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닫기
뮤지컬 무대에 오른 ‘여명의 눈동자’… 41명 앙상블이 들려주는 비극의 현대사

알림

뮤지컬 무대에 오른 ‘여명의 눈동자’… 41명 앙상블이 들려주는 비극의 현대사

입력
2020.02.07 04:30
22면
0 0
뮤지컬 ‘여명의 눈동자’. 수키컴퍼니 제공
뮤지컬 ‘여명의 눈동자’. 수키컴퍼니 제공

눈 덮인 지리산 어느 이름 모를 골짜기. 날카로운 총성과 함께 눈밭에 선혈이 흩뿌려진다. 그 위로 두 남녀가 소리 없이 스러진다. 이제 그곳엔 사랑과 우정을 모두 잃은 한 남자만이 홀로 남았다.

이들의 비극적인 운명엔 어떤 사연이 숨겨져 있는 걸까. 거슬러 올라간 시간 속에 일본군 위안부 윤여옥과 조선인 학도병 최대치가 있다. 태평양전쟁 막바지인 1944년 중국 난징 위안소에서 만난 여옥과 대치는 서로를 위로하다 사랑에 빠지지만, 위안소 탈출 과정에서 결국 헤어진다. 사이판 위안소까지 끌려온 여옥은 731부대 출신 의무병 장하림의 도움으로 목숨을 구하고, 두 사람은 함께 해방을 맞이한다.

평화로운 시간을 보내던 여옥과 하림 앞에 어느 날 대치가 찾아온다. 미 정보국 비밀 요원인 여옥과 대치, 공산당원이 된 하림은 좌우 이념 대립에 휘말리고, 격동의 시간은 제주 4ㆍ3사건과 한국전쟁까지 숨가쁘게 내달린다.

위안소에 끌려온 여옥.
위안소에 끌려온 여옥.

뮤지컬 ‘여명의 눈동자’는 일제강점기부터 한국전쟁까지 한국 현대사를 관통하는 대서사를 다룬다. 1991년 MBC에서 방영돼 평균시청률 44%를 기록한 국민 드라마 ‘여명의 눈동자’를 원작으로 한다. 드라마 최초로 일본군 위안부 문제와 제주 4ㆍ3사건을 다뤄 사회적 반향을 일으켰던 작품이다.

뮤지컬은 방대한 이야기를 효율적으로 압축했다. 주요 사건의 경과와 시간 흐름을 영상으로 간략히 제시하면서 핵심에만 집중하는 서사 전략을 짰다. 시대상에 대한 깊이 있는 통찰이나 새로운 해석은 부족하지만, 그 대신에 서울과 난징, 상하이, 하얼빈, 사이판, 제주, 지리산 등을 정신없이 오가는데도 이야기를 따라가기에 무리가 없다.

2막은 이념의 전쟁터가 된 제주에 상당 시간을 할애한다. 서북청년단의 탄압과 제주도민의 봉기, 오라리 방화 사건, 토벌대의 양민학살 등 참혹한 비극이 고스란히 재현된다. 살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친구를 죽인 청년이 “왜 하나도 슬프지 않지”라며 공허하게 넋두리할 때 객석은 숨소리도 내지 못한 채 고개를 떨구게 된다.

제주 4ㆍ3사건을 묘사한 장면.
제주 4ㆍ3사건을 묘사한 장면.

이 작품의 진짜 주인공은 무려 41명에 이르는 앙상블 배우들. 이들은 당시 이름 없이 살아간 사람들이 겪었던 절망과 환희를 생생하게 되살려낸다. 다만, 역사의 무게가 워낙 묵직하다 보니, 여옥 대치 하림의 이야기가 다소 짓눌리는 감이 있다. 1막에서 자신의 목소리를 냈던 하림이 2막에선 사건 밖을 맴돌며 내레이터처럼 관찰자 역할에 머문다는 점도 아쉽다.

무대는 뒤쪽에서 앞쪽으로 내리막길 형태인데 덕분에 공간감이 탁월하다. 무대 위 구조물의 선들과 무대 경사면의 선들이 하나의 소실점으로 향하도록 의도해, 과거에서 현재, 미래로 이어지는 역사성을 표현했다고 한다. 음악도 수려하다. 특히 하림이 여옥을 대치에게 보내면서 부르는 ‘행복하길’이라는 곡이 상당히 좋다.

이 작품은 지난해 초연 당시 투자 사기를 당해 개막이 3주가량 미뤄지는 풍파를 겪었다. 사기 사건 여파로 여옥과 대치의 철조망 키스신에서 한동안 앙상블 배우들이 철조망을 들고 있어야 했다. 이번 공연엔 제대로 된 세트가 등장한다. 27일까지 서울 종로구 세종문화회관 대극장.

김표향 기자 suzak@hankookilbo.com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