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 ‘갯마을’ ‘산불’의 김수용 감독
※ 한국영화가 지난해 탄생 100년을 맞았습니다. 새로운 100년을 시작하며 영화보다 재미있는 한국영화 100년의 이야기를 영화전문가를 통해 매주 토요일 <한국일보>에서 들려드립니다.
김수용(91) 감독은 1929년 경기 안성에서 부농 집안의 6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일제 강점기에 청소년기를 보냈던 그는 소설 ‘설국’을 쓴 가와바타 야스나리에 심취했을 만큼 일찍부터 문학에 뜻을 두었는데, 안성공립농업학교 재학 시절 해방을 맞자 3ㆍ1운동을 그린 희곡 ‘대지의 노을’을 직접 쓰고선 배우와 연출까지 겸하며 작가의 소질을 내비친 수재였다. 해방 직후 혼란스러운 정국이었지만 소설과 연극에 대한 열정은 초등교원 양성학교였던 서울사범학교에 진학해서도 이어졌다. ‘K선생의 초상’이라는 습작을 잡지에 기고해 소설가 계용묵에게 칭찬을 받았고, 학교에 연극부를 만들고 연극 부장을 맡아 유치진의 ‘춘향전’과 ‘조국’, 그 외에도 셰익스피어, 몰리에르, 입센의 희곡을 무대에 올리는 등 창작 활동으로 분주한 나날을 보냈다.
“그 시기는 내게 소중한 시간들이었습니다. 우선 낭만과 글쓰기의 아름다움을 가질 수 있었고, 연극을 통해서 나 자신의 삶을 무대 위로 올려놓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공연 전문지 ‘객석’ 1987년 12월호)
◇인생 전환점이 된 군대
사범학교를 졸업하고 교사로 발령을 기다리고 있던 1950년 한국전쟁이 터졌고, 9ㆍ28 서울 수복 후 잠시 서울에 돌아온 그는 영장을 받고 군에 입대했다. 부산으로 가는 입영열차 안에서까지 영문 소설을 읽고 있던 그는 영어에 숙달된 인재를 찾던 군의 필요에 따라 중위계급을 달고 1950년 말에서 1952년까지 부산 부둣가와 제주도를 오가며 통역장교로 근무했다. 영화와의 만남은 바로 이 무렵의 일이었다. 복무 중 짧은 방송극을 써서 ‘국군의 시간’이라는 KBS 프로그램에 투고했는데 이것이 국방부로부터 큰 호응을 얻었다. 때마침 국방부 정훈국 장교로 근무하던 옛 은사로부터 ‘앵무새처럼 무슨 통역인가. 자네 전공을 살려서 여기 영화과에 가는 게 어떤가’란 권유를 받고 1954년 정훈국 산하 영화과로 들어가게 된다.
그의 첫 작업은 ‘잊지 말자 6ㆍ25’(1955), ‘10분간 휴식’(1956) 같은 단편 군영화와 뉴스 영상들이었다. 군의 정신교육과 계몽에 목적을 둔 30여편의 단편을 습작 삼으며 김 감독은 영화 만들기의 실제를 배워나갔다. 군의 편집기사로 일하던 양주남 감독이 작가 오영진의 시나리오를 쥐고 ‘배뱅이굿’(1957)을 감독하게 되자, 김 감독은 당시 육군 대령이었던 소설가 선우휘의 배려로 두 달간 휴가를 얻고 조감독으로 들어가 극영화 제작 과정을 익혀나갔다.
코미디 영화 ‘공처가’(1958)는 ‘침향’(1999)에 이르기까지 109편에 달하는 장대한 경력의 출발점이었다. ‘배뱅이굿’의 작업 때 김 감독을 눈여겨본 고려영화사 사장 김보철이 극영화 연출을 제안했고, 가슴이 벅차 오른 그는 군인 신분이면서도 몰래 영화를 찍기 시작했다. 작업은 토요일에 꾀병을 부려 퇴근하고 일요일에 촬영하는 식으로 이뤄졌는데, 나중에 군 영화과에서 눈치를 채자 “극영화를 잘 찍어야 군영화도 향상됩니다. 봐주십시오”하고는 영화를 완성했다.
국도극장에 걸린 ‘공처가’는 매진 사례 봉투를 7장이나 받을 만큼 큰 성공을 거뒀다. ‘어떤 놈이 찍었길래 이렇게 사람이 많이 와’라는 말을 들을 정도였다. 연이어 ‘3인의 신부’ ‘구혼결사대’(1959)를 성공시키면서 김 감독은 일약 재능 있는 코미디 감독으로 유명세를 얻었다. 그러나 현역 장교 신분으로 영화 연출을 겸한다는 건 문제의 소지가 다분했다. 선우휘가 동명이인이라고 둘러댔지만 신문광고에까지 이름이 실리는 마당에 더는 감출 수 없었고, 내부에서는 김 감독을 군법재판에 회부해야 한다는 이야기까지 나왔다. 이때 운명의 손이 김 감독을 구원했다. 극적이게도 고향 친구이자 동창생이 정일권 참모총장의 부관으로 재직하고 있어서 도움을 줄 수 있었던 것이다. 김 감독은 대위로 예편해 8년의 군생활을 마쳤고, 자유로운 몸으로 다음 영화를 찍을 수 있게 되었다.
◇문예영화에 눈뜨다
‘청춘배달’(1959), ‘연애전선’(1960), ‘내 아내가 최고야’(1961) 등 소시민적 해학과 유머를 담은 영화들을 잇달아 히트시키면서 김 감독은 ‘청춘명랑극의 명수’(영화전문지 ‘영화세계’ 1962년 3월호)로 불리게 됐다. ‘청춘교실’(1963)과 ‘여자 19세’(1964)는 청춘영화의 붐을 일으켰고, 김승호 주연의 서민 드라마인 ‘굴비’(1963), ‘월급봉투’(1964) 또한 큰 인기와 호응을 얻으며 다양한 장르에서 능력을 인정받았다. 그러나 그의 눈에는 당대 한국영화의 경향이 마땅치 않았다. 신파극처럼 흥행성이 검증된 이야기를 진부하게 반복하거나 일본영화의 각본을 표절하는 일이 빈번했다. 정작 한국인의 얼굴과 정서를 반영한 작품은 드물다고 그는 봤다. 김소월의 시에서 주제를 얻은 ‘애상’(1959), 모파상의 단편을 한국적으로 번안화한 ‘돌아온 사나이’(1960)을 발표하면서 김 감독은 차츰 흥행과 거리를 뒀고, 문학적 내러티브(서사)를 시적인 정서와 차분한 호흡으로 풀어나가는 자신만의 작풍을 추구하기 시작했다.
“그때 ‘문예’라는 월간지가 있었는데 그게 망하고 ‘현재문학’이라는 것이 나오기 시작했어요. 그리고 단행본이 조금씩 나왔고…. 한국 문학전집이 한두 권 나오기 시작할 때 거기서 소재를 찾은 거죠. (중략) 내가 그때 생각한 게 문학은 문자를 가지고 관념의 세계와 환상의 세계를 독자에게 환기시켜서 테마에 접근하는 예술이지만, 어쩌면 그 내러티브의 흐름이 영화와 같지 않은가 하는 점이에요.”(제7회 부산국제영화제 회고전 인터뷰)
김영수의 희곡을 영화화한 ‘혈맥’(1963)을 기점으로 김 감독의 영화 세계는 큰 변곡점을 맞이한다. 해방 후 월남해 판자촌에 모여 사는 실향민들의 애환과 세대 간 갈등을 그린 이 작품은 문학적 내러티브의 바탕에 근대화하는 한국사회와 하층민들 삶의 풍경을 사실적으로 반영했고, 제3회 대종상영화제 작품상을 수상하며 작품성을 인정받았다. 감독의 말에 따르면 “여기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나는 자신의 이야기와 그것을 담아낼 형식이라는 그릇을 발견한 셈”이었다. 소년 가장의 수기 ‘윤복이의 일기’를 극화한 ‘저 하늘에 슬픔이’(1965)에서 김 감독은 교육현장의 현실과 빈곤과 허탈에 몸부림치는 아이들의 생활을 다뤘다. 영화는 광화문 국제극장에서 두 달간의 장기 흥행에 돌입, 서울에서 29만명의 관객을 동원한 걸 넘어 전 국민을 울렸고 제26회 베니스영화제에도 출품됐다.
오영수의 원작을 신봉승이 각색한 ‘갯마을’(1965)은 문예영화의 전성기를 연 기념비적인 작품이었다. 이 작품은 10만 관객을 동원하며 문예영화도 상업적으로 성공할 수 있음을 입증했다. 김 감독은 일제강점기라는 배경 설정을 지우는 대신, 수려한 시네마스코프 영상으로 한국 자연의 풍광이 지닌 토속성과 그 안에서 살아가는 여성들의 모습을 포착하며 ‘척박함 속에 숨은 서정적인 아름다움’(정일성 촬영감독, 영화전문지 ‘영화천국’ 61호)을 이끌어냈다. 이때부터 김 감독의 필모그래피는 새로운 단계로 접어들었다. 구체적인 시대상을 명시하지 않은 탈역사적 시공간에서 인간 욕망의 보편성을 그리는 문예영화의 틀을 정립한 것이다. 극작가 차범석의 희곡을 각색한 ‘산불’(1967)에서도 감독은 전쟁의 참상과 인간성의 황폐화에 비중을 둔 원작과는 달리, 산골촌락에서 빚어지는 여자들의 욕망과 고민에 초점을 맞추며 역사를 추상화했다.
‘갯마을’이 일으킨 문예영화의 유행은 ‘유정’(1966)이 국도극장에서만 33만 관객을 동원하면서 최고조에 이르렀다. 이듬해 김 감독은 김승옥의 ‘무진기행’을 바탕으로 해 현대인의 심리를 그린 ‘안개’(1967)로 제14회 아시아영화제 감독상을 수상했고 ‘산불’ ‘만선’ ‘까치소리’ ‘어느 여배우의 고백’ 등 한국영화사에 손꼽히는 문예영화의 걸작을 잇달아 쏟아냈다. 본인의 말마따나 김수용은 “외국 문물의 영향을 받아 변해가는 사람들의 얘기, 사회에서 소외된 사람들의 이야기”를 주로 다뤘다. 검열과 통제가 심해지고 사회상을 다룬 영화가 허락되지 않던 시절, 오히려 김 감독은 우수영화라는 미명 아래 국책으로 장려됐던 문예영화에서 자신의 작가적 구도를 찾아나갔다. 그에게 있어 문예영화란 근대화의 이면에 드리워진 시대의 그림자와 불안에 잠식된 인간 실존의 얼굴을 영화로 반영하는 작업이었다.
조재휘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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