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팝, 한국 드라마의 폭발적 성장과 함께 이번 수상이 한국 엔터테인먼트 산업의 분기점이 될 것이다.”
‘기생충’이 제92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작품상 등 4개 부문을 휩쓴 다음날인 10일(현지시간) 미국 블룸버그 통신이 내놓은 진단이다. 이런 진단은 한 두 가지가 아니다. 미국 유력 매체 버라이어티는 “영화 ‘기생충’이 자막의 장벽을 무너뜨렸다”고 보도했다. 미국 시사주간지 타임도 이날 “‘기생충’의 아카데미상 수상은 외국어 영화에 대한 (미국 관객들의) 심리적 장벽이 깨졌음을 증명한다”는 할리우드 베테랑 프로듀서 재닛 양의 발언을 인용하며 ‘기생충’이 던진 충격파를 되새겼다.
이는 비록 1인치에 불과하다 해도 절대 무너지지 않을 것만 같았던 자막의 장벽을 넘어선데 대한 놀라움을 드러낸 것이다. ‘기생충’은 자막 있는 비영어 영화에 거부감을 표하던 미국 관객을 어떻게 설득했을까, 그리고 ‘기생충’ 수상의 충격파는 어디까지 번져 나갈 것인가가 관심사로 떠올랐다.
전문가들은 미국의 밀레니얼 세대(1980년대 초반~2000년대 초반 출생한 세대)와 Z세대(1990년대 중반∼2000년대 중반 출생한 세대)에 주목했다. 라젠드라 로이 미국 뉴욕현대미술관(MoMA) 수석 큐레이터는 “밀레니얼 세대와 Z세대는 ‘기생충’을 아주 좋아하기 때문에 친구들에게 이 영화를 보라고 추천할 것”이라며 “이런 경험을 통해 새로운 세대 사이에서 자막 있는 영화를 보는 것에 대한 거부감이 완전히 사라질지 궁금하다”고 말했다.
K팝 그룹 방탄소년단(BTS)이 이미 이런 흐름을 입증했다. 많은 젊은이들이 한국어를 전혀 모르면서도 아무런 거부감 없이 한국 음악에 빠져 들 듯, 한국어로 제작된 영화에도 거부감이 거의 없다는 것이다.
이들은 스마트폰을 손에 쥐고 어린 시절을 보냈기에 유튜브를 비롯한 각종 소셜 미디어에 익숙하다. 자막이 줄줄 흘러나오는 영상을 보는 것에 대한 거부감이 없다. 버라이어티도 “미국의 젊은 소비자들은 자막이 있는 아시아의 애니메이션, 무술영화, 컴퓨터 게임에 익숙하다”는 이유를 들어 봉준호 감독이 언급한 ‘1인치 자막’을 허무는데 젊은이들이 가장 주도적 역할을 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기생충’의 인기에는 밀레니얼 세대와 Z세대가 SNS 등을 통해 퍼트린 입소문도 주요한 원인이었다. 미국 연예 방송 진행자 니셸 터너는 “‘기생충’을 본 사람이 친구에게 ‘이 영화 꼭 봐야 해’라며 추천하고, 그 친구가 다른 친구에게 또 추천하는 식의 입소문이 대단했다”며 “그런 이야기를 듣다 보면 자연스럽게 ‘대체 기생충이 뭐지’ 하는 생각이 들게 된다”고 말했다.
지난해 칸영화제 때도 그랬다. 영국 일간 가디언은 칸영화제에서 이 영화를 본 Z세대 영화광들이 자신들을 ‘봉하이브(BongHiveㆍ벌집 안의 벌들처럼 열성적인 팬)’라고 칭하며 시상식이 열리기 전부터 SNS로 입소문을 냈다는 점을 강조했다.
이는 국내외를 가릴 것 없는 현상이다. 정덕현 대중문화평론가는 “디지털 네이티브라고 불리는 밀레니얼 세대, Z세대는 기성 세대와 달리 콘텐츠를 대할 때 국가와 언어, 인종, 민족 등의 장벽에 대한 거부감이 덜하다”며 “이 세대는 어느 나라 영화든 개성 있고 재미있으며 경쟁력이 있다면 소비할 수 있는 준비가 돼 있다”고 말했다.
봉준호 감독이 감독상을 받은 뒤 할리우드의 거장 마틴 스코세이지 감독의 말 “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창의적”이라 인용한 것 또한 같은 맥락이다. ‘기생충’이 한국 자본으로 한국 이야기를 담은, 가장 한국적인 영화였음에도 오스카상을 안았다는 역설은 그런 면에서 의미심장하다.
최근 10년간 아카데미 외국어영화상을 받은 아시아영화를 보면 이란 아스가르 파르하디 감독의 ‘씨민과 나데르의 별거’ ‘세일즈맨’ 두 편이 전부다. 두 영화 모두 이란과 프랑스의 합작 영화였다. 자국 자본과 인력을 찍은 영화로는 ‘기생충’이 유일무이한 것이다. 순수 한국인 스태프의 뛰어난 실력은, 그렇기에 해외의 주목 대상이다. ‘팀 기생충’에 속한 홍경표 촬영감독 이하준 미술감독 정재일 음악감독은 해외에서도 눈독을 들이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신과 함께’를 제작한 원동연 리얼라이즈픽쳐스 대표는 “‘기생충’은 한국 영화인들의 실력과 창의력을 증명한 작품”이라고 말했다. 봉 감독 스스로도 “‘기생충’은 가장 한국적인 것들로 가득 차서 오히려 가장 넓게 전 세계를 매료시킨 것 같다”고 말했다.
접근법은 한국적이었지만, 주제의식은 빈부격차와 불평등이라는 보편적인 점도 성공의 요인이었다. 가디언은 ‘기생충’을 두고 “전 세계 젊은 관객들이 공감할 수 있는 문제를 다루는 만큼 다양한 국가의 관객을 끌어 모을 수 있을 것”이라고 예측했다. BBC 또한 “계급 문제는 보편적이어서 어떤 관객이든 공감할 수 있을 것”이라 봤다.
물론 이 모든 것 뒤엔 봉 감독이 영화감독으로 꾸준히 쌓아온 ‘명성’이 있었다. 봉 감독의 전작 ‘옥자’ ‘설국열차’는 해외 자본과 배우를 동원한, 일종의 글로벌 영화였다. 그런 행보가 있었기에 적어도 해외 영화 관계자들 사이에서 봉 감독이 낯선 사람은 아니었다.
‘기생충’이 무너뜨린 장벽은 이제 한국 영화의 새로운 길이 될 것으로 보인다. 타임 보도에 따르면 지난달 로테르담국제영화제에서 심사위원상을 수상한 김용훈 감독의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짐승들', 선댄스영화제에서 상영된 한국계 미국인 감독 리 아이작 정 감독의 '미나리'에 많은 관심이 쏠리고 있다. 타임은 이를 “‘기생충’의 성공이 낳은 낙수효과”라 했다.
고경석 기자 kave@hankookilbo.com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