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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평 공장에서 ‘공장을 만드는 공장’ 글로벌 강소기업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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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평 공장에서 ‘공장을 만드는 공장’ 글로벌 강소기업으로!”

입력
2020.02.07 23: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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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창은 영일엔지니어링(주) 대표

이창은 영일엔지니어링 대표는 “직원들 모두 ‘공장을 만드는 공장’을 이끈다는 자부심이 대단하다”면서 “직원들의 노하우와 기술력이 영일의 성장동력이자 가장 큰 자산”이라고 말했다. 김민규 기자 whitekmg@hankookilbo.com
이창은 영일엔지니어링 대표는 “직원들 모두 ‘공장을 만드는 공장’을 이끈다는 자부심이 대단하다”면서 “직원들의 노하우와 기술력이 영일의 성장동력이자 가장 큰 자산”이라고 말했다. 김민규 기자 whitekmg@hankookilbo.com

영일엔지니어링(주)은 ‘공장을 만드는 공장’이다. 전기차에 필수 부품인 핸들모터, 전기 콤프레샤, 제동 장치 등의 생산 라인을 제작한다. 라인 하나가 80억을 호가한다. 2009년, 포드에 납품하는 부품회사인 TRW로부터 기술력 인정받아 그해부터 10년 넘게 거래하고 있는 명실상부한 글로벌 강소기업이다.

흔히 ‘벤처’하면 국내 기업 규모와 비교할 때 매출(2018년 400억)이 큰 편이지만, 신기술로 똘똘 무장해 있다는 측면에서 전형적인 벤처기업이라고 할 수 있다. 이창은 영일엔지니어링 대표가 한국벤처기업인협회대구경북지회 부회장을 맡고 있기도 하다.

수입품 국산화에 성공 후에 찾아온 뜻밖의 위기

시작은 10편 남짓한 공간이었다. 이창은 대표와 현재 ㈜영일랩스를 맡고 있는 남편 최태원 대표가 1994년에 창업했다. 기계 작동용 전기 컨트롤박스를 주력 아이템이었다. 결혼 전 10년 동안 경리와 기획 업무를 보왔던 이 대표가 살림을 맡고 최 대표는 기술 개발과 기계 제작, 품질 관리를 총괄했다. 신생 기업이었던 터라 이 대표는 경리 업무가 끝나면 주문 수주는 물론 기계 조립에도 뛰어들었다.

1997년에 터진 IMF가 오히려 기회가 됐다. 당시 직원 7명이던 영일엔지니어링은 자동차 부품 기업인 만도에 납품하고 있었다. 경기가 어려워지자 만도에서는 경주공장을 프랑스 기업인 발레오에 매각했다. 영일엔지니어링은 자연스럽게 글로벌기업과 거래를 트게 됐다. 1996년 6월에 평화발레오의 협력사로 등록했다. 이 즈음 생산 품목을 부품 생산에서 부품생산 설비시스템으로 전환했다.

2006년에 다시 한번 기회가 찾아왔다. 대기업이 납품하는 A사가 모터핸들 생산시스템 개발을 의뢰해왔다. A사는 미국의 자동차 부품업체인 TRW로부터 모터핸들을 수입하다가 국산화를 결심한 것이었다. 이 대표는 흔쾌히 A사와 손을 잡고 개발에 들어가 성공했다.

막상 고비가 닥친 것은 개발 후였다. A사가 생산 정책에 변화를 가져온 것이었다. 거래를 끊을 수도 이어가기도 힘든 상황이 되어버렸다. 개발비를 회수해야 하는 시점에서 말 그대로 마른 하늘에 날벼락이었다.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부부가 함께 안동댐에 갔어요. 돌아오지 않으려구요. 그때 아들과 딸이 눈에 밟혀서 돌아왔어요. 특히 딸을 두고 갈 자신이 없었어요. 사업 초기에 딸을 임신해서 만삭일 때 부도 전화를 받고 양수가 터졌어요. 너무 힘들게 낳아 키운 딸이죠.”

영일엔지니어링은 ‘공장을 만드는 공장’이다. 전기차에 필수 부품인 핸들모터, 전기 콤프레샤, 제동 장치 등의 생산 라인을 제작한다. 김민규 기자 whitekmg@hankookilbo.com
영일엔지니어링은 ‘공장을 만드는 공장’이다. 전기차에 필수 부품인 핸들모터, 전기 콤프레샤, 제동 장치 등의 생산 라인을 제작한다. 김민규 기자 whitekmg@hankookilbo.com
이창은 영일엔지니어링 대표가 직원들과 함께 업무와 관련된 의견을 나누고 있다. 김민규 기자 whitekmg@hankookilbo.com
이창은 영일엔지니어링 대표가 직원들과 함께 업무와 관련된 의견을 나누고 있다. 김민규 기자 whitekmg@hankookilbo.com

유럽 기업인들이 영일엔지니어링을 선택한 ‘인간적인’ 이유

버티다 보니 활로가 열렸다. 살길을 열어준 것은 TRW였다. A사에서 자사 제품 수입을 중단하자 상황을 파악하려고 한국에 들어왔다가 영일엔지니어링을 찾아왔다.

“우리와 손잡을 수 있겠습니까?”

TRW가 생산 라인 설계를 의뢰했다. 2007년, 첫 작품이 중국 공장의 생산라인을 재정비였다. 일종의 테스트였다. 재정비 작업으로 중국 공장의 문제점을 모두 해결했다.

2009년 드디어 유럽에 생산 라인 설계 의뢰가 들어왔다. 문제는 자금이었다. 당시 영일엔지니어링의 연매출은 70억이었다. 생산 라인 의뢰가는 100억. 한국 공장에서 라인을 제작해서 유럽 공장이 이식한 후에나 대금이 완납되는 상황에서 여유 자금이 너무 없었다. 다행히 정부 관계자들의 지원을 받아 겨우 계약을 따냈고, 기업은행에 계약금 20억 입금한 후에 몇 가지 조건을 걸고 대출을 받는데 성공했다.

기술력은 자신 있었다. 강점인 전기기술 노하우에 소프트웨어 기술력을 강화하기 위해 2005년 영일랩스를 자회사로 설립, 경쟁력을 꾸준히 키워왔다. 2006년 A사의 기술개발 제의가 들어왔을 때도 영일랩스가 있어 자신있게 뛰어들었다. 또한 소비자들의 다양한 요구를 수용하기 위해서는 소프트웨어 기술은 필수다. 영일랩스를 통한 꾸준한 연구 개발은 영일엔지니어링이 글로벌강소기업의 입지를 굳힌 비결이다.

2010년 첫 납품 이후 주문이 꾸준하게 들어왔다. 지난해에는 400억 매출에 성공했다. 유럽 기업들과의 경쟁에서 이긴 비결은 가격 외에 한국인 특유한 ‘정’ 문화가 한몫했다.

“유럽 회사에서는 공장에 라인을 설치하러 와서는 설치 과정 중에 5시만 되면 곧장 연장을 놓고 호텔로 가버리더군요. 우리는 그렇게 매정하지가 못해서 그들이 필요하면 10시까지도 작업을 해줬죠. 그게 소문이 났어요. 현장에서 우리를 선호하니 기업경영자들도 우리와 손을 잡을 수밖에요.”

2013년엔 7개 프로젝트를 동시에 수행했다. 심지어 공간이 부족해 공장을 임대해 작업을 수행했다. 그렇게 슬로바키아, 폴란드, 미국, 멕시코, 중국 등에 수출했다.

2018년에는 전기콤프레샤 주문을 받았다. 이 역시 전기차에 반드시 필요한 부품으로 영일랩스와 협업해 개발에 성공했다.

어느덧 26년의 역사와 내공이 쌓였다. 그 사이 영일은 ‘베테랑 전문가’들이 꾸려나가는 탄탄한 글로벌기업으로 자리매김했다. 이 대표는 “직원들 모두 ‘공장을 만드는 공장’을 이끈다는 자부심이 대단하다”면서 “직원들의 노하우와 기술력이 영일의 성장동력이자 가장 큰 자산”이라고 말했다.

직원들 못잖은 기술적 성장을 이루기도 했지만, 이 대표는 경영자로서의 수업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영진전문대 사이버 1기로 입학해 산업시스템을 전공했고, 영남대에서 경영학 석사, 디지털융합비지니스 박사 과정을 수료하고 현재 논문을 작성 중이다. 최태원 공동대표도 공부 열정은 못잖아. 이 대표와 같은 곳에서 박사 과정을 수료하고 논문을 쓰고 있다.

“공부한다고 모든 걸 배울 수 있는 건 아니지만, 그것마저도 안 하면서 미래를 대비할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바라는 만큼은 아니지만 애쓴 만큼은 답을 주는 것이 사업이고 세상이라는 신념으로 하루 하루 배우고 또 하나씩 하나씩 발전시켜 나가고 있습니다. 영일을 비롯해 대한민국 중소기업을 많이 응원해주십시오!”

김광원기자 jang750107@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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