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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重讀古典] 역병(疫病)과 정치

입력
2020.02.10 18:00
수정
2020.02.10 18:24
2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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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스크를 쓴 남성이 4일 중국 호북성 무한의 호숫가를 걷고 있다. 연합뉴스
마스크를 쓴 남성이 4일 중국 호북성 무한의 호숫가를 걷고 있다. 연합뉴스

중국 호북성 무한에서 발생하여 세계를 휩쓰는 전염병 때문에 사방이 어수선하다. 걱정스런 마음에 인터넷을 검색하다가 우연히 발견한 것이 있는데 중국과 대만에서 전염병을 부르는 말이 서로 다르다는 사실이다.

중국은 ‘신형관상병독감염폐렴(新型冠狀病毒感染肺炎)’이라고 하는데 우리나라 매체가 쓰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과 비슷한 뜻 같다. 그런데 대만에서는 간결하게 ‘무한폐렴(武漢肺炎)’이라고 한다. 무심히 보면 그저 줄여 쓴 말 같지만 다른 각도로 생각해 보니 은근하게 정치적 의도를 섞은 표현 같다. 약간 씁쓸한 감도 들었지만 중국인 특유의 ‘정명(正名)’사상의 발로려니 하고 넘어갔는데 정작 더 기막힌 일은 우리나라에서 생겼다.

국회에 전염병 대책 마련을 위한 특별 위원회를 만들고자 여당과 야당이 만났지만 명칭에 대한 이견으로 합의에 이르지 못했다고 한다. 그 이유가 한쪽은 ‘신종 코로나’, 한쪽은 ‘우한(즉 무한) 폐렴’이란 말을 넣자고 주장했기 때문이란다. 결국 작명(作名)하느라 회의를 작파한 셈이다. 정치가 사람을 이상하게 만드는 건지 혹은 선거가 코앞이라 그런 건지 모르겠지만 어이가 없었다.

각설하고 비록 중국과 대만이 현재 창궐하는 전염병을 서로 다른 명칭으로 부르지만, 한 글자로 줄여서 표현할 때는 공유하는 한자(漢字)가 있다. 바로 ‘역(疫)’이다. 드라마 허준에서 곧잘 등장했던 ‘역병’이 바로 이 ‘역’이다. ‘설문해자(說文解字)’는 ‘역’을 ‘백성이 모두 병에 걸리는 것(民皆疾也)’이라고 풀이했다.

옛사람들이 역병을 막는 방법은 그야말로 다양했지만, 일단 역병에 걸리면 가장 먼저 하는 조치는 격리였다. 1975년 호북성 운몽에서 ‘법률문답(法律問答)’이라는 진(秦)나라 죽간(竹簡)이 출토되었는데 엄격한 격리조치를 강조하고 있다. 목하 중국의 지역 봉쇄 조치와 겹쳐진다.

왜 ‘역’에 걸리는가. 역병은 갑골문(甲骨文)에 처음 등장한다. 갑골문에는 역병 말고도 다양한 병명이 보이는데, 내용을 분석해 보니 그때 사람들은 병의 원인을 누군가의 저주 또는 귀신의 소행으로 여겼다고 한다. 한(漢)나라 ‘석명(釋名)’에도 귀신(鬼)이 사방을 돌아다니며 일으키는 것이 역병이라고 했다. 이규경(李圭景)은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에서 그 귀신이 ‘여귀(厲鬼)’라고 밝혔다.

춘추시대에도 병이 들면 악몽이나 귀신의 저주라고 생각했다. BC535, 정나라 자산(子産)이 진(晉)나라를 방문했는데 그 임금이 3개월째 투병 중이었다. 온갖 신들에게 기도를 했는데도 낫지 않았다. 재상 한선자가 말했다. “우리 임금이 꿈에 침실로 들어오는 누런 곰을 보았는데 도대체 어떤 ‘귀신(厲鬼)’인지 모르겠습니다.” 박학다식한 자산에게 치료법을 물은 것이다. 그러자 자산이 대답했다. “진나라 군주가 현명하고 당신께서 정권을 담당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무슨 귀신이 붙겠습니까.” 그러면서 진나라가 대국답게 처신하면 병이 나을 것이라고 했다. 은근한 비판인 셈이다. 자산의 말을 따르자 병세가 호전되었다.

좋은 정치가 미치는 곳에 병마가 발붙일 곳은 없다. 이런 자산의 생각은 시대를 앞선 것이다. 제(齊)나라의 안자(晏子)도 자산과 같은 면모를 보여 주었다. BC522, 제나라 임금이 옴을 앓다가 학질까지 걸렸는데 1년이 지나도 낫지 않았다. 그러자 기도와 제사를 맡은 자들을 죽이려고 하였다. 무고한 사람들을 살리고자 안자가 나섰다.

안자는 임금의 정치가 겉과 속이 다르고 기만적 행태로 가득 차 있다고 질타한 뒤, 거동이 도리에 맞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래서 “백성들이 괴로워하고 남녀가 모두 저주하는(民人苦病, 夫婦皆詛)” 상황이라고 알려 준다. 그런 뒤에 요점을 말한다. “아무리 기도를 해도 어찌 억조창생의 저주를 이길 수 있겠습니까. 임금께서 그들을 죽이시려면 덕을 쌓은 후에 하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정치 개혁을 해야 병이 낫는다고 권유한 것이다. 모두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에 나온다.

이런 생각은 면면히 이어져서 ‘후한서(後漢書)’에는 황제의 정치가 화기(和氣)를 해치면 역병이 발생한다는 말도 보인다. 어디 중국의 황제뿐이겠는가. 세상의 모든 권력자들이 귀담아 들을 이야기다. 서로 어우러지지 못하면 사회는 병든다.

중국에서 이 병을 예견했던 의사 이문량(李文亮)이 환자를 돌보다가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그가 전염병을 경고할 때, 중국 정부는 이문량과 그 친구들을 유언비어 날조자로 체포하고 일종의 반성문, 중국식 용어로 훈계서(訓誡書)에 서명하게 한 뒤 풀어주었다고 한다. 그는 생전에 “건강한 사회에는 하나의 목소리만 있어서는 안 된다(一個健康的社會不該只有一種聲音)”고 했다. 중국 정부는 지금에서야 후회하고 그에게 미안해한다고 한다. 일방통행 사회의 비극이 아닌가 싶다. 그의 말을 들었으면 이런 일이 생겼겠는가. 만시지탄을 금할 수 없다.

아무래도 정치와 역병 사이에는 모종의 관계가 있어 보인다. 우리나라도 예외는 아닐 것이다.

박성진 서울여대 중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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