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료적 사법’ 적용한 서울고법… 항소심서 집행유예 선고
“피고인 들어갑니다.”
10일 오전 10시30분 경기 고양시 연세서울병원. 이 병원에 입원해 있는 60대 노인 이모씨가 환자복을 입은 채 휠체어를 타고 병원 내 작은 사무실로 들어섰다. 사무실은 법대 대신 디귿자로 정렬된 책상과 그 사이에 마련된 피고인 석으로 꾸며져 있었다. 서울고법 형사1부(부장 정준영)는 살인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이씨의 항소심 선고공판을 이날 법원이 아닌 병원에서 열었다.
이씨는 2018년 12월 아내 조모(사망 당시 65세)씨를 수 차례 때리고 흉기로 찔러 숨지게 한 혐의를 받는다. 1심에서 심신상실(심신장애로 사물을 변별하거나 의사를 결정할 능력이 없는 상태)을 주장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아 징역 5년을 선고 받았다. 그러나 이후 급격히 악화된 치매증상으로 인해 지난해 9월 보석 석방됐다. 항소심 재판장인 정 부장판사는 당시 “치료를 위해 구속을 풀어 치매전문병원에서 치료받도록 한 후 재판을 진행할 필요가 있다”고 설명했다. 법원이 치매환자에게 ‘치료적 사법’을 목적으로 보석을 허가한 첫 사례다. 치료적 사법이란 1987년 미국에서 등장한 개념이다. 법원이 처벌 또는 사건 해결에만 초점을 맞출 것이 아니라 ‘치유자’ 역할을 해야 한다는 이론에 근거한다.
재판이 열린 사무실은 여느 법정에서와 마찬가지로 숙연함이 흘렀다. 재판부는 선고에 앞서 이씨의 아들을 통해 석방 이후 치료경과를 들었다. 이씨의 아들은 “기본적으로 기억과 시간에 대한 기능이 저하돼 면회나 식사여부도 1~3분 후면 잊어버린다”며 “20~30년 전의 기억에 의존해 갑자기 화를 내는 상황도 조금씩 많아지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 “아버지가 치료적 사법의 일환으로 치료와 재판을 병행할 수 있게 됐음에도 본인은 이를 전혀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게 안타깝다”면서도 “나빠지던 부분이 전보다 나아지고 있는 만큼, 계속 치료 받으실 수 있게 해달라”고 선처를 구했다. 병원 관계자 또한 이씨의 증세가 많이 호전됐다고 설명을 덧붙였다.
검찰은 그러나 “이 사건이 전반적으로 피고인 본인이나 가족에게 힘들고 어려운 일이라 생각한다”면서도 “형사제도라는 것이 어떤 범행에 대해 처벌을 하고 사회를 범죄로부터 보호하는 기능을 하기 때문에 검사로서 개인적 감정보다 국가의 기능과 국민을 보호하기 위한 입장에서 말씀드릴 수 밖에 없다”며 원심과 같이 징역 12년을 선고해달라 재판부에 요청했다. 검찰은 또 “피고인의 인지ㆍ판단능력과 별개로 운동능력은 새로운 피해자를 발생시킬 수 없을 정도의 상태가 아니라고 생각했다”며 “피고인의 사정을 다 감안한다 해도 피해자가 사망했고, 흉기로 여러 차례 찔러 사망에 이르게 한 점을 고려했다”고 설명했다.
30여분간 이어진 재판 내내 고개를 푹 숙이고 아무 말도 하지 않던 피고인은 최후진술에서도 판결을 받아들이겠다는 취지로 “현실에 충실하겠다” 정도로 짧게 답했다. 이씨는 자신이 왜 이곳에 있는지, 어디에 와 있는 것인지 인지하지 못하는 듯 했다. 아들이 다가가 “여기가 어딘지 아시겠어요”라고 묻자 “법원”이라고만 답했을 뿐이다.
피고인과 검찰의 의견을 모두 들은 재판부는 실형을 선고한 원심을 파기하고 징역 3년에 집행유예 5년을 선고했다. 다만 집행유예 기간 동안에는 보호관찰을 명령했다.
재판부는 “이 사건 범행은 수법이 잔혹하고 결과가 중대해 엄하게 처벌함이 마땅하다”면서도 “피고인이 범행 당시 심신미약 상태에 있었고, 그 상태가 범행 후에 더욱 악화돼 현재는 중증 치매 증상을 보이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어 “치료가 절대적으로 필요한 피고인에게 시설이 갖춰져 있지 않은 교정시설에서 머무르게 하는 것은 정당하다는 평가를 받기가 어렵다”며 “징역형의 집행유예를 선고해 피고인에게 계속적으로 치료를 받도록 하는 것이, 모든 국민은 인간으로서 존엄한 가치를 지닌다고 선언한 헌법과도 조화를 갖는 것으로 평가된다”고 덧붙였다.
김진주 기자 pearlkim72@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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