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제로 오스카를 구한 건 ‘기생충’이다. 아니면 적어도 생명줄을 던져 준 것이나 다름없다.”
10일(현지시간) 미국 일간 뉴욕타임스에 실린 수석평론가 A. O. 스콧의 짧지만 의미심장한 평가다. 전날 열린 제92회 아카데미영화상 시상식에서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이 최고 영예인 작품상을 포함해 4관왕을 차지한 것을 두고 하는 말이다.
미국 언론에 나타나는 현지 분위기는 비영어권 국가 중 유일한 ‘오스카 작품상 트로피 보유국’이 된 한국보다 훨씬 더 뜨겁다. 한국 영화가 아카데미상을 애타게 원했다기보다, 할리우드가 ‘기생충’ 같은 영화가 나타나기만을 간절히 기다린 것 같은 인상마저 준다. ‘기생충’의 수상이 한국에겐 예상치 못한 ‘뜻밖의 행운’이었다면, 할리우드에게는 ‘절박한 필요’였던 것이다.
AP통신은 “‘기생충’이 90여년간 이어져 온 작품상 수상작의 영어 독점을 끝냈다”며 “혁명적인 승리”라고까지 표현했다. 92년 아카데미 역사상 작품상 후보에 오른 비영어권 영화는 고작 11편. 지난 10년만 봐도 ‘아무르’(2013) ‘로마’(2019) ‘기생충’ 딱 3편뿐이다. AP통신은 “시상식장에서 ‘기생충’에 쏟아진 것과 같은 축하 세례를 받았던 영화는 거의 없었다”며 “이 영화의 승리는 엄청난 안도감을 주었다”고도 평했다.
산사태를 뜻하는 ‘Landslide’에다 봉 감독의 이름을 합친, ‘봉슬라이드(Bongslide)’라는 신조어도 등장했다. 아카데미의 보수성을 산사태처럼 일거에 무너뜨렸다는 의미다.
아카데미상은 오랫동안 인종ㆍ성별ㆍ언어ㆍ지역 등 문화적 다양성이 부족하다는 비판을 받아 왔다. 이는 곧 ‘백인’ ‘남성’에 편향된 미국 영화 시장의 위기를 대변한다. 그대로 좌초하지 않으려면 위기를 타파할 새로운 동력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끊임없이 제기됐다. 그때 ‘기생충’이 떡 하니 나타난 것이다.
김형석 영화평론가는 “1970년대에도 할리우드는 ‘미학적으로 고갈됐다’는 위기감이 번지자 유럽 영화를 수혈해 이를 타파한 경험이 있다”며 “최근 아카데미상은 영역을 좀 더 확장해야 한다는 요구를 받아 왔는데 그 와중에 ‘기생충’이라는 탁월한 작품을 만난 것”이라고 말했다.
‘기생충’은 작가주의와 대중성, 보편적 주제의식 등을 고루 갖추고 있으면서도 아카데미의 전통에서 벗어나 있는 영화다. “변신에 대한 아카데미의 갈증을 해소해 줄 최고의 작품”이었다는 평가다.
이 때문에 아카데미상 관계자들도 이번 수상 결과에 대해 자부심을 감추지 않고 있다. 아카데미상을 주관하는 영화예술과학아카데미(AMPAS)의 전 회장 셰릴 분 아이삭은 시상식 직후 열린 공식 파티에서 “우리는 몇 년 간 전 세계 영화 창작자들의 재능과 스토리텔링, 비전, 창의성에 관심을 기울여 왔고, 마침내 그 일이 일어난 것을 목격했다”며 “우리는 아카데미가 매우 자랑스럽다”고 말했다. 자화자찬인 셈이다.
시상식이 이뤄지기 전 LA타임스는 이렇게 보도했다. “만약 오스카가 비영어권 작품에 처음으로 작품상을 준다면 그건 오스카와 할리우드 시스템을 부끄럽게 할 작품이어야 한다. ‘기생충’은 거기에 매우 부합하는 작품이다.” 예고 기사이자 예언 기사가 돼 버렸지만, 미국 영화산업 관계자들이 할리우드 영화와 ‘기생충’에 대해 느끼고 있는 감정을 미뤄 짐작할 수 있다.
김표향 기자 suzak@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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