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와인만큼 역사와 문화가 깊이 깃든 술이 있을까요. 역사 속 와인, 와인 속 역사 이야기가 격주 수요일 <한국일보>에 찾아옵니다. 2018년 소펙사(Sopexaㆍ프랑스 농수산공사) 소믈리에대회 어드바이저 부문 우승자인 출판사 시대의창 김성실 대표가 씁니다.
1969년 우리나라 최초로 생산된 사과와인 파라다이스(왼쪽), 1974년 포도로 만든 첫 와인인 노블와인. 출처=국립민속박물관ㆍ해태30년사

우리나라 최초의 와인이 생산된 1974년, 필자는 초등학생이었다. 정부에서 대대적으로 혼분식을 장려하던 때였다. 점심시간마다 선생님은 회초리를 들고 다니며 도시락을 검사했다. 아이들은 혼나지 않으려고 콩이나 보리를 쌀밥 곳곳에 심기도 했다.

혼분식 장려 정책은 학교 도시락에만 머문 게 아니었다. 술 산업에도 크게 영향을 미쳤다. 박정희 정부는 1965년 양곡관리법이란 이름으로 주류회사와 양조장은 물론이고, 심지어는 가정에서도 쌀로 술을 빚지 못하게 했다. ‘먹을 쌀도 부족한데, 그깟 술이나 빚다니!’ 일제강점기 때 주세법과 주세령 탓에 근근이 명맥을 이어오던 우리 전통주 산업에는 그야말로 치명적이었다. 가히 분서갱유에 필적했다 할까.

그 즈음 정부는 포도나무가 척박한 땅에서도 잘 자란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비옥한 땅에는 곡식을 심고, 척박한 땅에는 포도나무를 심으면 전 국토를 효율적으로 활용할 수 있다는 ‘순진한’ 발상을 하고 만다. 주류회사에 쌀 대신 과일로 술을 만들라고, 강요 섞인 장려를 하면서 말이다. 그런데 온갖 부작용을 낳았던 이 법이 단기적으로는 와인 산업에 긍정적으로 작용했다.

한국 와인들. 왼쪽부터 안산 그린영농조합 그랑꼬또 청수와인, 여포와인농장 여포의꿈 화이트와인, 도란원 샤토 미소 로제와인, 오노피아 오놀로그 로제와인, 수도산산머루농원 크라테 레드 세미스위트와인, 위와이너리 위 레드와인, 샤토나드리 너브네 스파클링 로제와인, 불휘농장 시나브로 화이트와인. 와인 추천=최정욱 와인연구소 소장(전 광명동굴와인연구소 소장)ㆍ사진=김성실

잠시 우리나라의 와인 정의를 알아보자. 유럽연합에서는 ‘포도로 만든 발효주’만을 와인이라고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폭넓게 정의하는데 포도는 물론이고 머루 사과 감 등 다양한 과일이 와인의 재료로 인정된다. 포도를 발효해 만들면 ‘와인’이라 하고, 다른 과일을 발효해 만들면 과일 이름을 붙여 ‘머루와인’ ‘사과와인’ 등으로 칭한다.

1969년 우리나라 최초의 와인인 사과와인 파라다이스가 만들어진 데에는 이런 배경이 있다. 그 뒤를 이어 해태주조에서 노블와인을, OB에서 마주앙(현재는 롯데주류)을, 진로에서 샤토 몽블르를 만들었다. 그 뒤 파라다이스는 올림피아를, 대선주조는 그랑주아를 생산한다.

국산 와인은 20여년 동안 그야말로 초유의 전성기를 누렸다. 그러나 1987년 수입자유화조치, 1988년 서울올림픽을 계기로 수입된 와인에 밀려 한 순간에 무너져 내렸다. 이렇게 된 데는 여러 이유가 있지만, 당시 정부는 초기 와인 생산 기업들에 보상 차원에서 와인 수입권을 주었는데, 기업들이 ‘제조’보다 수익이 더 좋은 ‘수입’으로 방향을 틀었기 때문이다. ‘철학’ 대신 ‘자본의 논리’에 따른 결과였다.

포도 이외 다른 과일을 쓴 한국 와인들. 왼쪽부터 오름주가 7004S와인(키위), 오미나라 오미로제 결 스파클링와인(오미자), 예산사과와인 추사 로제와인, 채향원 블루베리와인, 동진주조 프리미엄 부안참뽕와인(오디), 금이산농원 복숭아와인. 와인 추천=최정욱 와인연구소 소장(전 광명동굴 와인연구소 소장)ㆍ사진=김성실

그렇게 자취를 감춘 듯했던 국산 와인이 10여년 전부터 조금씩 돌아오더니 요즈음 다시 빛나고 있다. 1970,80년대처럼 대기업 중심이 아닌 ‘농가형 와이너리’에서 와인을 만들면서부터다. 최근엔 ‘국산 와인’에서 ‘한국 와인’으로 명칭까지 바꿨다. 한국 땅에서 나는 과실을, 한국 땅에서 발효시켜 만든 와인이라는 의미를 이름에 담았다.

사실 우리나라는 열매가 한참 자라는 시기에 비가 많이 내린다. 열매에 수분이 많아지니 알코올을 생성하는 당분이 적을 수밖에 없다. 떫지 않고 적당히 달콤새콤하니 그냥 먹기에는 더할 나위 없이 좋지만, 술 재료로는 한계가 있다. 하지만 몇 년 전부터 농촌진흥청 등 관련 연구소에서 우리 풍토에 맞는 품종을 개발하고, 농가와 와인메이커를 지원했다. 불리한 테루아르를 극복하려고 와인메이커들도 부단히 노력했다. 부족한 당분을 끌어올리고 풍미를 더하는 재배법과 양조법을 배우고 터득해 왔다.

그 결실이 얼마 전부터 나오고 있다. 한국 와인의 맛과 품질이 좋아지자 이런저런 대회에서 수상도 했다. 그러자 유명 호텔과 레스토랑의 와인 리스트에도 올랐다. 국가 행사의 만찬주나 건배주로도 선정됐다. 면세점에 입점한 와인도 있다. 최근엔 인터넷 구매도 가능해 애호가들에게 좀 더 가까워지고 있다. 현재 우리나라에서는 200여개의 와이너리가 800여종의 와인을 생산하는 것으로 추산한다고 최정욱 와인연구소 소장이 귀띔했다.

특급 호텔인 더 플라자 호텔 르 캬바레 시떼의 와인 리스트에 올라있는 한국 와인들. 와인 제공=최정원 소믈리에ㆍ사진=김성실

얼마 전 한국 와인을 와인리스트에 올리고 관련 행사를 주관하는 등, 한국 와인을 알리는 데 앞장서고 있는 더 플라자 호텔 르 캬바레 시떼의 최정원 소믈리에를 만났다. “외국인 손님들에게 한국 와인을 추천하면 한국에서도 와인이 생산되느냐고 묻습니다. 맛을 본 후엔 맛있다고 칭찬을 합니다. 저희 업장에서만 월 100병 이상 판매될 정도로 인기가 높습니다.” 솔깃했다. 직접 마시고 확인해 보고 싶었다. 요즘 와인 전문가 사이에서 맛있다고 정평이 난 바로 그 와인을 한 병 샀다. 잔에 따라 눈, 코, 입으로 와인을 음미했다. 단단했던 내 생각의 껍데기가 깨지는 순간이었다. 아브락사스! 아니, 아브라카타브라! 이 땅에 마치 마법과도 같이 한국 와인의 역사를 만들어 가는 분들을 응원한다.

시대의창 대표ㆍ와인 어드바이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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