아르고’(2012) ‘스포트라이트’(2015) 같은 사회적이며 정치적인 영화가 작품상을 수상한 것도 이 시기였다.

오스카의 변화는 단지 작품상의 톤에서만 느낄 수 있었던 건 아니었다. 그 동안 무겁게 오스카를 짓누르고 있었던 억압들이 하나씩 풀리기 시작했다. 2002년 시상식은 그런 면에서 극적이었다. 백인 여배우에게만 여우주연상을 허락했던 오스카는 74회 시상식에서 처음으로, ‘몬스터볼’(2001)의 주인공을 맡은 아프리칸 아메리칸 배우인 할 베리를 선택한 것이다. 그리고 덴젤 워싱턴은 ‘트레이닝 데이’(2001)로 남우주연상을 수상하면서 남녀 주연상 모두 아프리칸 아메리칸 배우가 차지하는 한 해가 된 것이다.

그리고 2006년엔 ‘브로크백 마운틴’의 리안이 감독상을 수상했다. 아시아계 감독의 첫 수상이었고, 어쩌면 그가 터 놓은 길 위에 봉준호 감독이 다시 한 번 선 것일지도 모르겠다. 2009년엔 ‘프레셔스’의 제프리 플레처가 각본상을 수상한 첫 아프리칸 아메리칸이 되었다. 2010년은 80년 넘게 이어졌던 금기가 깨지는 해였다. ‘허트로커’(2008)의 캐스린 비글로우 감독이 최초의 여성 감독상 수상자가 된 것. 이것은 할리우드에서 활동하는 수많은 여성 영화인들에게 큰 힘을 주는 사건이었다. ‘그래비티’(2013)의 알폰소 쿠아론은 최초의 라틴 아메리칸 감독상 수상자가 되었고, ‘노예 12년’의 스티브 맥퀸 감독은 아프리칸 아메리칸으로선 최초로 작품상을 연출한 감독이 되었다. ‘문라이트’의 마허샬라 알리는 무슬림 배우로는 최초로 오스카(남우조연상)를 수상했고, ‘로마’(2018)의 얄리차 아파라시오는 여우주연상 후보에 오른 첫 번째 네이티브 아메리칸이 되었다.

‘로컬’ 시상식을 벗어나다

오스카는 이제 더 이상 미국 중심의 보수적 이벤트가 아니라, 세상의 변화를 반영하는 기민한 쇼가 되었다. 그런 면에서 2020년 시상식은 인상적이다. 인종이나 성별의 장벽을 허문 오스카는 올해 시상식에서 ‘외국어영화상’(Best Foreign Language Film)이라는 명칭을 ‘국제영화상’(Best International Feature Film)으로 바꾸었다. 다른 언어를 쓰는 영화를 ‘외국’(foreign)이라는 단어를 통해 분리했던 것에서 벗어나, 국가 간의 교류를 의미하는 ‘국제’(internatonal)라는 단어를 통해 새 패러다임을 제시한 셈이며, 이것은 ‘로컬’시상식에서 벗어나 다양한 영화들을 담아내겠다는 의지이기도 하다. ‘겨울왕국 2’의 주제가 ‘인투 디 언노운(Into the Unknown)’을 10개국에서 온 가수들이 각자 언어로 노래하는 콜라보 무대가 그 상징적 퍼포먼스였다면, 하이라이트는 ‘기생충’에 대한 스포트라이트일 것이다. 골든글로브 시상식에서 봉준호 감독은 “자막의 장벽, 그 1인치의 장벽을 뛰어넘으면 여러분은 훨씬 더 많은 영화를 즐길 수 있다”는 소감을 남겼고, 이 말은 오스카에서 구체적으로 실현됐다.

물론 ‘기생충’이 현재 미국 사회에서 일으키고 있는 흥행세와 신드롬, 이 영화가 지닌 독특한 유머와 비판적 메시지, 한국적이면서도 글로벌 이슈를 건드리고 있는 영민함, 흥미롭게 즐길 수 있는 디테일 등 작품 내적인 매력들도 오스카 수상의 중요한 요인일 것이다. 여기에 더한다면, 최근 오스카가 보이고 있는 진보적 행보를 빼놓을 수 없다. 올해 시상식에서 오스카는 마지막 장벽이라고 할 수 있는 ‘언어’를 허물었고, 그 자리에 ‘자막 있는 영화 기생충’과 ‘통역으로 소감을 전하는 봉준호’가 있었다.

‘기생충’의 성과는 아마도 영어 이외 언어로 영화를 만드는 전 세계의 수많은 감독들에게 큰 희망이 될 것이지만 가장 큰 수혜자는 아마도 오스카 자신일 것이다. 이 놀라운 선택을 통해 오스카는 확고한 개방체제를 갖추게 되었고 앞으로는 더욱 용감한 선택을 할 수 있게 된 셈이다.

김형석 영화 저널리스트

영화 전문지 <스크린> 출신으로 현재 프리랜서 저널리스트로 활동 중이다. 작년부터 평창국제평화영화제 프로그래머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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