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법 농단 첫 내부 저항자… “사법 개혁 사실상 실종 상태”
‘법관 정치화’ 논란 속 입당… “국회서 그 책임 다하고 싶어”
“사법 농단 사태가 인생의 숙제처럼 저를 따라 오는 느낌이다. 고민의 마지막 단계엔 이걸 해결해야 그 다음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4·15 총선을 앞두고 더불어민주당에 합류한 이탄희(42·사법연수원 34기) 변호사는 ‘숙제’라는 단어를 거듭 곱씹었다. 정치 참여가 ‘과업’으로 느껴진다고도 했다. 2017년 그가 ‘사법 농단 사태’의 첫 내부 저항자가 됐던 이유는 ‘좋은 판사로 남고 싶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수사가 시작되고, 이 변호사 스스로도 상상하지 못했던 재판 거래의 윤곽이 드러나며 양승태 전 대법원장이 구속됐다. 이후 법원을 떠났고 ‘가난한’ 공익변호사가 됐다. 모든 것은 ‘명예를 지키고 싶어서’였다. 그런 그가 ‘법관 정치화’ 논란의 한 가운데로 들어섰다. 여당에 입당하고 총선 출마를 선언하면서다.
최근 국회에서 만난 이 변호사는 “(저의 정치권 입문에 대해) 비판이 있을 수 있다는 점은 예상했다”면서도 “대법원이 비위 법관의 탄핵도, 징계도 사실상 나 몰라라 하는 상황에서 사법농단 1호 재판까지 무죄가 나 정말 화가 많이 났고 책임감도 많이 발동했다”고 했다. 사법 농단 사태가 유야무야 될지 모른다는 위기감이 책무 의식을 자극했다는 얘기다.
그는 ‘법관 정치화 논란’에 더해 최근 진실 공방에도 휩싸였다. 언론 인터뷰에서 “법원 내부 게시판에 저를 지지하는 내용이 많다”고 한 발언이 불씨가 됐다. 그는 “저에게 전해진 이야기를 했던 것 뿐”이라고 설명했다. 또 “지난 3년간 많은 억측과 모함을 겪어 왔고, 그 때문에 정치를 오래 고사했다”면서도 “(고민 과정에서) 아내가 ‘이 상황을 회피하면 스스로를 용서할 수 있겠냐’고 물었던 말이 오래 마음에 남았다”고 했다. 숙제를 잔뜩 받아 든 모범생마냥 이 변호사의 표정이 숙연해졌다.
◇ 이하 인터뷰 전문
-사법농단 1호 재판 무죄 판결을 보고 결단을 굳혔다고 했는데.
“사법농단 사태의 본질은 헌법 위반, 직업 윤리 위반이다. 형사 사건이 아니다. 지난 1년 간 변호사로서 사법 농단 사태와 관련해 활동하며 가장 강조했던 것이 이 부분이다. 즉 형사 사건 유·무죄에 따라 마무리할 일이 아니라, 법관 탄핵이나 법관 징계로 제대로 마무리 지어야 한다는 얘기다. 자칫 형사 사건만으로 마무리 짓겠다 시도하면 형사 사건이 무죄가 날 경우, (연루자들이) 아무 잘못이 없는데 마녀 사냥을 당했다는 것처럼 행동할 수 있다. 가해자와 피해자가 뒤바뀐다. 정의와 부정의가 뒤바뀐다. 그런 일이 우리 역사 속에서 비일비재했다. 최근 예로는 세월호 사건도 그랬다. 유가족들이 피해자이고 권력자들이 가해자인데, 권력자의 잘못은 명확히 적시에 드러나지 않았고, 유가족이 마치 지나친 요구로 권력자들을 이유 없이 괴롭히는 것처럼 부당한 공격을 받았다.
사법 농단도 형사 사건 무죄를 계속 염려했고, 무죄로 흘러가기 전에 탄핵 징계라는 공적 확인 절차를 마무리해야 한다고 1년 내내 주장했다. 그런데 탄핵도 안됐고, 징계도 사실상 면죄부를 주면서 나 몰라라 하는 상황이라 생각된다. 이 상황에서 형사 사건 무죄까지 나오니 정말 화가 많이 났다. 책임감도 많이 발동했다.”
-법원이 더 적극 나섰다면 선택이 달라졌을까.
“정확히는 대법원장이다. 방치한 거다. 흘러가는 재판 시스템에 맡겨놓고. 사법 농단 본질은 다루지 않았다. 사법 농단의 본질은 재판을 담당하지 않는 판사가 재판에 개입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형사 사건 재판은 그 과정에서 벌어진 소소한 수단과 방법(재판자료 유출 등)에 대해서만 다룬다. 예를 들어, 물건을 훔친 사건에서 절도가 본질인데, 집에 들어간 주거 침입에 대해서만 재판이 열리는 식이다. 주거 침입만 무죄가 나왔는데, (연루자들이) 부당하게 마녀 사냥 당했다는 식으로 나오는 상황이 전개될 수 있는 것이다.”
-대법원이 스스로 해결할 수 있는 단계를 벗어났다고 봤나.
“대법원장이나 국회가 풀어야 한다. 변호사로 제가 계속 국회의 역할과 책임을 강조해왔는데, 이제는 제가 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는 할 일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더 강하게 하게 됐다. 비단 이것 하나 때문만은 아니지만, 마지막에 (정치참여) 결심을 굳히는데 영향을 줬다.”
-민주당이 ‘사법개혁을 21대 국회 핵심과제로’ 약속했나.
“저를 찾아오신 여러 분의 소개로 지도부도 뵙고 이야기했다. 정말로 사법 개혁의 의지가 있는지 제 나름대로는 여쭤보고 싶었다. 21대 국회에서 사법 개혁을 민주당의 핵심과제로 삼아주시겠냐, 그리고 제가 그걸 공개해도 되겠냐고 했는데 흔쾌히 그러자고 답이 왔다. 이 또한 마음을 움직이는 큰 계기가 됐다.”
-원론적인 공감대만으로는 쉽지 않은 일인데.
“중요성에 대한 공감대는 서로 충분히 나눴다. (각론은) 당이 연구해 온 부분도 있고, 제가 강조한 부분도 있다. 앞으로 고민해 나가야 할 문제다.”
-고사하는 과정은 길었다고 들었다. 마음을 바꾼 다른 결정적 계기도 있나. 마음을 울린 말이라든가.
“사법 농단 1호 사건 무죄가 나온 일, 당에서 사법 개혁을 핵심 과제로 삼겠다고 약속한 일이 (결정에 준 영향이) 제일 컸던 것 같다.
결심과 무관하게 별개로 쭉 돌아봤을 때, 초기에 만나 뵀던 의원 중 한 분이 ‘희망을 이어가야 하지 않겠냐, 정치에 대한 혐오감이 만연한 상황이 대한민국의 미래에 결코 좋지 않다, 정치의 영역에도 희망이 있다는 느낌을 국민들이 가질 수 있도록 해달라’고 하셨다.
솔직히 당시 한 제 답은 그랬다. ‘제가 이미 사법 농단에 저항하는 과정에서 모함과 억측을 많이 당했다. 그런 상황에 다시 놓일 게 솔직히 두렵기도 하고. 그걸 감안하면 국회 안에서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는 건지, 국회 밖에서 더 많이 할 수 있는 건지 모르겠다. 오히려 밖에서 더 일을 많이 할 수 있지 않냐’고.
그랬더니 그 분이 아주 정색을 하며 ‘모함과 억측에 대한 두려움은 이해하지만 (그것 때문에만 고사를 한다면) 아주 자기중심적인 생각이다’라고 잘라 말씀 하더라. 돌아보면 굉장히 강렬하게 기억에 남아있다. 결심하기까지는 그로부터도 한참 걸렸지만 돌아보면 많은 생각을 하게 한 말이었다.”
-‘모함과 억측’ 탓에 지치진 않았나.
“사람도 휴대폰 배터리와 비슷한 것 같다. 충전됐다가 많이 쓰면 다시 충전이 필요할 때가 오고. 그런 흐름이 있는 것이다. 거기에 맞춰서 관리를 해나가는 게 중요한 거 같다. 이제 시작하는 시점인데 지치는 이야기를 하고 싶진 않다.”
-사법 개혁을 어떻게 하겠다는 구체적 그림이 당과 다를 수도 있다. 금태섭 의원의 경우 검찰 개혁을 누구보다 지지하지만 방법론에 대한 비전은 당과 달랐던 대표적 예다.
“개혁 작업에는 명확한 상이 있어야 하고, 방법론도 있어야 한다. 시스템을 어떻게 현실 속에서 만들어낼 것인가의 두 가지를 다 제가 시작 단계에서 계획을 세워 들어가는 것은 좀 욕심이라고 생각한다. 불가능하고, 오히려 판사스럽다. 고시 공부 하듯이 작전표를 짜서 하긴 곤란하다. 어느 정도는 내 삶의 이력, 판단력을 믿고 들어갈 수 밖에 없는 부분도 있다는 생각을 한다.”
-공익변호사로 활동은 어떤 영향을 줬나.
“원래 공감(공익인권법재단)에 갈 땐 사법개혁 활동을 할 생각은 전혀 아니었다. 빈곤 복지 문제에 예전부터 관심이 많았다. 현장 경험도 했고, 구체적으로는 주거권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됐다. 청년 문제인 동시에 빈곤 문제라서. 기존 법조인의 삶으로선 경험할 수 업던 현장의 문제와 새로운 영역을 발견하는 소중한 시간이었다. 앞으로 어떤 활동을 하든 큰 자산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또 하나 느낀 것은 사회적 약자를 옹호하는 활동을 한다고 하면, 많은 분들은 ‘정의롭다’고 생각을 하면서도, 한편으론 ‘나는 약자까지는 아닌데, 나를 위한 일은 아니구나’ 하는 경향이 있다. 그런데 오히려 실제 활동해보니 약자의 권익을 옹호하는 활동은 평범한 대부분의 이들에게 도움이 되는 경우가 많다.
공감에서 참여했던 소송 중 하나는 지하철과 승강장 사이 단차 소송(서울교통공사를 상대로 한 지하철 단차에 의한 장애인 차별행위에 대한 시정조치 및 손해배상 청구 소송)이다. 이 간극이 너무 넓어 휠체어를 타신 분들이 그 사이에 끼어 위험에 처하기도 하고, 넘어가려고 일부러 반동을 줘서 진입하다가 몸만 날아가기도 하고, 그 과정에서 바닥에 쓰러져 모욕감을 느끼기도 한다. 그런데 이 소송에서 승소하면 이익을 보는 것은 장애인뿐이 아니다. 발 빠짐 사고가 3~5일에 1번씩 발생하고 있다. 임산부, 어린 아이, 노인들 등 다 이익을 보게 된다. 약자 권익을 보호하는 활동이라는 게 평범한 모두를 위한 활동이 되는 경우가 많다는 거다.”
-정치 참여 의지에도 영향을 줬나.
“꼭 그렇진 않다. 사법 농단에 대해 다시 목소리 낸 것도 예정에 없던 일이다. 2019년 5월 김명수 대법원장이 66명의 (비위) 법관 중 10명을 제외한 모두에게 면죄부를 주면서, 제가 그 날 배신감 때문에 너무 화가 나 페이스북에 글도 쓰고, 이후로 강연 기고 인터뷰 등을 쭉 하게 됐다.”
-다른 공익 활동을 하는 동안, 시스템에 의해 매듭 지어지지 않을까 싶은 기대가 무너졌다는 의미인가.
“(사법 농단 사태가) 제 인생의 숙제처럼 저를 따라 오는 느낌이다. 이걸 해결해야 그 다음단계로 나아갈 수 있다는 생각까지 마지막에 들었다.”
-사법 농단에 비판적 목소리를 냈던 판사들이 정치를 하는 것, 특히 여당에서 하는 것이 많은 우려를 낳고 있다.
“비판이 있을 수 있다는 점은 예상했다. 우려를 경청해 잘 듣고 있고, 마음에 새길 부분은 새길 것이다. 다만 저는 제 이야기를 드릴 수 밖에 없을 것 같다. 제가 처음 사표를 낸 것은 2017년 2월이다.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이 결정되기 이전이다. 당시 옆방 판사는 절 찾아와 ‘형, 정말 구속될지도 몰라’ 하며 걱정했던 기억이 난다. 우리가 그렇게들 생각을 할 정도의 상황이었다.
그 이후로는 탄핵으로 정권이 바뀌고, 대법원장이 교체되고, 제가 들었던 판사 뒷조사 및 판사 모임 와해 결정을 넘어서는 ‘재판 거래’라는 더 큰 이슈가 드러났다. 그러면서 양승태 전 대법원장이 구속까지 되는 상황이 벌어졌다. 그 과정에서 워낙 시간이 많이 소요됐고 저도 판사로서 수명이 다했다는 생각에 상실감 속에서 법원을 나와야 했던 상황이 벌어졌다. 공익변호사라는 제 20대 때의 원래 꿈을 찾아서 다시 한번 활동을 해보려고 결심했다.
이후 사법 개혁은 잘 될 줄 알았는데 사실상 실종상태가 됐고, 국회의 역할을 강조한 제게도 책임이 돌아와 여기까지 오게 됐다. 지난 3년의 과정이 제게는 아주 길고 거친 과정이었다는 점을 말씀을 드리는 것으로 (법관 정치화 논란에 대한) 답을 갈음하는 게 좋겠다.
기본적으로 저에겐 계획을 세워서 뭔가가 되는 삶이라는 것은 이제 끝난 게 아닌가라는 생각도 한다. 29세에 판사가 된 것도 어린 나이에는 크게 된 것이고, 39세에 행정처 심의관이 될 것도 초과 달성된 셈이었다. 그 이후로 벌어진 3년의 과정은 그냥 제게 주어지는 책임, 그 상황에서 필요한 일을 그냥 하는 삶이었다. 되는 삶이 아니라 하는 삶만 남은 게 아닌가 싶다. 앞으로도 그때 그때 과업에 집중하는 삶을 살아가고 싶다.”
-한국당에서 ‘이탄희 금지법’을 언급하기도 했다. 법관 퇴직 후 2년 내에는 출마할 수 없도록 하겠다는 내용이다.
“거듭 저는 제 이야기를 하는 수 밖에 없다. 제 경우엔 재판을 진행한 지는 3년 정도 됐고, 정식 퇴직은 1년이 되었다. 물론 우선 어떤 룰이 필요하다면 논의하고 합의해서 룰을 새롭게 만들고, 합리적 기준에 따르는 것은 필요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다만 이름은 좀 바꿔야 할 것 같다. 찬물도 위 아래가 있지 않나. 나경원 전 자유한국당 원내대표의 경우 (법원) 퇴직 후 바로 대선 캠프에 가신 것으로 안다.” (웃음)
-변호사 활동 기간이 완충지대가 됐다고 보나.
“저는 스스로를 변호사라고 생각한지 오래다. 변호사로 일하면서 과거 판사 활동 경험 때문에 스스로를 판사라고 착각해서 주변 사람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분들의) 상황을 많이 봤다. 그렇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했고, 변호사가 됐다. 저는 스스로를 판사가 아니라 변호사라고 생각하고 있다.”
-‘좋은 판사로 남고 싶었다’거나 판사로서의 동료 법관들과의 연대감을 강조한 바 있어서 지금 논란이 더 부담되진 않나.
“좋은 재판을 하는 사는 삶이라는 이상이 있었고, 그걸 공동으로 추구하는 공동체라는 게 제 마음 속에 있었다. 그 속에서 공동체에 대한 소속감도 느꼈다. 중요한 것은 그런 가치와 이상을 중심으로 한 소속감이었다.
기본적으로 이제 법원 내부의 역사는 법원 내부에 계신 분들이 정리해야 할 몫이라고 생각한다. 제가 이제 와서 왈가왈부하거나 현직 판사와의 연결 관계를 드러낼 생각은 없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지금 제가 추구하는 가치가 법원 개혁이고, 재판을 받는 평범한 사람들의 이익이 반영되는 법원 개혁이 가치 있다고 생각한다. 그 공적 가치를 함께 추구하는 공동체가 마음 속에 자리잡는 과정이다. 거기서 소속감을 찾고 과업을 해 나가는 게 제가 해야 할 일 같다.”
-법원 내부 게시판에서 ‘이탄희 지지발언’이 있었냐 여부로 최근 논란도 있었다.
“저는 저한테 전해진 그대로 이야기를 했던 것이다. 더 이상 판사들과의 연결 관계나 이런 것들을 드러낼 의도는 없었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전해진 응원의 내용들은 무엇이었나.
“결국 사법 개혁을 지지한다는 것이다. 저에 대한 많은 이야기는 경청하겠지만, 그게 법원 개혁 자체에 반대하는 방향으로 나가는 상황은 우려하고 있다. 앞으로 무엇을 할 것인가, 어떻게 할 것인가가 제게는 중요하다. 사법 개혁이 원래 국민의 관심을 받기 어려운 주제 아닌가. 그런데 지금 이 정도로 많은 국민이 우리 사회의 과제라고 인식하는 상황이 됐고, 사법 신뢰도는 OECD(경제협력개발기구) 꼴찌를 기록하고 있다. 결국 저에게 과제가 주어졌고 어떻게 무엇을 해야 할 지가 정말 중요하다.”
-비위 법관 탄핵을 1호 약속으로 꼽았는데.
“과거를 위해 탄핵하자는 건 아니다. 미래를 위해 탄핵이 필요하다. 직업 윤리의 기준이 필요하다. 사법농단 사태를 거치고도 우리에겐 아무런 공적 확인이 없었다. 판사들의 직업 윤리 기준이 정립되지 않은 것이다. 탄핵을 하면 탄핵 결정문을 받게 되기 때문에 거기에 직업 윤리가 적시될 수 밖에 없다. 그런 기준 마련을 위해서 특히 필요하다는 거다.
판사뿐 아니라 공직사회 전반, 고위공직자 전반을 위해 필요하다. 더 이상 ‘조직을 위해서’라는 이유로 면책되지 않는다는 기준을 마련하고, 이 기준을 반드시 지켜야 한다. 그게 아니면 가치에 대한 배신, 국민에 대한 배신이라는 점을 공직 사회 전반이 알아야 한다. 공직은 사유물이 아니다. 공부 잘해서 누리는 사유물이 아니다. 우리 미래를 위해 그게 꼭 필요하다.”
-지적한 대로 사법 신뢰도가 바닥이다.
“직업윤리는 개개인의 문제이고 시스템적으론 불투명한 것이 문제다. 신뢰도가 낮은 이유는 여럿이다. 우선은 현재 상황에선 사법 농단을 제대로 해결하지 못했다는 것이 첫 측면이다. 국민들이 그 과정을 다 봤는데, 법원이 문제가 된 부분을 제대로 청산하고 가겠다는 의지를 보여주지 못했다. 심지어 (비위 법관) 66명 중 10명을 빼고는 면죄부를 받았는데 애초에 이들이 어떤 혐의를 받았는지, 왜 면죄부를 받았는지 국민들이 알 방법이 없다. 언론이 질문을 할 기회 자체가 없을 정도로 불투명하다. 여기서 오는 신뢰도 문제가 크다.
또 근본적으로 사법 시스템 자체가 굉장히 불투명하다. 사법의 시스템, 행정 모두가 그렇다. 재판만해도 녹음이나 녹취하는 나라가 많은데 그런 것도 안되어 있고, 법정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는 지 국민이 알기 어렵다. 판결문도 구하기도 어렵고 봐도 이해가 안 간다.”
-개방적 사법개혁기구 설치를 강조한 배경도 같은 맥락인가.
“그렇다. 특정한 단일 블록이 이 기구를 좌지우지 할 수 없도록 하는 게 중요하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법관도 과반수를 차지해선 안 된다. 법관이 많으면 법관 집단의 이익을 지키기 위해 나설 수 있어서다. 예를 들어 재판 녹취도 판사들은 불편해서 싫어한다. 하지만 국민 입장에선 유효한 제도다. 내가 법정에서 들은 말이 있는데 그걸 이야기할 때는 입증할 자료가 없어서 곤란한 경우가 많다. 사회적 관심 대상이 되는 재판에서 어떤 이야기가 오고 가는지 알고 싶어도 방청권이 한정돼 있다. 이런 것은 국민에겐 유용해도 판사의 이익과는 충돌하는 제도다. 개혁기구에 법관이 과반수 이상이 되면 이런 제도는 도입하기 어렵다.”
-대법원 자체 사법개혁안의 한계는.
“대법원장은 법원행정처를 폐지하겠다고 약속했는데 모순되게도 지금 사법개혁안은 이 법원행정처가 내놓고 있다. 폐지가 약속된 기구가 사법 개혁을 주도하는 말도 안 되는 모순된 상황이다.
사법발전위원회 후속추진단에서 의장을 제외한 나머지 의원들이 법관과 비법관의 구성을 동수로 하라고 했는데도, 대법원장은 법원 내부 의견에 더 무게를 둬서 사법행정자문회의를 만들었다. 비위사실 통보 66명에 대한 면죄부에 대해서도 법원 내부의 문제제기가 없었던 점이 아쉽다. 대법관 다양화도 이야기했는데, 최근 대법관의 제청 모습을 보면 50대 후반 법원장 출신의 남성 일색이 여전하다. 굉장히 실망스러운 모습들이다. 사법 개혁 기구를 새로 만들어야 한다. 21대 국회가 그것부터 시작했으면 좋겠다.”
-개혁 기구의 다른 우선 과제들은 무엇인가.
“할 일이 무궁무진하다. 거슬러 올라가면 1987년 개헌 이후로 거의 근본적 변화가 없었다. 30년 이상 밀려온 과제들이다. 그래서 ‘사법개혁의 대장정’이라고 표현할 수 밖에 없다. 형량 결정 권한도 판사의 독점권인데 판사는 미국처럼 유·무죄 결정에 집중하고 형량은 판사들이 아닌 전문가, 과학자 등이 참여하는 과정으로 나아가는 게 필요하다. 양형 기준뿐 아니라 개별 사건에서도 전문가가 참여해 같이 결정하는 방식으로 바꿔 가는 게 맞다고 본다. 지금도 제한적인 참여 제도가 있지만 우리 나라는 본질적으로 양형과 유·무죄를 한날 같이 이야기 한다. 유·무죄가 결정되지 않은 상태에서 전문가들이 형량을 깊이 고민하기는 어렵다.”
-사법 농단 사건이 알려진 도화선은 ‘인사’ 문제를 담은 설문지였는데.
“한 두 사람이 인사권을 좌지우지 할 수 없도록 만드는 것도 중요하다. 이 경우 판사는 인사권자를 쳐다볼 수 밖에 없기 때문에, 재판에 집중할 수 있도록 인사 시스템을 만드는 게 중요하다. 인사 기구도 앞으로 만들어지겠지만 특정한 블록이 좌지우지 할 수 없도록 구성하는 게 중요하다.”
-‘개방적 법원 개혁’을 논의할 때 항상 뒤따르는 것이 ‘권력만 바라보는 판사도 위험하지만 대중만 바라보는 판사도 위험하다’는 비판이다.
“우선 개념을 명확히 구분해야 한다. 재판은 반드시 독립되어야 한다. 재판을 하는데 다른 눈치를 보는 판사가 있어선 안 된다. 중요한 것은 문제적 사법 제도 운영 시스템을 바꾸라는 것이다. 이를 반대하는 사법부 독립이란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재판 독립은 판사가 철저히 지켜야 할 가치지만, 사법 제도 개혁을 막기 위해 사법 독립을 이야기하는 잘못된 도그마는 버려야 한다.
헌법에 사법부 독립이라는 말은 없다. 사법권 독립이라고 쓴다. 사법권은 재판을 의미한다. 사법권을 사법부라는 말로 바꿔 부르기 시작하면서 개념이 오염된 경우가 많다는 것을 지적하고 싶다.”
-이런 개혁에 그간 법원은, 또 정치권은 왜 더 적극적이지 못했다고 보나.
“일단 스스로 개혁에 성공한 조직은 하나도 없다. (계속) 안에서 밖에서 보는 건 다를 순 있지만, 어떤 국회의원들은 중요한 순간에 생각보다 법원 눈치를 많이 본다는 생각을 했다. 법원이 개혁 대상이 되면, 법원에선 분명히 저항하는 그룹이 있을 수밖에 없다. 그런데 그 저항에 직면했을 때 위축되거나 물러서는 분들이 생각보다 많다는 것을 느꼈다. 국회의원 개개인과 연관된 재판이 진행될 가능성도 항상 존재한다. 그런 것들로 인해 법원 개혁이 추진력을 못 얻기도 하더라. 국회 내에서 이런 부분을 풀어갈 구심점 역할이 필요한 듯 하다.”
-변화의 가능성이 있다고 보나.
“21대 국회가 어떻게 구성되느냐의 문제다. 그래서 이번 총선이 중요하다. 촛불 혁명 뒤의 총선이기도 하다. 21대 국회가 ‘일할 수 있는 국회’의 모습으로 구성됐으면 좋겠다. 정책 중심으로 협업이 활발하게 일어날 수 있는 정치 문화가 확립되면 좋겠다. 그것이 어찌 보면 촛불이 요구하는 정신이 아닐까. 공직 사회 전체가 바뀌어 가는 것이기도 하다. 일 할 수 있는 국회, 과업 중심의 국회가 되는 게 중요할 것 같다.”
-가족들은 어떤 반응인가.
“아내가 제게 묻더라. 이런 상황을 회피하면 스스로를 용서할 수 있겠냐고. 그 말이 강하게 남았다. (그의 아내는 4.16세월호참사 특별조사위원회 피해지원점검과장을 지낸 오지원 변호사다.) 중학생 딸은 ‘아빠가 좋은 일 하려고 하는 거 알고 있어’라고 말해 주더라. 다만 ‘내 신상이 털리지 않게 조심해줬음 좋겠다’고도 했다.” (웃음)
-다른 동료들은 어땠나.
“2019년 5월 이후로는 법원 개혁을 위해 같이 활동해온 변호사님들이 많이 계신다. 그 분들은 주로 20대 국회에서 아쉬웠던 부분들을 같이 경험했다. 그런 아쉬움에 대해 함께 이야기 하면서 국회에 들어가게 되면 법원 개혁에 관련해 많은 성과를 내달라, 기대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있다.”
-사법연수원 시절 ‘이라크 파병 반대 성명’을 주도했다 징계를 받은 일이 유명하다.
“저는 혼자서 많은 걸 바꿀 순 없다고 생각한다. 같이 해서 힘이 발생하는 거다. 2003년(사법연수원 시절)에도 마찬가지였다. 그때도 국제인권 법규, 우리 헌법상 국제판결주의 등의 문제에 대해 공유하는 많은 연수생이 있었고, 같이 활동에 대해 논의하면서 문제 의식을 나눴다. 저는 개인이 권위에 도전하는 특별한 신념 때문에 힘이 발생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뜻을 함께 하는 사람들을 모아내고 서로가 서로에게 소속감을 주는 상황에서 힘이 발휘된다고 생각한다. 그게 저의 특성이기 때문에, 정치도 그런 제 스타일대로 해나가는 게 맞지 않나 싶다.”
-원내에 진입하면 비교적 젊은 의원 축에 속한다. 정치권 세대 교체는 어떻게 바라보나.
“이제 시작하는 상황에서 거창한 이야기를 하면 진실되지 못하게 보일 수 있다. 다만 중요한 것은 생물학적인 세대 교체가 아니라 그를 통해 달성하려고 하는 내용, 즉 정치 문화의 교체가 아닌가 싶다. 정치인 개인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문화에서 과업을 중시하는 문화로 바뀌어가는 과정 속에 우리가 있다고 본다. 그런 생각을 공유하는 분들이 많이 정치에 진출하는 게, 지금 필요한 세대 교체가 아닌가 생각한다.”
-좋은 정치가 무엇이라 생각하나. 롤모델이 있나.
“평범하고 평등한 정의. 과업에 집중하는 정치, 미래를 위한 제도를 설계하는 정치가 좋은 정치라고 본다. 롤모델은 아직 제가 직접 참여를 통해 많은 경험을 쌓지 못한 상태라, 현실 정치에 계신 분들에 대해 말씀드릴 상황은 아닌 것 같다. 다만 저도 많은 시민들처럼 김대중 전 대통령, 노무현 전 대통령을 보면서 많은 용기와 영감을 받고 자라온 세대다. 두 분의 삶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한다. 김 전 대통령의 말씀 중 서생의 문제의식, 상인의 감각을 다 갖춰야 한다는 말이나, 노 전 대통령의 사람 중심의 철학 등은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큰 가치라고 본다.”
-사법 개혁이라는 과제 외에도 외연 확장 요구를 많이 받게 될 텐데. 정치인으로 장기 계획은 어떤가.
“그런 부분들에 대해서 조언을 많이 듣고 있다. (외연 확대의) 필요성을 강조하시는 말씀에 대해 공감하는 편이다. 다만 억지로 성급하고 과장되게 말씀을 드리는 건 좋지 않다고 생각한다. 중요하게 생각하는 핵심 과제를 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확장될 수 있을 것 같다. 노력해 나갈 생각이다.”
김혜영 기자 shine@hankookilbo.com
조소진 기자 sojin@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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