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에 오면 마음이 편안해진다. 수년째 똑같은 집에 오는 것이 편하고, 한가롭고 심심한 데도 지루하지가 않다. 우리 집보다 더 작고 더 불편한 집에서 “아, 좋다.” 소리가 절로 나온다. 영국 사람들은 영감(inspiration)이란 단어를 제일 많이 사용한다는데, 영국에 오면 나는 ‘평화’와 ‘행복’ 같은 추상적인 단어가 떠오른다.
영국의 시골은 조용하다. “어쩌면 이렇게 조용하지?”하고 물으니, 남편도 “그러게. 우리는 사람이 사는데 이렇게 조용하진 않지. 무슨 소리가 나도 나지” 한다. 작은 집들이 벽을 공유하며 닥지닥지 붙어있는 골목이 마치 사람이 살지 않는 듯하고, 열린 창문 사이로 화장실 변기의 물 내리는 소리가 새어나갈까 봐 신경이 쓰일 정도다. 그나마 주말에는 바비큐 하는 이웃의 웅성거림과 연기 냄새라도 있는데, 일요일 아침은 죄다 늦잠을 자는지 더 조용하다.
공원도 조용해서 좋다. 우람한 나무와 넓고 푸른 잔디로 이루어진 공원에는 가게나 화장실 같은 편의시설은 없고 벤치와 쓰레기통만 뜨문뜨문 있다. 큰소리를 내면 안 된다는 법이라도 있는지, 멀리 있는 사람을 큰 소리로 부르는 사람도 없고 칭얼대거나 떼쓰는 아이도 없다. 목줄을 풀어주어 자유롭게 돌아다니면서도 개가 사람에게도 다른 개에게도 짖지 않는다. 이런 건 타고나는 건지, 보고 배우는 건지 의문이 생긴다.
영국 사람들은 부끄러움이 많고 낯가림이 심해서 오랜 기간 함께 출퇴근하는 사람과도 말 한 마디 안 할 정도라니, 딸의 어릴 적 등하교길에 매일 마주치는 영국 엄마들이 수개월 동안이나 내게 말을 하지 않은 것도 이해가 된다. 불평하는 소리도 들을 수 없다. 버스 안에서 큰소리로 통화하는 외국인이 있어도 서로 못마땅한 눈빛만 교환할 뿐이고, 하모니카를 부는 취객이 있어도 직접 말하지 않는다. 운전기사가 조용하게 부탁하면 술에 취한 남자가 이내 조용해지는 참 희한한 나라다.
시내에 나갔다가 예쁜 정원에 끌려 들어간 곳에 조용한 방(Quiet Room)이라고 쓰여 있다. 학교였던 곳이 돌아가신 운영자의 뜻에 따라 지금은 ‘정신적인 활동’이라면 누구나 이용할 수 있는 장소가 되었단다. 요가나 명상수업을 하거나 목사님이나 스님에게 빌려주기도 하는데, 종교와 상관없이 일반인이나 직장인도 일상 속 온갖 스트레스를 내려놓을 수 있는 공간이기를 희망해서란다. 선한 사람을 만나기라도 한 듯, 내 마음이 평화로워졌다. 아름답게 가꾼 정원은 열어둔 채, 결국 운영의 어려움으로 조용한 방 몇 개는 남겨두고 Bed & Breakfast로 전환했단다. 꽃을 담아놓은 꽃병은 가져갈 수 있고 거실에서는 차를 끓여 마실 수 있는데, 얼마 되지 않는 꽃값과 찻값은 운영비에 보태진다. 아무도 없는 거실에서 차 한 잔을 끓여 마신 후, 안내문에 쓰인 대로 찻잔은 씻어놓고 티백은 개수대 밑 쓰레기통에 넣었다. 보라색 스위트피가 담긴 꽃병을 들고 나오면서, 누군가의 너그러운 마음과 욕심 없는 희망에 작은 감동이 일었다.
“최근 몇 년 동안 대부분의 사람들이 생각하는 성공적이고 풍요로운 삶에 대한 개념이 180도로 바뀌었다. 이제 성공한 삶은 바쁘고 화려한 삶이 아니라 평화롭고 조용한 삶이다.” - 어맨다 탤벗, ‘About Happiness’
이웃도 가게도 없는 드넓은 들판 위에 홀로 떨어진 집들을 종종 보았다. “Silence is important for English people.”이라며 일상 속에 침묵을 넣은 사람도 만났고, 조용한 곳에 살면서도 더 조용한 곳으로 휴가를 떠나는 사람도 만났다. 집에서 바라보는 하늘이 넓고 낮다. 구름은 손에 잡힐 듯 가깝다. 정원에는 새와 나비가 날아다니고, 벌이 붕붕거리며 집안으로 들어온다. 이름 모를 벌레와 거미도 제집처럼 마음대로다. 조용한 곳에서 가만히 있으니 평화롭다.
아름다운 호숫가를 걸었다. 조용해서 더 아름답다. 조용하기 때문에 몸과 감정이 건강해지고 제정신이 든다. 혼자라면 살짝 겁이 날 것 같은 한적한 길에 표지판이 하나 있다. ‘더 조용한 곳(Quieter Place)’을 알려주는 지도를 보며, “아니, 영국에서는 이런 곳도 알려주나?” 했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과 생각하고 느낄 시간까지 안내한다. 이런 이야기를 해주면 친구들은 “우리도 이렇게 여유를 가지고 살면 얼마나 좋을까?”라며 부러워하는데, 나는 이 말을 해주고 싶다. “I am the one to make it happen. 그렇게 살기를 원한다면, 그렇게 살아야 한다”고.
이진숙 전 ‘클럽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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