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춘재 연쇄살인 8차 사건의 범인으로 지목돼 억울한 옥살이를 한 윤모(52)씨가 31년 만에 다시 법정에 섰다.
윤씨는 6일 오전 수원지법 형사12부(김병찬 부장판사) 심리로 열린 ‘이춘재 화성연쇄 8차 사건 재심 청구’ 재판에 피고석에 앉았다. 이날 재판은 준비기일 일정으로 공판에 앞서 증인 채택 여부 등을 결정하는 시간이다.
하지만 31년 전 그날과 법정 분위기는 사뭇 달라 보였다. 무기징역을 선고했던 재판부는 윤씨에게 사과를 했고, 영장 없이 감금 등을 묵인한 검찰은 윤씨가 무죄임을 입증하는 증거물을 제출했다.
재판이 시작되자 재판부는 “몸이 불편하니 앉아서 대답해도 됩니다”, “진술거부를 해도 무방하며 불이익을 받지 않습니다”, “유리한 사정이 있을 때는 언제든지 말씀하셔도 됩니다” 등 하나하나 설명해 줬다.
특히 재판부는 “피고인은 억울하게 잘못된 재판을 받아 장기간 구금됐다”며 “법원의 판사로 근무하고 있는 사람으로서 굉장히 죄송함을 느낀다”고 말했다.
흔히 영화에서 나오는 검찰과 변호인간 고성이 오가는 그런 모습은 온데간데 없었다.
오히려 변호인이 검찰에 “증거 목록을 상세히, 최근 수사한 내용까지 주시면 좋겠다”고 하자 검찰은 “방대한 자료니 시간을 달라. 최대한 협조하겠다”고 답했다.
검찰은 이날 재판에서 “검찰은 피고인이 재심 청구에 따라 재조사를 편 결과 당시 수사기관에 의한 자백 진술이 불법감금과 폭행 등에 의한 허위진술임이 확인됐다”며 “또 국립과학수사연구원의 연구결과에서 나온 범죄현장의 음모 분석 값은 표준시료 값이었고, 윤씨의 음모 분석 값은 제3자의 것으로 재심청구인의 것과 무관한 것을 확인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국과수 감정인에 의한 자의적 조작된 사실을 확인했다”고 덧붙였다.
이어 “당시 경찰은 영장 없이 75시간 동안 감금하고 잠을 재우지 않은 사실도 확인했다”며 “이춘재의 직접조사에서도 자발적이고 범인만 아는 내용, 특히 변사체의 상태가 일치했다”고 변호인이 주장해야 할 윤씨의 무죄 입증을 검찰이 설명한 셈이다.
더 이상의 공판 진행 없이 재판부가 ‘무죄’라고 선고해도 무방할 정도였다.
실제 재판부는 “검찰의 증거 자료를 보면 사실상 무죄 취지의 내용이 대부분이기 때문에 국과수의 감정결과 등을 볼 필요가 있겠느냐”며 윤씨의 무죄에 초점을 맞추려 했다.
하지만 변호인단은 ‘실체적 진실’ 규명을 위해 공판이 보다 더 철저하게 증인을 세우고, 증거조사를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변호인 측은 “윤 씨의 무죄를 입증할 증거가 차고 넘친다고 해도 형사소송법에 따라 당시 (윤 씨를 유죄로 판단한) 증거로 제출된 문제점을 확인하는 절차는 반드시 필요하다”며 “이번 재판이 아니고서 국과수가 왜 감정결과를 조작했는지, 이춘재의 범행 사실을 들을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아울러 당시 수사 관계자와 국립과학수사연구원 등의 불만이 있을 수 있는데, 그들의 반론권도 보장된 상태에서 실질 심리가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어 “이번 사건 재심은 검찰의 공격, 변호인의 방어가 이뤄지는 일반 형사재판과 달리 피고인의 무죄를 입증하고, 사건의 실체적 진실을 밝히기 위해 검찰과 변호인이 협업하는 특수한 성격을 갖고 있다”며 “이런 과정은 이춘재에 의한 희생자들, 그리고 윤 씨 및 또 다른 위법한 수사로 인해 범인으로 몰린 수많은 사람에게 힐링이 되는 재판이 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변호인 측은 추가 증거물 내용도 제출해 달라고 검찰에 요구했다.
이날 오전 경찰이 검찰에 송치한 이춘재 연쇄살인 8차 사건 전부, 19권에 달하는 과거 수사기록, 이춘재와 당시 수사 관계자, 국과수 감정인 등을 증인으로 요청했다.
특히 국가기록원에 보관 중인 범인의 것으로 추정되는 음모 2건에 대한 감정도 신청했다. 이춘재를 증인으로 세우는 것도 재판부에 요청한 것으로 알려졌다.
2차 공판 준비 기일은 다음달 19일 오전 같은 법정에서 열린다.
재판을 마친 윤씨는 환한 미소를 지었다. 그는 “당시 판사들의 얼굴은 보지도 못했다. 그들의 사과가 나와야 한다고 생각한다” 말했다.
이춘재 연쇄살인 8차 사건은 1988년 9월 16일 경기 화성군 태안읍 진안리 박모(당시 13세)양이 집안에서 성폭행 당하고 숨진 채 발견된 사건이다.
경찰은 이듬해인 1989년 윤씨를 범인으로 지목, 검거했으며 1심, 항소심, 상고심에서 모두 무기징역이 선고됐다. 이후 20년 뒤인 2009년 모범수로 가석방됐다.
이 과정에서 경기남부경찰청이 당시 증거품에서 이춘재의 DNA를 확보해 재수사에 나섰고, 이춘재가 “8차 사건도 내가 했다”고 밝히면서 윤씨가 재심을 신청하게 된 것이다.
한편 경찰은 이날 8차 사건에 대한 사건을 검찰에 송치했다. 경찰은 이춘재에게 살인 및 강간치사 등의 혐의를, 당시 수사 검사와 경찰 등 8명에게 직권남용 체포·감금과 허위공문서 작성 및 행사 등 혐의를 각각 적용했다.
하지만 이들은 공소시효 만료로 인해 형사 처벌을 받지는 않는다.
임명수 기자 sol@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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